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가 없다”에 대한 주관적인 생각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제가 사랑하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가 새로 나왔다고 해서
얼른 휴가 때 봐야지 하다가 보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게 되다니 참 다행이었습니다.
어쩔 수가 없다는 기본적으로
노동자인 만수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노동영화이자,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가족영화이기도 하고,
폭력적인 한 개인으로서의 범죄영화이기도 합니다.
[줄거리]
유만수
노동자로서의 만수는 25년간 태양제지에서 근속하며 “올해의 펄프맨”이라는 제지업계인들에게 명예로운 상까지 수상하고, 제지업계에서 일하는 자신에 대한 높은 자긍심을 가진 인물입니다. 그런데 태양제지가 미국계 펀드회사에 매각당하며,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가게 되고, 해고자 명단을 제출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던 만수는 결국 그 조차도 해고당하고 맙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만수는 해고 이후, 자신이 한 생애를 바쳐 일구어낸 자신의 낙원에서 가족이 전부 추방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고, 자신의 낙원을 지키고자, 여러 회사에 지원을 하게 되나, 아무 데서도 자신을 받아주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을 전전하게 됩니다. 만수의 이러한 상황을 비웃기라도 하듯 만수는 이때부터 갑작스러운 치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하지만, 만수의 노동자로서의 자아는 결국 제지 업계에서 일하는 자신을 바라고, 그 외의 노동을 하는 자신은 상정하는 범위 내에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제지업계에서의 노동자로써의 자아를 되찾으려 했기에, 결국 만수는 제지업계에서의 자아를 지키며, 한 가장의 가장으로서는 낙원 같은 가정을 지키는 2가지의 목표를 모두 달성하려 치열하게 사투하는 내용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제지회사의 만수가 원하는 위치의 자리는 그 수가 많지 않고, 결국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그 자리에 도달할 수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자. 만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리를 얻어내기로 결정합니다. 표면적인 이유로는 가족을 위해서,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노동자로써의 자신의 자아를 지키고, 자신의 위치를 되찾기 위해서.
의자 뺏기 게임
태양제지에서 해고당한 만수는 태양제지에서의 자신의 위치의 대체재로 문제지의 특수지 라인 작업반장인 '최선출'의 자리를 노리게 됩니다. 그 자리를 빼앗기 위해서 만수는 최선출의 뒤를 쫓다가, 문득 최선출을 죽일 수도 있는 위치에 도달하게 되고, 이때 실제로 선출을 죽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홍고추를 키우는 화분을 들게 됩니다.
하지만 문득 최선출만 제거한다고 해서 자신이 그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든 그는 자신의 경쟁상대를 먼저 파악하기로 합니다. 마침 홍고추 화분에는 벌레가 들어 고추가 잘 열리지 않았고, 경쟁자들 때문에 자신의 위치를 얻기 어려웠던 자신을 이 화분에 투영하게 된 그는 레드페퍼 페이퍼라는 가상의 회사를 앞세워 제지회사의 지원자리스트를 받아 만수의 열매를 틔우지 못하게 하는 벌레들 즉 경쟁자의 리스트를 구성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뽑힌, 만수보다 뛰어난, 만수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제거대상들은 총 3명, 최선출과, 구범모, 고시조. 이들을 제치고, 자신이 의자에 앉기 위해, 만수의 의자 뺏기 게임은 시작되었습니다.
남편으로서의 페르소나, 구범모
구범모는 만수처럼 제지회사에서 오래 일하던, 올해의 펄프맨 상까지 받은 꽤 뛰어난 제지맨이었습니다. 하지만, 만수와 마찬가지로 회사에서 실직당한 이후, 제지 회사에서 빈번히 거절받은 실직자이기도 했습니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범모의 아내는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거였죠. 만수는 범모를 제거하기 위해 그의 주위를 맴돌다 그 사실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타인과 가까워지면, 타인의 세상을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타인을 사랑하게 되고, 타인을 통해 자신을 투영하게 되지요, 만수는 범모를 죽이기 위해 그의 세상으로 한 발짝 들어갈수록, 범모의 모습에서 자신을 보며, 자신과 그가 닮았다는 것을 인지하게 됩니다. 사실, 만수의 아내인 이미리는 아들인 시원을 데리고 만수와 결혼하게 된 이혼녀입니다. 불륜을 저지르는 범모의 아내를 보며, 만수는 범모 입지가 무너져 그녀가 그를 떠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과, 마찬가지로 입지가 무너진 자신을 범모에게 투영하며, 이혼녀인 자신의 아내도 언젠가 자신을 떠나게 되지 않을까?라는 무의식 중의 불안이 그의 마음에 틔워지게 됩니다. 또한, 범모는 만수와 마찬가지로 제지업계 이외의 노동자로서의 자신의 자아를 인정하지 못하는, 고집 센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범모의 아내가 범모에게 실망하는 가장 큰 이유이자, 만수를 대변하는 생각이기도 합니다.
