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알려준 오늘
자그마한 사무실 안은 유난히 차다.
에어컨 바람이 계속 몸을 훑고 지나가는데, 이상하게 시원하다기보다 답답했다.
차갑다는 감각보다, 어딘가 더 숨이 막히는 느낌에 가까웠다.
결국 밖으로 나왔다.
주차장에 세워둔 차 안에 앉아 창문을 내렸다.
그제야 바람이 들어왔다.
분명 시원한데, 사무실 안 공기처럼 차갑지는 않았다.
그 안에는 봄의 온기가 아주 조금, 하지만 분명하게 섞여 있었다.
확실히 봄이다.
피부에 먼저 닿는 공기가 다르다.
차갑기만 하던 계절이 조금씩 물러나고,
바람에도 이제는 결이 생긴다.
계절이 바뀐다는 건 어쩌면 이렇게,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몸이 먼저 알아차리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순간, 자연이 내게 가까이 와
살랑이는 공기 안에 봄이 섞여 있다고
가만히 알려주는 듯했다.
그런데 몸은 그 봄을 온전히 반기지 못하고 있다.
꽃가루 때문인지, 오크나무에서 날리는 가루 때문인지,
아니면 감기인지 알 수 없었지만
두통은 묵직하게 머리를 누르고,
숨은 답답했고, 콧물은 멈추지 않았고,
따끔거리는 목사이로 마른기침은 자꾸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왔다.
기분도 컨디션도 좋지 않다.
방탄복과 장비까지 얹힌 몸은 더 무겁게 느껴진다.
평소와 같은 장비인데도,
오늘은 몸 전체가 천근처럼 내려앉는다.
늘 입던 것인데도 오늘은 유난히 더 버겁고,
늘 견디던 무게인데도 오늘은 어딘가 더 아프다.
그 상태로 차 안에 앉아 바람을 맞고 있으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공기에도 여러 얼굴이 있다는 생각이 스쳐간다.
어떤 날은 맑고 깨끗한 공기가 들어온다.
계획한 일이 무리 없이 풀리고,
바라던 일이 조용히 이루어지고,
회사에서는 기다리던 진급 소식이 들려오고,
학교에서는 기대 이상으로 잘 나온 점수를 받아 들고,
사랑을 그리던 이에게는
오래 마음속에 그려두었던 이상형 같은 사람을
예상치 못한 순간 만나게 되는 날도 있다.
별일 없는 하루인데도 마음이 가볍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는 일조차 감사하게 느껴지는 날.
괜히 발걸음이 덜 무겁고,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도 마음이 환해지고,
오늘 하루쯤은 삶이 내 편인 것처럼 느껴지는 날이 있다.
세상이 아주 조금은 다정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지금만큼은 버티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고 있다고
믿게 되는 날이 있다.
하지만 늘 그런 날만 오는 것은 아니다.
어떤 날은 냄새나고 탁한 공기가 들어온다.
일은 자꾸 꼬이고,
사람과의 관계는 작은 말 하나에도 흔들리고,
마음은 이유 없이 무거워진다.
몸은 괜히 축 처지고,
생각지도 못한 지출이 생기고,
잘해보려고 애쓴 끝에 돌아오는 것이
칭찬이 아니라 질타일 때도 있다.
기대했던 결과는 손에 잡히지 않고,
예상 밖의 좋지 않은 일들이 한꺼번에 밀려와
하루 전체를 흐릿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럴 때는 이 답답함이 금방 지나갈 것 같지 않다.
마치 창문을 닫아도
탁한 공기가 방 안에 오래 남아 있듯,
마음속까지 뿌옇게 흐려지는 날이 있다.
숨은 쉬고 있는데도
맑은 공기 대신 답답한 현실만 계속 들이마시는 것 같은 날.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그런 날이 오고,
사람은 바로 그런 날들 앞에서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쉽게 지치고 흔들린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는데,
실은 마음 한구석이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리게 되는 날도 있다.
