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불변의 진리는 존재하는가?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

by 하나의 세계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시대의 지식인으로 불리던 움베르트 에코의 중세 역사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그의 기호학 철학을 집대성한 소설 『장미의 이름』을 가장 잘 나타내는 문장은 바로 위의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왜인지는 아래서 다시 한 번 서술하도록 하겠다.​


1. 추리소설로 읽는 『장미의 이름』, 대략적인 줄거리

소설 속 주요 인물은 윌리엄 수도사와 그 제자 아드소라는 인물이다. 두 인물은 셜록홈즈와 왓슨을 오마주한 인물로 보이는데, 셜록홈즈와 같이 윌리엄 수도사는 주변환경과 사람들에 대한 뛰어난 관찰력과 통찰력을 자랑하는 인물이며 아드소는 왓슨과 같이 윌리엄 수도사를 도와주며 때로는 의도치 않게 주요단서를 제공하기도 한다. 뛰어난 통찰력을 지닌 윌리엄 수도사는 때로는 이를 은근히 과시하고 싶어하기도 하고, 아드소의 우둔함을 개탄해하기도 하는데 이런 관계성도 셜록홈즈와 왓슨의 관계성과 유사해 셜록홈즈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윌리엄 수도사와 그 제자 아드소는 모종의 임무를 가지고 한 수도원에 입성하게 되는데, 해당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 차례로 죽음을 맞이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수도원장은 윌리엄 수도사에게 사건의 조사를 부탁하게 된다. 윌리엄 수도사는 사건을 조사하며 수도원의 장서관을 둘러싼 비밀에 맞닥뜨리게 된다는 것이 이 소설의 주된 줄거리이다.

기본적으로 추리소설의 형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소설의 내용적인 측면을 따라가기엔 크게 어렵지 않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추리소설로 읽기에는 아까운 책임에 틀림없다.

2. 중세 역사소설로써의 『장미의 이름』, 역사적 배경

가장 우선적으로는 추리소설의 형식을 띄고 있지만, 이 책은 역사소설로 읽어도 무방할 정도로 중세 역사에 대한 에코의 방대한 지식을 엿볼 수 있다. 소설의 배경은 중세 아비뇽 유수 시기, 그 중에서도 교황 요한22세의 시기를 다루고 있다. 아비뇽 유수는 본래 로마에 있던 교황청을 로마에서 프랑스로 옮긴 사건으로, 교황권이 크게 약화되었음을 시사하는 역사적 사건이다. 소설 이후의 이야기지만, 요한 22세 이후로도 5명의 교황이 더 선출되서 아비뇽 시기가 지속되다가 결국 그레고리오 11세가 아비뇽에서 다시 로마로 복귀하며 아비뇽 시기는 막을 내린다. 하지만 그 후 교회 대분열이 시작되고 중세 질서과 붕괴되며 이후 그 흐름은 인간의 시대를 상징하는 르네상스 시대로 이어지게 된다. 즉, 아비뇽 유수 시기는 신의 대리인이라고 불리던 교황의 권위가 추락하기 시작하며 기존의 신 중심의 중세 세계관이 흔들리기 시작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관례적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교황의 승인을 받아 정통성을 완성했으나, 당시 황제 루트비히 4세는 작센하우젠 선언을 통해 교황의 승인 없이도 황제 작위가 유효하다고 주장하며, 자신을 파문한 교황 요한 22세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대립 교황을 옹립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교황권과 황제권이 대립하며 유럽 전역의 교회들이 분열하기 시작한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소설 속에서도 교황권을 옹호하는 베네딕트 수도회와 황제와 입장을 같이하는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등장해 첨예하게 대립하는데,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무척 생생하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3. 신학논쟁을 통해 읽는 종교소설로써의 『장미의 이름』

세 번째로 이 소설을 종교소설의 관점에서 읽어도 아주 흥미롭다. 소설은 베네딕트 수도회와 프란체스코파 수도회의 대립과 다양한 신학논쟁을 다루고 있는데, 논쟁의 가장 쟁점으로 여겨지는 것은 ‘청빈논쟁’이다. 당시 교황 요한22세 시대는 성직매매가 횡행하고 연옥 면죄부 발행이 늘어나면서 교황청 재정이 불어나던 시대였다. 베네딕트 수도회는 이러한 물질적인 풍요와 소유는 신의 축복이라 주장했다.

소설 속 베네딕트 수도회를 대표하는 수도회 원장은 이렇게 말한다.

물질을 통한 신의 현현, 이것이야말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인도하게 하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이지요

하지만, 프란체스코 학파는 페루자 총회에서 예수님께서 ‘청빈’한 삶을 사셨기 때문에 성직자도 청빈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교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교황청의 재정을 늘리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던 교황 요한22세는 프란체스코 학파의 이러한 주장에 위협을 느끼며 그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청빈을 주장하는 수도사들의 사상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실제로 중세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단으로 몰려 화형대의 불꽃 속에서 한더미의 재로 변해갔던 시대이다. 윌리엄 수도사는 한 때 이단 심판의 조사관으로 역임했다. 하지만 무고한 사람들이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하는 걸 지켜보며, 이단과 정교의 차이를 구분할 수 없게 되버린 그는 조사관 노릇을 그만두고 만다.

실제로 소설 속에 이단재판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해당 장면은 부조리로 가득차있다. 이미 이단으로 낙인찍어둔 상태에서 심판관은 피심판자가 어떤 논리를 전개해도 이단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예를 들어 이런 언행을 하면 이단인데, 일부러 그런 언행을 피하려고 하는 걸 보니 이단이라는 식이다.