범모를 살해할 준비를 하며, 범모에게 투영하게 된 만수는, 자신도 모르게 은연중에 자신의 불안을 미리에게 드러내게 되는데, 이는 치위생사로 일하는 미리의 직장의 젊은 의사인 오진호에 대한 질투, 혹은 미리를 믿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 등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범모를 살해하기로 마음먹은 그날, 서투른 살인자로서의 모습과, 망설이는 인간성을 지닌 만수는, 여러 가지 변수들로 인해 결국 그의 손으로 범모를 죽이지 못하고, 총을 빼앗긴 채 범모의 집에서 도망쳐 나오지만, 범모에게 질릴 대로 질린 그의 아내가 그녀의 손으로 범모를 죽이며, 상상치도 못하게 만수의 계획은 성공하게 됩니다. 죠
아버지로서의 페르소나, 고시조
의자 뺏기 게임의 두 번째 타깃은 고시조였습니다. 그도 꽤 명망 있는 회사의 제지업계 기술자였지만, 해고당한 이후, 구둣가게에서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구둣가게에서 일한다는 다른 선택지를 취한 고시조는 만수와 범모와는 꽤 다른, 만수와 범모와 달리 성실하고, 가족을 고생시키지 않으려 노력하는 만수의 타깃 중 가장 무고한 이로 보입니다. 시조의 딸은 만수의 딸과 꽤 닮아있었고, 서로 자신의 딸에게 느끼는 감정 또한 닮아있었습니다. 첫 계획의 성공으로 꽤 자신감이 붙은 폭력적인 개인으로서의 만수의 자아 덕분인지 이번에는 범모를 관찰했던 것과는 달리 시조에게 말을 걸며 적극적으로 다가갑니다. 시조와의 대화를 통해 시조의 환심을 사게 된 만수는, 그와의 대화를 통해 아버지로서의 시조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 때문이었을지, 시조를 살해하기 전, 그는 꽤 긴장한 모습으로 떨며, 연신 죄송합니다를 중얼거렸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살해였기 때문인지,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고 살해에 성공했고, 시조의 시체를 트렁크에 싣고 현장을 떠나게 됩니다.
만수와 아버지, 그리고 아들
만수가 살해를 하던 그날 저녁, 만수의 아들은 가정의 재정난을 헤쳐나가기 위한 그 나름의 해결법으로 그의 친구 아버지의 휴대폰 매장을 터는 대담한 행동을 결심하게 됩니다. 이렇게 부도덕한 행동을 통한, 가정의 구출이라는 플롯은 만수의 살해와 같은 맥락임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만수의 아들의 범죄를 어찌어찌 해결하고 집에 돌아온 날, 휴대폰들과, 시조의 시체를 나무 밑에 심는 것으로 그들의 부도덕한 행위를 덮고자 합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미리가 이런 게 밑에 있어도 나무가 잘 자라냐고, 심지어는 거름도 더럽지 않냐고 말하는 장면에서, 만수가 원래 더러운 거름 위에서 나무가 잘 크는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악행으로 가정을 위한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비유적 표현을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만수의 아버지는 자신이 운영하던 돼지농장에 병이 돌자, 돼지들을 전부 살처분하고 땅에 묻었는데, 이 사건 이후 아버지는 정신이 오락가락해져 결국 자살을 하고 마는 사건이 과거에 있기도 했습니다.