그리고 어떤 날은,
불에 타는 냄새 같은 매캐한 공기까지
한꺼번에 밀려온다.
예상하지 못한 사고나 연락,
갑자기 끊어져버리는 관계,
준비할 틈도 없이 들이닥치는 현실.
그런 날은 숨 쉬는 것조차 아프다.
공기만 매운 게 아니라
마음속까지 함께 타들어 가는 것 같아서,
평소처럼 말을 하고, 평소처럼 움직이고,
평소처럼 괜찮은 척하는 일조차 버겁다.
멀쩡하던 하루가 순식간에 재가 되어버리는 날.
방금 전까지 당연했던 것들이
한순간에 낯설어지고,
아무 일 없던 일상이
갑자기 손댈 수 없이 멀어져 버리는 날.
사람은 바로 그런 날,
살아 있다는 감각보다
겨우 무너지지 않으려고 버티는 감각을
더 또렷하게 느끼게 된다.
하루를 사는 것이 아니라
겨우 건너는 것 같은 날.
숨 쉬는 일조차 조심스러워지고,
가슴 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상처처럼 느껴지는 날이 있다.
하지만 바람은
그것마저도 끝내 머물게 두지 않는다.
깨끗한 공기도,
냄새나는 탁한 공기도,
폐 깊숙이 스며드는 매캐한 공기도,
결국은 모두 지나간다.
사람은 좋은 날을 붙잡고 싶어 하고,
힘든 날은 빨리 밀어내고 싶어 한다.
조금 더 오래 머물렀으면 하는 순간은 안타깝게 짧고,
제발 끝나기를 바라는 순간은
유난히 길게 느껴진다.
그래서 자꾸 붙잡으려 하고,
자꾸 밀어내려 한다.
하지만 바람은 원래 붙잡히지 않는다.
맑은 공기도 머물지 않고,
탁한 공기도 영원하지 않고,
매캐한 냄새도 끝내 흩어진다.
붙들고 싶다고 머무는 것도 아니고,
밀어낸다고 당장 사라지는 것도 아니지만,
결국 모든 공기는 제 갈 길을 간다.
자연은 늘 같은 방식으로 보여준다.
들어오는 것을 다 막을 수는 없어도,
나가는 것까지 끝까지 붙들고 있을 필요는 없다고.
지금 나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좋은 날도, 나쁜 날도, 슬픈 날도,
결국은 머물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기 위해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늘 말해주고 있었다.
자연은 말없이, 하지만 분명하게
그 사실을 자꾸만 보여준다.
오늘 차 안으로 들어온 봄바람도 그랬다.
몸은 여전히 무겁고,
숨은 여전히 답답했지만,
바람은 아무 말 없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억지로 나를 위로하지도 않았고,
괜찮다고 서둘러 결론짓지도 않았다.
그저 잠깐 와서 닿았다가,
조용히 지나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짧은 바람 하나가 말해주는 것 같았다.
지금의 불편이 전부는 아니라고.
오늘의 컨디션이 삶 전체는 아니라고.
이 답답함이 영원은 아니라고.
몸이 무겁다고 해서 인생 전체가 무너진 것은 아니고,
오늘 숨이 차다고 해서
내일의 공기까지 모두 나빠진 것은 아니라고.
어쩌면 사는 일도 비슷한지 모른다.
좋은 날에는 감사히 숨 쉬고,
탁한 날에는 조금 견디고,
매캐한 날에는 그 하루를 버틴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잘 살아낸 날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겨우 버텨낸 날도
분명 삶의 한가운데에 남는다는 것을
우리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된다.
바람은 지나간다.
늘 그랬듯이.
그래서 오늘은
좋은 것도, 좋지 않은 것도
조금 덜 붙잡아보려 한다.
지나가는 것에 너무 오래 매달리지 않고,
머물지 않을 것을 억지로 붙잡지 않고,
오늘 내게 들어온 공기를
오늘만큼만 받아들이며 살아보려 한다.
창문을 활짝 열어둔 채,
다음 바람을 기다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