이러한 신학논쟁과 다양한 종교 학파의 대립을 통해, 표면적으로는 종교인이 청빈한 삶을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보편적 불변의 진리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독자를 끌고 간다.

4. 기호학점 관점에서 읽어낸 『장미의 이름』

마지막으로, 이 소설을 에코의 기호학 철학 측면에서 바라보면 또다른 매력을 찾을 수 있다. 에코의 기호학 철학의 핵심은 “의미는 고정되지 않고 끝없이 미끄러진다”는 것이다. 그 의미는 텍스트의 해석에 고정된 하나의 정답은 없으며, 텍스트를 읽는 주체에 따라서 무한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다시 첫 문장으로 돌아가보자. 이 문장은 무엇을 의미할까?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는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What’s in a name? That which we call a rose by any other name would smell as sweet
이름이 뭐 그리 중요하죠? 장미는 다른 이름으로 불려도 향기로울 거예요

장미는 실체라기보다는 장미라는 관념에 대한 우리의 형상이다. 즉, 우리가 장미라는 실체를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 이미지로 기호화된 형상, 즉 기호의 기호이다. 내가 지각하는 장미와 타인이 지각하는 장미가 정확하게 동일할 수 없다. 더 나아가 개미가 지각하는 장미와 인간이 지각하는 장미는 전혀 동일한 형상일 수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장미라는 형상은 인간의 감각기관을 통해 형성된 기호의 기호인 것이다. 그리고 ‘장미’라는 이름은 형상에 대한 기호, 즉 기호의 기호의 기호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장미’라고 이름붙인 꽃은 전세계 다양한 곳에서 장미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장미를 우리가 오늘부터 ‘마마리야’라고 부르기로 시작한다고 해서 장미라는 형상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즉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실체를 기호화한 형상을 한번 더 기호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름은 덧없다. 우리가 미국에 가서 ‘장미’라고 말한다해도, 미국사람들은 우리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없다. 장미라는 형상에 대한 무한한 이름과 무한한 텍스트가 존재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그 모든 이름과 텍스트는 덧없다.

플라톤에 의하면, 관념적 실체는 절대적 진리라는 이데아의 세계에 존재하고, 우리가 지각하는 세상은 이데아의 모사일 뿐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가 감각하는 형상은 관념(이데아)이 기호일뿐, 우리가 진리에 닿기 위해서는 이 감각을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에코는 여기서 한번 더 나아가서 지난날의 장미는 이미 사라졌다고 말하며 이데아의 세계에 도달할 가능성을 닫아버린다.



5. 절대불변의 진리는 존재하는가?

Hunc mundum tipice labryinthus denotat ille. Intranti largus, redeunti sed nimis artus
이 미궁은 이 세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 들어가는 자에게는 넓지만 나오려는 자에게는 한없이 좁답니다.


이 소설속 장소적 배경인 수도원에는 아무나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장서관이 있다. 이 장서관은 방대한 지식을 모아둔 지식의 보고지만, 사서 외에는 출입이 엄금되어있으며 내부는 미로처럼 얽혀있어 미궁에 비유된다. 이는 모든 지식의 총체인 이 세상 자체를 의미한다.

왜 들어가는 자에게는 넓지만 나오려는 자에게는 좁을까? 세상의 지식을 모아둔 장서관처럼 이 세계는 무한한 해석과 수많은 진리로 가득찬 곳이지만, 일단 하나의 진리에 사로잡혀 한가지 관점과 한가지 해석으로만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다면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종합해보면, 이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는 절대불변의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윌리엄 수도사는 보편적 불변의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이렇게 말한다.

​​

아드소, 선지자를 두렵게 여겨라.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의 할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비웃게 하고, 진리로 하여금 웃게 하는 것일 듯하구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좆아야 할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겠느냐?

그러자 아드소는 스승에게 묻는다.

그렇다면 하느님과, 태초의 혼돈 사이에 무엇이 다릅니까? 하느님의 절대적 전능성과 그 선택의 절대적 자유를 긍정하는 것은 곧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과 같지 않을는지요?

이는 윌리엄 수도사가 일전에 자문했던 질문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개인의 인식이 유일선이라면, 과학은 어떻게 해야 보편 법칙을 재구성하고, 이를 해석함으로써 이 불가사의한 학문에다 기능을 부여할 수 있겠느냐?


하지만 윌리엄 수도사는 아드소의 마지막 질문에 답하지 못하고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보편적인 불편의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리면, 불변의 진리란 존재하지 않으니 하나의 진리에 예속되지 않아야 한다는 진리 역시 진리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 인간이 결국 이데아에 닿을 수 없음을 전제하고, 우리의 감각적 인식의 보편성을 부정한다면 학문의 기능은 어디에 존재한다는 말인가?

사실 불변의 진리에 대한 믿음 위에 세워진 중세시대는 비록 사상의 자유가 탄압당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단으로 몰렸지만, 진리에 대한 확실성으로 질서가 존재하던 시대였다. 하지만 불변의 진리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지금, 우리의 시대는 과연 아름다운가? 진리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인해 무질서와 혼돈으로 고통받고 있지는 않은가?

아드소의 마지막 질문은, 불변의 진리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에코가 던지는 질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해석마저도 나의 생각일뿐, 움베르트 에코의 말처럼 소설이란 수많은 해석을 창조해야 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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