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대체 뭘까요
나는 언제쯤 나를 예뻐할 수 있을까요? 얼마 전에 스스로가 예뻐서 못 견디겠다는 친구의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생각이 많아진 김에 오늘은 오랜만에 대학교 전공을 살린 내용으로 시작을 한 번 해볼까 봐요. 이렇게라도 종잇장에 날려버린 몇 천 만원 어치의 등록금을 살려내 볼까 하는 심산입니다.
예뻐하다. ‘예쁘다’의 어근인 예ㅃ(예쁘)에 어미 ‘-어’와 보조 용언 ‘-하다’를 붙인 타동사입니다. 이 단어의 원 어근인 ‘예쁘다’는 조선시대에는 ‘어엿브다’라는 단어로 ‘가엾게 여기다, 돌보고 싶다, 보호하고 싶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였으나 현대에는 ‘아름답다’라는 의미로 의미가 변화한 단어죠.
그런데 ‘예뻐해주다’라는 타동사로 바뀌었을 때에는 조선시대에 쓰였던 의미가 많이 섞여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대상을 돌봐주고 싶어하고, 보호해주려 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 같은 거죠. 저는 제 생애에서 그런 마음가짐을 ‘연민’이라고 부르면서 살아오고 있긴 합니다. 불쌍하게 여기는 건 아니구요, 평온을 바라게 되는 마음이랄까요. 상대가 더 나은 삶을 영위했으면 하는 그런 마음입니다만.
저는 사람에게 일정량의 ‘조건 없는 연민’이 누구에게나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게 없으면 몸이 아픈 것처럼 마음이 아프고 공허한 삶을 지속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고장난 마음을 가지고 삶을 이겨내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아요. 저도 마찬가지이구요. 나를 연민해달라고, 가엾게 여겨달라고 떼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근데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하잖아요. 예쁨도 받아본 사람이 잘 받는 것 같습니다.
예쁨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가 어른이 되면요, 떼를 쓰는 것이 먹힌 적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내가 받고 싶은 예쁨을 주길 바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연민을 나눠주는 것이죠. 이게 그냥 이렇게만 들으면 좀 좋은 방향으로 발전한 거 아닌가? 싶으실 텐데요. 만약 그랬다면 제가 이런 글을 쓰지는 않았겠죠 하하.
우선 회신이 오지 않을 때가 대부분입니다. 당연한 일이죠 상대가 달라고 했던 게 아니니까요. 그냥 주는구나 고맙네 하고만 말지 않겠습니까. 저도 그랬을 거에요. 그래서 매번 실망하고 지치기 일쑤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주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았구요. 조건 없이 애정을 준다는 게 도대체 어떤 건지 모르겠습니다. 받아 본 적이 없는 걸 어떻게 주겠어요.
줄 때는 언제나 그냥 내가 마음이 동해서 주는 거야, 어떤 조건이 있는 게 아니야. 라고 되뇌이지만 결국 돌아오지 않는 애정을 볼 때마다 홀로 상처받고 배신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을 느끼는 스스로에게 또 혐오감을 느끼죠. 너무 징그럽잖아요. 달라고 한 적도 없는 걸 줘놓고는 왜 답례를 주지 않냐고 실망하는 꼬라지라니. 그래서 티를 안 내려고 또 무진 애를 씁니다.
근데 또 그래서, 내가 그런 조건 없는 애정을 받았을 때에는 잘 돌려주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마치 우위를 선점한 것 같은 우쭐함에 빠져서는, 상대를 썩 좋게 대해주지 못해요. 얼마나 별로인가요. 누군가가 주는 조건 없는 애정이라는 게 얼마나 귀하고 감사하고 빛나는 것인지 알고 있음에도 그걸 귀하게 대하지 못하는 사람이 스스로라니.
그래서 저는, 가까워지고 애정을 주고받는 관계가 너무 어렵습니다. 그냥 멀찍이에서 내가 뭔가를 적극적으로 해주지 않아도 되는 대상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평온과 안정을 바라는 애정은 쉽게 할 수 있어요. 세계 평화를 바라는 것과 비슷한 마음가짐이잖아요. 저는 세계 같이 그렇게 큰 대상보다는 좀 더 작은 존재들에 관심을 가진다는 점이 다를 뿐이죠. 그런데 나를 자주 인식하고, 나와 교류를 많이 하고 나를 알고 싶어 하는 누군가와 애정을 주고받는 건 너무 혼란스러워요. 내가 준 애정이 애정으로 상대에게 가닿을지도 잘 모르겠구요. 그리고 실제로 내가 준 애정이 온전히 상대만을 위한 애정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애정을 전해주는 스스로에 대한 애정은 아닐지. 만약 그렇다면 그걸 눈치 챈 상대방은 내 애정이 정말 기꺼울 수 있을지.
어쩌면, 내가 조건 없는 애정을 받지 못하고 지나왔다고 생각한 어린 시절에 조건부의 애정을 줬던 상대조차도 스스로는 조건 없이 애정을 주었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스스로의 결핍이 가장 큰 부분이 애정이어서, 안 그래도 습관화 되어 있는 자기 검열이 더욱 강하게 작용되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고결하고 순수한 애정이어야지만, 누군가에게 조심스럽게나마 건넬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 생각해보면, 세상에 그렇게 고결하고 순수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정말 상세하게 뜯어보면 순수 100% 물도 없는 게 세상일텐데 말이에요. 그러니까 결국 저는 이런 쓸데없는 생각에 매몰되어서 애정을 주지도, 받지도 못하는 사람으로 자라버린 거겠죠.
정말 운이 좋아서, 미처 막지 못하고 새어나가 버린 애정을 기꺼이 받아주는 사람들이 다행히도 가끔 주변에 있기는 합니다. 내가 정말 개떡같이 주는 건지 마는 건지도 모르게 주는 마음을, 너무 예쁘게 받아들여서 본인의 정말 소중한 마음을 나에게 돌려주는 사람들이죠. 물론 그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해주는 사람일지는 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들은 저에게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순수하지 않은 애정이어도, 줘도 되는 거 아닐까. 나는 아직 부끄럽다고,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그 애정이 큰 응원이 될 수 있지는 않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애정을 준다면서 강요를 하는 것도 폭력을 가하지도 않을 것이고. 쭈뼛쭈뼛 거리다가 이거 필요하면 가져… 라면서 슬쩍 애정 주고 오는 거 정도가 나의 최선일 텐데, 그게 눈에 안 띄면 안 띄었지 무슨 피해씩이나 끼치겠나 싶어진 것입니다.
친구는 저한테 그게 자의식 과잉이라고 하긴 했습니다. 너가 너무 큰 자의식을 가져서, 니 영향력을 너무 과대평가해서 지금 삶이 힘든 거라고. 맞는 말이죠. 사실 세상은 나한테 별 관심이 없으니까요.
뭔가 이번 글은 굉장히 흐지부지 끝내야만 할 것 같아요. 내 안에서도 아무 결론도 내지 못하고 갈피도 잡지 못한 걸 소재로 가져오면 안 되는 거였는데 말이죠. 이렇게… 이렇게 나는 계속 살아가게 될까요? 사실 그게 너무 무서운 요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