지금 한국을 관통하는 대중문화의 한 얼굴
한국 만화가 일본 만화의 지대한 영향 속에 출발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관찰의 범위를 최근 10년 정도로 한정하고 돋보기를 들이대면 조금씩 다른 디테일이 보인다. 그 사이에 한국의 만화는 일본 만화와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잘 보여주는 지표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양국의 만화 업계 종사자 중 '준 연예인' 취급을 받는 사람들의 직군이다.
일본을 보자면 성우가 그렇다. 인기 만화가 애니메이션과 게임으로 만들어지는 수순이 공식처럼 자리잡은 이 업계에서 성우들의 역할은 산업 전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콘텐츠의 얼굴마담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성우에게는 연기 실력뿐 아니라 노래, 춤, 외모 등 다양한 방면의 매력이 요구된다. 성우가 앨범을 내고 화보를 촬영하는 일이 이 나라에서는 매우 흔하다. 성우를 중심으로 아이돌과 유사한 팬덤 문화가 형성되고, 팬들은 성우에 대한 애정만으로 그가 참여한 콘텐츠를 구매하기도 한다. 요컨대 일본 성우의 비대한 존재감은 애니메이션과 게임이 '오타쿠 문화'를 기반으로 만화 원작과 단단하게 결속되어 있는 일본의 오랜 업계 구조를 보여준다.
반면 한국의 경우 만화 업계의 '준 연예인'은 웹툰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양대 포털과 웹툰 시장의 비약적인 성장, 소셜 네트워크와 개인방송 플랫폼에 의해 인플루언서 중심으로 재편된 미디어 환경, 그리고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콘텐츠 시장의 확장 등 다양한 요인에 힘입어 단기간에 큰 인지도 상승의 기회를 얻었고, 그 결과 그들이 확보한 새로운 정체성은 기존의 '만화가'와는 확실히 구분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작업실에만 틀어박혀 있지 않고 요리 프로에 출연하기도 하고(김풍), 젋은 세대의 트렌드를 선도하며(기안84), 천만 단위 관객을 동원하는 블록버스터 영화의 원작자이기도 하다(주호민). 일본의 만화와 비교하면 한국의 웹툰은 주요 전파 채널인 네이버를 중심으로 훨씬 다양한 계층의 수용자들에게 전방위적인 영향을 미친다.
물론 시장의 물리적 부피만으로 따졌을 때 한국의 웹툰은 아직 일본 만화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일본 만화가 주요 향유 집단인 오타쿠를 중심으로 성장하는 동안 점점 '모에' 등의 매니악한 문법을 발달시켜 왔다면, 태생부터 한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매체인 포털 사이트에 게재된 웹툰은 애니메이션보다는 드라마와 영화의 원작이 되는 경우가 더 많았고, 특정 코드로 수렴하는 대신 계속해서 다양한 장르와 독자층을 흡수하고 그 외연을 확장해 왔다. 그 결과 웹툰은 만화에 비해 훨씬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매체가 되었으며, 이 때문에 (하는 일이 대체로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웹툰 작가가 가지는 문화적 영향력은 만화가의 그것보다 훨씬 크다고 할 수 있다.
침착맨, 그러니까 이말년은 이러한 인플루언서로서의 웹툰 작가를 대표하는 얼굴 중 하나다. '침착맨'은 웹툰 작가 이말년(본명 이병건)이 개인 인터넷 방송을 할 때 사용하는 닉네임이다(이하 명칭은 침착맨으로 통일한다). 그가 개인 방송을 시작한 연도가 2014년이었음을 생각하면 2018년 마미손(매드클라운)과 유산슬(유재석) 등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유행한 '부캐' 트렌드를 꽤 일찍 선취했던 셈이다. 또한 그가 초기 크루로 출연하기도 했던 [마이 리틀 텔레비전]을 기점으로 개인 인터넷 방송의 감성이나 문법이 TV에 역수입되는 일이 잦아졌는데, 이처럼 침착맨이 서 있는 곳은 그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어떤 트렌드의 시작점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는 최신 유행이나 새로운 삶의 방식을 기민하게 받아들이는 소위 '힙스터'와는 거리가 멀다. 일상 속의 다양한 체험을 콘텐츠로 만들어내는 채널의 특성상 최신 유행 음식이나 영화, 게임을 즐기는 영상들이 꽤 지분을 차지하긴 한다. 그러나 영상들을 조금만 살펴보면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삼국지와 고전게임에 진심인 아저씨라는 사실이다. 당연히 두 분야의 교집합인 삼국지 소재 게임은 침착맨의 가장 중요한 본진이다. 팬들 사이에서는 "침착맨 영상 입문은 [삼국지 영걸전] 정주행부터"라는 말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회자된다.