남성성을 지닌, 폭력적인 자신으로서의 페르소나, 최선출
이제 정말 마지막단계 선출만 죽이면 되는 상황에서 갑자기 만수의 집에 경찰이 들이닥치고, 만수에게 두 제지맨들의 실종이 있었다라고 전하며, 조심하라는 말과 함께, 북한제 권총 탄피가 발견되었다는 말을 하게 되고, 이 북한제 권총이라는 말을 들은 만수의 아내 미리는 만수 아버지의 권총을 떠올리게 되며, 그간 이상했던 만수의 행동들과 엮어 만수를 강하게 의심하게 됩니다.
어찌 되었건, 마지막 계획을 위해 만수는 외딴섬에 위치한 선출을 꼬드겨 그의 집에서 함께 술을 마시게 되고, 만수는 밑잔을 빼며 단 한잔도 마시지 않은 채 버티는 모양새로 술자리가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흥에 취한 선출이 갑자기 밑잔을 뺄 수 없는 폭탄주를 제조하게 되고, 그는 결국 술을 입에 대게 됩니다. 사실 만수는 알코올 의존이 있던 사람으로, 술에 취해 아들을 때렸던 일도 있던 꽤나 위험한 면을 지닌 사람이었고, 약 9년간 술을 입에도 안 대던 사람이었지만, 선출이 건넨 폭탄주를 마시는 것이 트리거가 되어, 뇌관이 때려진 폭탄처럼 그의 폭력적인 면이 깨어나게 됩니다. 죄책감을 상기시키던 그의 마지막 인간성의 메타포인 치통을 없애기 위해 그는 렌치라는 폭력의 수단으로, 자신의 아픈 이를 빼버리게 되고, 마지막 남은 그의 인간성은 그 이와 함께 만수의 체내에서 사라집니다. 마지막 살해에서는 사라진 인간성 덕인지, 권총이 아닌 완전한 계획범죄로 선출을 살해하고, 현장을 위조하게 되며, 이를 통해 만수는 자신의 입지를 문제지에서 다시 되찾게 됩니다.
동조
만수의 아내와 만수의 아들은 만수가 마지막 살해를 하러 떠난 그 시점에 만수가 살인이라는 범죄를 하고 있음을 확신하게 되지만, 결국 그들도 그들의 낙원인 가정을 지키기 위해 만수의 범행을 묵인하며, 그를 안아주는 것으로 그의 범죄를 함께 떠안게 됩니다.
[나의 생각]
- 가부장적 사회와 가장으로서의 역할과 무게
너무 민감한 주제가 아닐까 모르겠다. 하지만 이 영화를 이야기하며, 만수를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이야기라 뺄 수는 없었다.
말을 이어가기에 앞서 나는 페미니스트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 반대의 사상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이 글을 쓰면서도 가부장적인 사상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내용과 그것에 대한 나의 생각은 배제하려고 애썼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 사회는 가부장적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이 그렇다는 것이다. 맞벌이 가정이 많이 늘어났고, 가정의 경제적 측면에 대한 여성의 기여도가 많이 늘어났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상당수의 가정에서 가사 노동은 여성의 몫이고, 여성 전업주부는 흔하게 볼 수 있는 가정의 모습임에 비해, 남성 전업주부는 아직 흔치 않다. 이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특징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유리천장의 유무와는 관계없이 실제로 대다수의 기업에서의 임원급 인사는 남성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고, 이는 고위공무원을 비롯한 국가직에서도 나타난다. 이 때문에 맞벌이부부라 할지라도 자연히 남성의 수입이 높은 것이 대부분이고, 이는 곧 가정에서의 남성을 향한 경제적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관점이 아니더라도, 우리나라는 과거부터 이어진 뿌리 깊은 유교적 사상으로 인해 가부장적인 역할관이 당연시되어왔고, 이는 곧 남성을 향한 가정에서의 역할과 무게감을 부여하는 장치가 되어왔다. 결국 우리나라의 제도적, 관습적, 사성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일반적인 가정에서의 가장으로서의 무게감은 여성보다 남성에게 치우치게 되었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면, 만수 또한 가부장적 사상을 지닌 인물로 볼 수 있고, 만수의 가정도 가부장제를 골자로 운영되는 가정의 형태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만수는 가정에서의 이러한 가부장적 형태에서 꽤 만족감을 느끼는 인물로 보이기도 한다.
