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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꼬마 Mar 17. 2024

32. 어려운 보호자 대응법.

유형별로 알려드립니다.

응급실에서 일합니다. 그리고 소아만 봅니다.라는 말을 연이어하면, 다들 공통적으로 하는 질문들이 있다.


"진상들 많지 않아요? 괜찮으세요?"


이제 어느 정도 짬이 차서 한층 유해진 표정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라고 농 반 진 반으로 넘기곤 하는데, 소위 말하는 '진상'들의 유형이 사실은 제각각이다. 대부분은 내 선에서 어느 정도는 대처할 수 있는데, 안 되는 사람들은 안 되는 것이라고 조금은 포기하고 마음을 닫아버리는 것이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 다치게 하는 방법이다. 그래도 스타일이 조금씩은 다르더라.


1. 불안형


가장 쉬운 유형이다. 대부분 첫 아이거나, 육아가 서툰 보호자들이 이 유형들이 많다. 잘 몰라서, 모르다 보니 불안하고 질문은 많고, 의사가 하는 설명들의 말만 들어도 무섭다. 감기약에 적혀 있는 각종 부작용에 대해서도 겁이 나서 아니 이런 약 애가 먹어도 되는 것이냐고 겁을 내신다. 귀가 후에 생길 수 있는 상황에 대해서, 이를테면 감기로 진단 후 귀가하며 호흡을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면 오라는 말 같은, 그런 말 한마디에도 그럼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무서워하신다.


이런 분들은 기저에 깔린 불안감을 짚어드려야 한다. 보호자분, 어떤 게 많이 무서우신가요. 아, 호흡곤란이 오면 어떻게 되냐고요? 이 연령대에는 모세기관지염이나 폐렴 가능성을 생각해야 하고, 저희가 다시 진찰하고 호흡기 치료(네뷸라이저)나 수액치료, 산소 투여가 필요하면 입원 가능성도 있어요. 그런 상황이 올 때 집에서 대처를 하기 어려우실 테니 설명드린 것입니다. 지금은 아니니까 집에 가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당신이 무서워하는 부분이 무엇인지를 말해보게 하고, 그걸 짚어드리면 한결 편안하게 따른다. 오히려 조금만 라뽀가 쌓이면 가장 협조적인 보호자가 되기도 해서 이런 타입들은 그렇게 힘들지 않다.


2. 불신형


정말 어렵다.  당신은 어느 과 전문의며, 몇 연차인지, 왜 내가 원하는 분과의 전문의가 아니고 내 특진 교수님이 아닌 당신 따위가 이곳에서 소중한 내 아이를 보는지에 대해서 처음부터 불신을 보이는 보호자들은 처음부터 나의 작은 실수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잡아내겠다고 혈안이 된 경향이 있다. 나는 경련으로 이 병원에서 항경련제를 타서 먹고 있는데, 왜 신경분과 교수님이 응급실에 나의 아이를 보러 바로 오지 않냐, 이런 이야기는 마르고 닳도록 들어왔다. 이런 경우는 나도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아, 응급실에 오는 환자들은 제가 봅니다. 그 교수님은 외래에서 보셔야죠, 하고 짧게 일축하고 환아의 증상에 관련해서 짧게 묻고, 환아의 진찰에 집중한다. 많은 이야기를 서로 오가지 않게 하는 게 그나마 서로에게 좋다. 동의 없는 영상촬영 등을 하시는  분들께는 단호하게 경고를 하고, 녹음을 하시는 분들께는 혹시 녹음하시는 거라면 저한테 말씀은 해달라고 부탁드린다. 그리고 나도 녹음을 같이 하겠다고 녹음기를 함께 켠다. 라뽀는 이미 깨졌다. 최대한 안전 지향으로 진료를 볼 수밖에 없다.


