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포르모사]
파라과이와 아르헨티나 국경 근처에 위치한 작은 마을 포르모사. 살타로 가기 위해서는 꼭 지나야 하는 도시라서 행여나 뭐가 있을까 싶어 검색해봤더니, 다들 지나치기만 하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마을이었다. 심지어 남미 친구들도 포르모사엔 대체 왜 가냐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묻곤 했다. 파라과이 친구들은 그런 재미없는 곳 가지 말고 아순시온에 좀 더 머무르라고 간곡히 설득하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르모사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기로 결심한 계기는 다름 아닌 카우치서핑. 이곳엔 호스트가 딱 한 명 있었는데, 그의 프로필이 너무나도 정성스레 작성되어 있었던 데다가 이 작은 마을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꼭 보여주겠다고 적힌 말이 와 닿아서, 다른 요란한 관광지보다는 이곳에서 진짜 아르헨티나의 크리스마스를 겪어보고 싶었다. 사실 서양에서의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보낸다는 의미가 크기 때문에 굳이 유명한 곳에 간다 한들 대부분의 볼거리가 닫혀 있을 터였다. 그렇게 나는 포르모사의 유일한 호스트, 로베르토에게 성심껏 요청 메시지를 보냈고, 이내 그의 집으로 향하게 되었다.
로베르토의 집은 내가 상상하던 여느 남미 가족의 모습 그대로였다. 형, 남동생, 여동생, 어머니, 그리고 강아지까지 오순도순 모여사는 아담한 그 집에서 우리는 이웃 친구들까지 불러 모으고 커다란 테이블에 둘러앉아 다 같이 점심식사를 했다. 구조한 강아지와 함께 오토바이로 남미 일주를 하고 있다는 에콰도르인 앙헬도 카우치서핑을 통해 알게 됐다며 합석했다. 로베르토의 어머니는 그 많은 인원에도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푸짐한 식사를 준비해 주셨다. 우리나라 시골 인심 쓰듯이.
그 후 뒤뜰에 앉아 수다를 떠는데, 다들 자꾸만 나더러 낮잠을 좀 자라는 게 아닌가. 얘기를 더 듣고 싶은데 왜 그렇게 자라고만 하는지 어리둥절했는데, 사실 이건 굉장히 진실된 충고였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으니. 이들의 크리스마스 파티는 밤 열두 시 땡 치면 바로 시작해서 이튿날 아침, 아니 어쩌면 오후까지도 계속된다. 밤샐 체력을 보충해두기 위해서 이브날 오후엔 미리 잠을 자두는 경우가 허다한데, 나도 두어 시간 잠을 청하긴 했으나 나중에야 턱없이 부족했다는 걸 실감했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로베르토네 가족은 분주해졌다. 우린 크리스마스트리가 반짝이는 앞마당에 넓은 테이블을 설치하고 온갖 음식과 술을 나르느라 한동안 바빴다. 준비를 마친 뒤, 샴페인을 따르고는 12월 25일 00시에 맞추어 건배를 외치곤 서로를 얼싸안았다. 뒤이어 길거리 곳곳에선 폭죽이 터져 올랐다. 우리도 뒤질세라 폭죽을 쏘아 올리곤, 로베르토가 준비한 무려 풍등까지 불을 붙였다. 물론 어설픈 초보자들인지라 풍등은 실패했지만….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로베르토의 어머니는 흐뭇한 표정으로 대문 앞에 서서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아이들에게 밤새도록 잘 놀고 오라는, 우리 집이었으면 상상도 못 할 만한 그런 배웅이었다. 로베르토와 형 사무엘, 남동생 엠마누엘, 여동생 베로니카, 그리고 동네 친구들인 파비앙과 호레이쇼는 커다란 아이스박스에 비장한 표정으로 맥주를 잔뜩 담은 후, 택시를 나눠 잡고 어떤 클럽으로 향했다.
그날 밤은, 나에겐 기묘하기 짝이 없는 크리스마스였다. 고요하고 작은 동네의 으슥한 어딘가에 자리한 낡은 빌딩에 들어서자 옥상에서 번쩍번쩍한 조명과 함께 파티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한 구석에 아이스박스를 내려놓고 의식이라도 치르듯 그걸 빙 둘러싼 채 춤을 추었다. 아이스박스에서는 화수분처럼 끊임없이 맥주가 나왔다. 한 병 한 병 마실 때마다 아이스박스 옆엔 쓰레기가 가득 쌓여갔다. 클럽 전체가 사람들로 북적북적한 가운데, 새벽 한 시경부터 동이 틀 때까지 춤은 계속되었다. 분명 해가 완전히 떴는데도 클럽은 사람이 빠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쯤 되니 난 반 좀비가 되어 꾸벅꾸벅 졸면서 기계처럼 춤을 추다가, 왜 이들이 미리 낮잠을 자두라고 그렇게 채근했는지 새삼 깨달았다. 너무 피곤하니 곧 집에 가는 게 좋겠다고 넌지시 말을 꺼내봐도 그들은 그저 웃으며 끝없는 에너지를 분출하기에 바빴다. 로베르토는 화장이 다 녹아내려가는 날 붙들고 한국에서 온 여행자라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소개해 주기까지 했다.
“너희는 대체 언제쯤 지쳐?”
내가 혀를 내두르며 묻자 그는 사람 좋게 껄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무슨 소리야! 우린 밤새 논 다음에 해장 개념으로 애프터 파티에 또 가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