삼국지는 물론 유명한 고전이며, 이를 소재로 한 게임들에는 두터운 매니아층이 존재한다. 그러나 80만 명이 구독할 정도로 대중적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당연히 침착맨의 구독자 중 삼국지의 팬은 일부에 불과하며, 훨씬 많은 구독자들은 그냥 침착맨이 말하는 게 재밌어서 그의 영상을 본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침착맨 삼국지다. "삼국지 하나도 모르고, 솔직히 말하면 알고 싶지도 않고, 근데 진짜 딱 하나 이유, 침착맨 방송 볼 때 조금 더 재밌게 보고 싶은 분들"을 위해 준비했다는 이 삼국지 속성 강의는 2021년 초 기준 통합본까지 합쳐 약 천만 뷰 이상을 기록했다.
'필수 교양'으로서의 지위도 예전같지 않고, 오히려 "관우 아세요" 같은 밈에서 알 수 있듯 여성들에게는 딱히 고운 시선으로 보이지 않는 이 옛날 소설의 줄거리 요약 영상이 히트를 친 비결은 단순하게도, 그냥 재미있기 때문이다. 한 날 한 시에 죽기로 한 맹세인 도원결의를 "한 명이 죽으면 따라 죽어야 하는 저주"로, 유비와 제갈량의 절친한 관계를 묘사하는 말인 수어지교를 "합체오줌"으로, 조조의 서주 대학살은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 벌인 일이므로 "서주 대효도"라고 표현하는 센스는 가끔 선을 넘는 것 같아 보이면서도, 사실은 현대인의 상식에 맞는 것이거나 그럴듯한 논리를 깔고 있는 것들이라 묘한 설득력이 있다.
일단 실소가 나오고, 곱씹어보면 틀린 말은 아니어서 중독적인 궤변들. 이 웃음의 구조는 그가 웹툰 작가 이말년일 때 선도했던 코드인 '병맛'과도 통하는 바가 있다. '병신 같은 맛'의 약자인 이 말은 인터넷 만화의 한 장르로 시작했다. 조악한 퀄리티, 빈약하거나 없다시피 한 개연성, 해결되지 않은 갈등을 방치한 채 결말로 직행하는 서사 구조 등을 특징으로 하는 병맛은 논문까지 나올 정도로 활발한 논의의 대상이었고, 만화 장르를 넘어 특정한 상황이나 정서를 가리키는 말로까지 확장되었다. '엽기', '잉여' 같은 많은 인터넷 밈들이 빠르게 생명주기를 다하고 사어가 되어버리는 가운데, '병맛'은 가까스로 살아남아 일상어의 지위를 차지했다.
병맛이 개그로서 유효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헛소리인 듯하면서도 일말의 진리가 들어가 있어야 하고, 둘째로는 말하는 사람의 태도가 뻔뻔해야 한다. 즉 본인이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해선 안 된다. 침착맨은 이제 더 이상 만화를 그리지 않지만, 그가 방송을 통해 꾸준히 생산 중인 병맛은 두 조건을 모두 만족시킨다. 무엇보다도 두 번째 조건과 관련해 그의 얼굴이 큰 역할을 한다. 수염이 잘 어울리는 준수한 외모로 능청스럽게 아무말 대잔치를 하는 중년의 전직 웹툰 작가. 이 흔치 않은 캐릭터의 존재 자체가 어찌 보면 일종의 부조리극이자 병맛처럼 보인다.
침착맨은 한 영상에서 자신이 군 복무 시절 집단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병사였다고 술회한다. 또한 직장생활을 거치지 않고 웹툰 작가로 바로 데뷔해 성공했고, 그 뒤로 결혼과 득녀, 인터넷 방송인으로의 연착륙까지 무난하게 해내는 등 크나큰 실패 없이 잘 풀린 인생이었다고 자평하기도 한다. 이러한 인생 궤적과 얼마큼의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침착맨은 확실히 비슷한 나이 대의 남성들이 남성 집단을 거치며 으레 형성하게 되는 마초적인 사회성이 다소 옅다는 느낌을 준다. 그가 보여주는 언행은 어딘지 천진하지만 천박하지는 않고, 종종 보이는 위악과 무례함도 유독하지는 않다(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러나 침착맨의 방송 형식이 트위치에서 진행되는 온라인 라이브라는 점, 그리고 채팅에 참여하는 시청자 대부분이 20대 남성이라는 동질 집단이라는 점은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불편한 순간을 만들어낸다. 이를테면 동료 작가 주호민과 함께 쓸데없고 무의미한 주제로 논쟁하는 인기 콘텐츠 '침펄토론'의 한 장면을 보자. [사자 vs 호랑이 백수의 왕은?] 편에서 사자 편을 든 침착맨이 "사자에게는 호랑이에게 없는 멋진 갈기가 있다"고 말하자, 이에 호랑이 편을 든 주호민은 "그 멋진 갈기가 왜 암컷에게는 없냐"고 반문한다. 사자는 외양 자체가 성차별적이라는 공격이다. 그 순간 화면 우측의 채팅 스트림에는 성별이라는 이슈에 반응해 거의 반사적인 리액션이 도배된다. "그 이슈", "PC(정치적 올바름) 당했다", "사자는 여혐동물", "기울어진 사바나", "이건 사자가 졌다", "해명해", "쿵쾅" 등등.