사나 처치를 하게 될 때는 왜 이걸 하는지에 대해서도 설명을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내가 보던 사람이 아니면 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나오면 허탈하고 힘들 때가 많다. 그들의 단골 멘트처럼 ㅇ ㅇ하면 책임지실 거냐,라는 말에 대해서도 모든 상황을 다 예측해 드릴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겠다고 조용히 말씀드리지만 별로 듣지는 않는 느낌이다. 특히 소위 빅 5의 유명한 교수님에게 다니는 환아의 보호자들에게 많이 보이는 행동들인데, 설득이 되지 않으면 그 병원으로 가시도록 안내를 드리는 수밖에 없다. 솔직히 말하면 아이의 손해다. 현재 상황에 대해서는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진료받을 기회를 잃게 되는 것이니까.


3. 햄릿형


진료하다 보면 때로는 보호자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머리를 다쳐서 온 경우에, 환아의 의식 상태가 멀쩡하고 사고 기전이 경미하며 다른 증상이 없을 때는 영상검사 없이 경과관찰을 하는 것이 원칙이다. 반대의 경우에는 당연히 CT 등 영상검사를 해야 하는 것이고. 중간 케이스. 의식은 멀쩡한데, 사고 기전이 크다든지, 아니면 구토를 계속 여러 차례하고 있다든지 할 때는 보호자와 상의를 하고 지켜보거나 영상검사를 하는 식으로 진행하는데, 이럴 때 상당히 결정 내리기를 부담스러워하는 분들이 있다.


어떤 쪽이든 큰 문제는 없다고 말씀드려도 결정을 어려워하시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는 두 가지 전략을 쓴다. 첫 번째, 시간을 드린다. 우리 시간을 갖고 천천히 생각해 볼까요? 제가 다른 아이들 진료하고 있을게요, 고민하시고 간호사선생님 통해서 말씀해 주시면 그대로 따를게요. 확실히 시간을 주면 차분해진다. 아이를 한번 더 살펴보고 다른 보호자와도 의견을 나눈다. 두 번째, 이렇게 해도 안 되는 경우는 내가 그냥 결정해 드린다. 이 때는 환아의 집이 병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지까지 다 고려해야 한다. 애매한 경우에 검사를 하고 집에 보낸다면, CT의 방사선 노출은 감수해야 하지만 현재 뇌출혈은 없음을 확인할 수 있고, 반대의 경우라면 영상검사를 통해 확인하지 않고 괜찮다는 99.1%의 통계에 의존해서 가는 것이기 때문에, 의료기관의 접근성은 반드시 따져야 한다. 어쨌든 한쪽으로 결정을 해 드리면 차라리 편안해하신다.


4. 분노형


화가 많은 분들이 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일단 아이가 아픈 상황 자체가 화가 나시는 건지, 처음 들어오시는 순간부터 화가 나서 의료진에게 공격적인 말과 행동을 보이시는 경우. 지금 몇 번을 말을 시키는 거예요? 빨리 링거나 놓으라니까! 하고 말이 짧은 분들도 왕왕 보인다. 본인이 통제하지 못하는 어떤 상황에 대해서 당황스러운 마음이 투사되는 것은 알겠지만, 당황스러울 정도로 화가 난 사람을 상대하기는 쉽지 않다. 1) 불안형의 흑화형이랄까. 일단은 진정시킬 시간이 필요하다. 최대한 부드러운 말과 표정으로 대한다. 화나서 날뛰는 사람 앞에서 같이 화를 내는 건 자극하는 것밖에 되지 않고, 나는 환자를 진료하고 낫게 하는 것이 목적이니까. 그러셨구나, 네 저희가 아이 상태 정확히 확인하려면 여러 번 확인을 해요. 또 여쭤볼 거예요. 수액은 제가 진찰하고 필요하면 처방할게요. 우리 아이 진료 먼저 좀 볼까요?


