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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예 Dec 08. 2021

남미에서 생긴 일 14. 영어도 스페인어도 불가능할 때

[페루, 마추픽추]

비니쿤카 픽업의 악몽은 마추픽추 투어에서도 그대로 되풀이됐다. 이른 새벽의 기약 없는 픽업부터 친구 혹은 연인과 함께 온 남미 사람들만 가득 찬 밴까지. 나의 희망 캐시와 마우리는 보이지 않았고,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창문에 기대어 꿈나라 여행을 떠났다.


최종 목적지는 마추픽추 마을이라고 불리는 아구아스 깔리엔떼스


얼마나 갔을까, 밴이 잠시 휴게소에 멈추었고 꽤나 긴 휴게시간에 사람들은 우르르 내려서 화장실과 매점으로 향했다. 왠지 차에 남아 있으면 안 되는 분위기라는 것을 직감한 나는 넓고 예쁘게 자리한 매점의 뒤뜰로 가서 어슬렁거렸고, 이윽고 풀밭에 홀로 앉아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고 있는 남자에게 시선이 닿았다. 같은 밴에 타고 있었던, 유일하게 혼자 온 것 같은 느낌이 풍기던 여행객이었다. 그는 멀리서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나를 마주 보고 씩 웃더니 바나나 한 개를 대뜸 내밀었다. 내게 주는 거냐고 손짓하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나 역시 반가이 받아 들고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혹시 영어… 할 줄 알아?” 


나의 소심한 질문에 그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망했다……’ 


하지만 이 당시 나는 몰랐다. 그가 영어를 못한다는 사실이 이후 얼마나 재미있는 추억으로 돌아올지. 나는 짧은 스페인어로 소통을 시도했고, 그는 콜롬비아에서 온 데이빗이라고 스스로 소개했다. 이후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밴에 다시 올랐다. 출발 직전, 다른 밴을 타고 도착한 캐시와 마우리에게 반갑게 인사하며 저녁에 다시 보기로 약속하고는. 


밴은 조금 더 달려 이드로일렉트리카라는 마을에 우릴 내려주었다. 점심을 먹은 후, 마추픽추 바로 아래에 위치한 마을 아구아스 깔리엔떼스까지 3시간 걸어가는 일정이 시작되었다. 같은 밴에 탔던 사람들은 각자 일행끼리 알아서 걷기 시작했고, 딱히 투어 인솔자도 따로 없는 마당에 혼란스러웠던 나는 어쩌다 보니 데이빗을 따라가게 되면서 너무 자연스럽게 우리 둘은 함께하게 되었다. 하필이면 걷기 시작하자마자 비가 쏟아져서 비옷까지 뒤집어쓰고 시작된 기나긴 행군. 마치 예전에 했던 박카스 국토대장정과 흡사한데, 주구장창 한 명의 짝꿍이랑만 쭉 걷는 느낌이었다. 


데이빗과의 첫 만남. 비 때문에 가방을 비옷 속에 넣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영어를 못하는 데이빗과 스페인어를 못하는 나. 이 둘이서 3시간을 걸으며 대체 무슨 대화를 할 수 있었을까? 놀랍게도 정답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는 것. 


아주 기본적인 어휘, 손짓 발짓, 오프라인 번역기, 그리고 참을성까지 한 스푼 더해지면 전달하기 어려운 말은 전혀 없었다. 물론 연극배우가 된 것만 같은 기분으로 표현력을 영혼까지 끌어올려야 했지만. 우리는 가족관계, 반려동물, 좋아하는 노래, 여행, 연애 얘기까지 쉴 새 없이 대화를 나누며 심심할 틈 없이 마을까지 걸어갔다. 이따금씩 쌩하니 지나가는 비싼 마추픽추행 페루 레일 기차를 원망스레 쳐다보기도 하면서. 그렇게 아구아스 깔리엔떼스에 도착했을 때, 우린 이미 전우애를 나눈 듯 친해진 사이였다. 


정말이지 야속하게도 지나가버리는 페루 레일 기차. 나는 이것을 '자본주의 기차'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 기차가 보이면 잘만 걷고 있다가도 순식간에 허탈해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아구아스 깔리엔떼스는 작지만 전통이 깃든, 멋들어진 마을이었다. 해가 지면서 조명이 예쁘게 켜진 광장에 가보니 이미 우리처럼 막 도착한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여기선 가이드가 이름을 호명하면 그를 따라 배정받은 숙소로 이동하는, 상당히 비효율적인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는데, 내 이름이 도통 불리지 않자 데이빗은 한동안 여기저기 붙잡고 대신 물어봐주다가 기어이 내 담당자를 찾아냈다. 우리 둘 다 인터넷도 로컬 번호도 없는 탓에 아쉽게 작별인사를 했고, 나는 가이드를 따라 저녁 장소로 이동했다. 새로운 그룹에 끼어 식사를 하는데, 역시 남미 사람들만 우글거리는 그룹이었으나 이번엔 다행히도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몇 있었으니, 바로 아르헨티나에서 온 에제퀴엘과 콜롬비아에서 온 세르히오. 


아구아스 깔리엔떼스에 도착해서


가이드는 다음날 마추픽추 일정을 설명해주면서 추가 비용을 내고 버스로 정상까지 이동하거나 새벽 일찍 걸어 올라가는 방법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이 날 온종일 걷느라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었던 나는 그냥 12달러 내고 버스를 타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는데, 


“와, 이렇게 비싼데 버스를 어떻게 타? 당연히 우린 다 같이 걸어 올라갈 거지?” 


라는 세르히오의 말에 조용히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강제로 마추픽추 등반에 참여하게 된 나는 이들과 입구에서 만나 같이 올라가기로 약속한 후, 식당을 나섰다. 


미리 캐시와 마우리 커플과 맥주 약속을 잡아뒀기 때문에 그들을 만나러 향하는 중이었다. 경사진 골목을 따라 내려가는데 계단 맨 아래쪽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세상 환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드는 그는 다름 아닌 데이빗.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지만 이런 우연이 있나! 그와 반갑게 얼싸안으며 인사를 나누고는 술자리에 함께할 것을 제안했고, 곧 캐시, 마우리, 그리고 그들의 칠레 친구 두 명까지 합류해 여섯 명이서 즐거운 밤을 보냈다. 


콜롬비아, 칠레, 한국의 조합


데이빗과의 우연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자리가 파하고 숙소로 향하는데 알고 보니 데이빗 역시 같은 곳에서 묵게 되었던 것. 우리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함께 걸어갔고, 다음날 마추픽추 등반 역시 같이하기 위해 새벽 4시에 만나기로 약속하고 잠들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아 캄캄한 새벽, 데이빗과 나는 마추픽추 입구를 향해 나섰다. 우습게도 에제퀴엘과 아르헨티나 친구들이 숙취에 제대로 뻗어버린 바람에 제시간에 나오지 못했고, 나는 데이빗과 단둘이 마추픽추를 오르게 되었다.


만나서 가기로 한 약속 장소. 늦지 않기 위해 새벽 일찍 일어나서 갔지만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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