이 장면에서 페미니즘이 맥락 없이 조롱의 대상으로 호출된 상황을 두 사람이 직접적으로 의도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두 사람은 그저 유치한 주제로 '병맛' 토론을 하다가 사자의 성별 얘기까지 나온 것뿐이다. 심지어 저 난리법석의 방아쇠가 된 주호민의 발언마저도 (채팅에 영향을 줄 것임을 어느 정도 예상은 했겠지만) 악의는 없었던 것으로 봐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세상에 벌어지는 나쁜 일 중 초점이 딱 맞는 나쁜 의도에 의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예측 가능한 시청자, 예측 가능한 주제의 조합으로 뻔한 결과가 나왔다면, 직접 코멘트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상황에 대해 아예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온라인 라이브 방송 같은 쌍방향 소통은 그 특성상 무언가를 말하지 않으면서도 말한 것과 같은 효과를 자주 만들어낸다. 매사에 진지하지 않고 천진하며 허술해 보이는 침착맨의 평소 태도는 이와 관련해 더욱 문제적일 수 있다. 그의 모든 언행이 어떠한 정치적 의도 없이 재미와 즐거움을 위한 것일 뿐이라는 알리바이가 깔리기 때문이다. 그 앞에서 행해지는 일체의 문제제기는 모두 '과몰입'과 '뇌절(적당한 선에서 그치지 않고 눈치 없이 무언가를 계속 하는 것)'로 치부된다. 더욱이 그가 앞서 말했듯 '국민 포털'의 인기 웹툰 작가이자 공중파 방송에도 종종 출연하는 인플루언서라는 점은, 이 채팅창의 분위기가 대중적이고 상식적인 것이라는 신호로 해석될 여지를 준다는 점에서 우려스럽기도 하다.
방송에 자주 출연하는 침착맨의 딸 쏘영(소영) 역시 시청을 주저하게 만든다. 그 어떤 합리화를 한다고 해도 아동이 미디어에 자주 노출되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그런데 한국에는 육아 예능을 필두로 이미 너무 많은 잘못된 선례가 만들어졌고, 아동의 미디어 노출이 문제로 인식되고 공론장에 나올 수 있는 타이밍이 이미 지나가버렸다. 랜선 삼촌, 랜선 이모라는 이름으로 소영의 팬을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소영의 방송 출연은 그저 귀엽고 흐뭇한 광경이며, 방송 콘텐츠도 다양화하고 부녀가 추억도 쌓을 수 있는 "좋은 게 좋은" 일일 뿐이다. 그런 '훈훈함' 앞에서 소영이 보호받아야 할 미성년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은 "애를 두고 이상한 생각을 하는 네가 오히려 이상한 것"이라는 식의 단세포적인 반발만 일으킨다.
그러나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소영이 출연한 영상에선 너무나 자주 아찔한 광경들이 벌어진다. 소영이 출연할 때 분명 시청자들의 채팅에는 '자정작용'이 일어나긴 한다. 그러나 사실은 누구도 실시간 방송의 채팅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 채팅 참여자 중 누구라도 '선'을 넘을 수 있으며, 소영도 아버지와 함께 모니터 앞에 있는 이상 그런 채팅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ㅗㅜㅑ"이다. "오우야"라는 감탄사의 모음만 취해서 만들어진 이 유행어는 주로 여성이 신체 노출 등으로 성적 매력을 어필하는 장면에서 사용되며, 당연하게도 남초 집단 안에서 쓰이는 일종의 '섹드립'이다. 그리고 인터넷에는 온갖 것들을 성적인 맥락과 연결시키는 강박증 환자가 가득한데, 이를테면 [쏘영이와 함께 포켓몬 합성 이상형 월드컵]에서는 치마 차림의 여성을 연상시키는 디자인을 한 포켓몬 '가디안'이 화면에 잡히자마자 "ㅗㅜㅑ"가 나온다. '밈적 사고'에 절여져서는,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도무지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침착맨 팬카페의 팬아트 게시판에서는 침착맨과 그 주변 인물들을 영화 포스터에 합성한 패러디 자료들이 올라왔는데, 한 팬은 침착맨의 얼굴을 아이언맨의 몸에, 소영의 얼굴을 블랙 위도우의 몸에 합성해 올렸다. 알다시피 블랙 위도우는 스칼렛 요한슨이 분한 성인 여성 캐릭터이며, [어벤저스] 포스터에서는 섹스어필을 위해 몸매가 드러나는 전신 슈트를 입고 가슴골을 드러내고 있다. 이쯤 되면 해당 합성 게시물을 올린 사람은 본인이 무슨 일을 한 건지 인지는 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침착맨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지금 한국을 관통하고 있는 대중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그의 '침소리'는 분명히 유쾌하고 재미있지만, 가끔은 불편하거나 기괴한 부분들이 있으며 그것이 그의 영상을 보는 일을 일종의 길티 플레저로 만든다. 그리고 빌어먹게도 세상의 너무 많은 재미있는 것들이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죄책감을 준다. 앞으로도 콘텐츠들은 계속 쏟아질 것이고, 우리는 평생 이 고민과 함께 해야 할 운명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