대개의 분노형은 이 단계에서 조금 차분해진다. 어쨌거나 자신도 아이의 진료를 보러 왔다는 자각이 있고, 상대가 차분하게 대처하고 있으면 거기다 대고 계속 분노를 이어가기는 쉽지 않다. 아이의 진료를 마치고 진정되시면 슬그머니 사과하시는 분들도 종종 있다. 하지만 끝도 없이 화를 내는 분들이 간혹 있는데  이 때는 솔직히 말씀드리면, 진료 못 본다. 어지럼증으로 119를 타고 온 청소년 환아가 있었고, 어지럼증은 단순히 기력이 없는 것부터 시작해서 이석증과 같은 이비인후과 질환, 소뇌 경색 등의 신경계 질환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하는 증상이기에 항상 주의 깊게 문진하고 진찰해야 하는 대표적인 주소이다. 어떤 식으로 어지러운지, 바닥과 천장이 빙글빙글 섞이듯이 도는지에 대한 물음은 '현훈'과 단순 어지러움의 감별의 첫 질문인데, 질문을 하자마자 아이의 아버지가 화를 냈다. 아 거 닥치고 링거이나 놓지 뭔 말이 그렇게 많냐고. 제일 중요한 질문이라서 그렇다고 하는데도 막무가내로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고 하며 쌍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렇게 의료진에게 위협적인 행동을 하시면 진료가 불가능함을 경고했으나 막무가내. 결국 경찰을 불렀고, 그는 나에게 너 같은 년은 진료거부로 신고한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5. 편의점형


본인들이 원하는 검사나 처치, 약물을 콕 집어서 그것 달라는 말씀만 반복하시는 타입들이 있다. 열나니까 주사 해열제 주세요, 독감검사 하러 왔어요, 다른 것 필요 없고 독감수액 주세요. 엑스레이 싫어요, 초음파만 찍어 주세요. 참 지치는 타입들이다. 일단은 이야기를 들어본다. 예를 들어 다른 곳에서 이미 부정맥으로 시술이 예정되어 있고, 오늘 다시 부정맥이 생긴 경우, 이 경우라면 굳이 혈액검사를 필요로 하지 않고 아데노신 투여 후 진정되면 다니던 곳 외래에서 상담하게 하면 된다. 보호자의 말도 일리가 있다. 그러면 나도 받아들인다. 독감 진단을 이미 오늘  받았고, 오늘 열이 계속 나서 독감 수액을 맞아야겠단다. 다른 검사는 필요 없고 그것만 맞고 가면 된다고 한다. 명절이다. 침상은 이미 없다. 대기 환자들도 많다. 아이가 못 먹고 토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경우는 보호자에게 단호하게 말한다. 독감 수액 원해서 오신 거면 잘못 오셨다고. 응급실은 원하는 처치 원하는 검사 해 드리는 곳 아니고, 급한 처치 해드리는 곳인데 이 아이는 먹는 약으로 충분히 경과 보실 수 있다고 말씀드리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람들에 따라서 싫은 소리 듣기 힘드니까 원하는 대로 일단 먼저 해 드리는 경우도 있는데, 나는 이런 당의정 같은 대처가 수많은 진상을 낳았다고 생각한다. 이해한다. 대학병원과 1,2차 의료기관의 사정은 다르다는 것도, 맘카페의 입소문이 무서운 것도. 그래서 나라도 그들에게 학습 효과를 주고 싶지 않다.


쓰다 보니 참 별별 사람들을 다 겪지만, 사실 빈도상으로 가장 흔한 건 1이라서 그나마 버티는 것 같다. 2 나 4의 유형은 하나만 왔다 가도 참 사람 진 빠지게 하는 편인데, 1이나 3의 유형들은 그래도 잘 달래면 참 잘 따라오는 편이어서 그래, 뭐 불안해서 그랬겠지. 초짜 보호자니까 그랬겠지, 하고 넘어가게 된다. 나도 사람이라, 오래 시달리면 심력이 닳고 보호자들이 협조적이면 나도 더 열심히 진료할 수 있기에 부디 서로 덜 힘들게 지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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