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청만 그만두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그 모든 피로와 무게가 다 사라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빠와 분리되어 온화하고 안정적인 성격의 남자와 새 가정을 꾸리면 내 마음도 평온해질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 역시 내 착각이었다.
불안은 외부가 아니라 철저히 내 안에 있었다.
나의 불안은 너무나 현실적이었고,
문제는 내가 나 자신을 잘 몰랐다는 데 있었다.
결혼하고야 알았다.
생활하는 모든 게 '돈'이었다. 심지어 욕실에서 사용하는 휴지 한 칸까지도.
남편은 안정적인 성격만큼이나 안정적인 직장에 다녔지만, 외벌이로 살기에는 신혼 초 받는 월급이 한없이 작고 소중했다. 명품을 구입하는 것도 아니고, 비싼 음식을 사 먹는 것도 아닌데... 모이는 돈은 없고 점점 가난해지는 듯 한 느낌이었다.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탓에 나이차이가 있던 남자들을 주로 만났었고, 대부분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상대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연애때와 더 비교되는 결혼 후의 모습에 큰 스트레스를 받았고, 도망치듯 한 결혼에 '실패' 한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달라붙어서 매일이 미련한 후회의 연속이었다.
연애 때는 단 한 번도 싸우지 않았던 우리가 다투는 횟수가 늘어나며 그렇게 결혼생활은 실패로 끝나나 싶었던 때, 그럼에도 우리가 아직 함께인 이유는... 남편이 내 불안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안아줬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본인의 커리어를 위해 휴학했던 대학원을 다시 등록했다.
공공기관 지방이전으로 지방에 거주했지만, 서울에서 다니던 대학원을 졸업하겠다며 매주 지방과 서울을 오가며 일주일을 쉬지 않고 공부하고 일했다. 그렇게 몇 년동안 석사과정에 이어 박사과정까지 끝마치고, 휴직 한 번 없이 논문까지 써냈다. (한 학기에 500만원에 달하는 등록금은 감사하게도 시댁에서 도와주셨다)
나는 본격적으로 이직을 준비했다. 대학생 때 바로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터라 고졸에 해당했고, 공무원 경력... 그것도 검찰수사관 경력이 어느 공공기관에서 쓸모가 있겠냐마는...
NCS책을 중고로 구입해 공부하고 남편과 면접을 준비했다.
그리고 정말로 운이 좋게도 공무원 때보다 높은 연봉으로 어느 공공기관에 취업했다.
물론, 불안과 강박이 다시 고개를 들었고,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나은 조건, 조금이라도 덜 흔들리는 삶을 찾아 이직하고 또 이직했다.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내 불안을 어떻게든 붙들기 위해 뭐라도 했다 (중간에 응급실에 실려가고 입원을 고민 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남편과 나는 서툴지만, 서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