- 남성성과 거세
만수의 가부장적 태도는 곧 만수의 남성성으로 이어진다. 원시적인 남성성을 생각해 보자, 원시에서의 남성의 역할은 여성보다 강한 신체로 동물을 사냥하여 식량을 얻거나, 다른 부족 간의 다툼 등에서 자신의 부족 즉 가정을 수호하는 것이었고, 이는 곧 이러한 행위를 통해 얻어내는 권위라는 남성성으로 이어졌다. 현대에서의 남성성도 이와 방식은 다르지만, 결국 가정을 수호하는 것으로 얻어질 수 있다. 태양제지에서 일하던 시점에서 만수는 경제적 활동을 통해 가정을 수호하며, 남성성을 뽐낼 수 있었다. 이러한 남성성을 보여주는 메타포가 ‘콧수염’이다. 만수가 태양제지에서 일하는 동안, 또 문제지에 취업에 성공했을 때 만수의 인중에는 콧수염이 자라나 있다. 그런데, 만수가 태양제지에서 해고당해 실직자일 때, 그의 콧수염은 사라져 있다. 즉 그의 남성성은 거세당해 있다. 그런데, 실직이 남성성의 거세로 이어질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현대에서의 남성성은 꼭 경제적 활동으로 이루어질 필요는 없다. 여성도 경제활동의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습은 만수의 아내에게서도 볼 수 있다. 만수의 아내는 경제활동을 할 능력이 없는 인물이 아니다. 그녀는 치위생사로서 경제활동을 할 수 있지만, 가정에서의 역할을 가사와 육아를 하는 것으로 정하고, 만수와 역할 분담을 하고 있다. 그런데, 만수가 경제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자, 그녀는 다시 취업을 하고, 가정에서의 재정을 긴축하기 위해 경제권을 만수에게서 가져오게 된다. 이 행위는 만수의 남성성을 앗아간 것이 아니다. 역할의 교체일뿐이다. 그런데 가부장적 사상을 지닌 만수는 이 교체를 남성성의 상실, 즉 거세로 인식하고, 남성성의 회복을 위한 방법을 오직 제지회사의 복귀를 통한 경제권의 수복을 통해 얻어내려 한다.
- 시지프스의 돌
시지프스의 돌 신화를 아는가? 고대 그리스 신화인데, 시지프스가 신을 속인 대가로 영원히 돌을 끝없는 산 위로 밀어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는 내용이다. 시지프스는 깔려 죽지 않기 위해 돌을 계속 굴려야만 한다. 이는 우리의 모습과도 같다. 우리도 생존을 위해서는 끝없이 시지프스처럼 돌을 굴려야만 한다. 처음 사회에 내던져졌을 때, 그 삶의 무게는 자신 스스로의 생존만큼이지만, 삶이 지속되며,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부모님이 은퇴함에 따라 무게도 점점 무거워진다. 만수도 무거운 돌을 열심히 굴려대는 인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만수가 간과한 것은, 돌의 무게가 더해짐에 따라 우리에게는 돌을 함께 굴리는 보조자가 생긴다는 것과, 돌을 굴리는 방식에는 꼭 한 가지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만수는 그의 가부장적인 태도로 인해 보조자인 아내가 돌을 굴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자신이 돌을 굴리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보조자인 아내가 대신 굴리는 상황에 오게 되자, 그는 상실감까지 느끼게 된다.
- 운명론적 인식과 치킨게임
상실감 속에서도 그는 도저히 돌을 굴리는 방식을 관철하지 않았다. 왼팔이 부러졌으면 오른팔로 굴리면 그만인 것을 만수는 왼팔로만 돌을 굴리려 한다. 이는 만수의 운명론적 인식에서 기인한다. 만수는 자신의 노동자로서의 자아가 제지업계가 아닌 다른 곳에 뿌리를 두는 것을 도저히 용납하지 못한다. 이는 결국 제지업계로서의 회귀성을 가지게 되고, 이는 만수, 범모, 시조에게 모두 보이는 특성이다. 만수와 범모에게서는 이러한 특성이 더 잘 보이는데, 자신은 종잇밥을 먹고살아야만 하는 사람이라고, 송충이가 뽕잎을 먹고살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말하는 것에서 그 생각이 잘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만수는 이러한 인식 속에서 결국 제지업계의 경쟁자들과 죽을 때까지 경쟁하며, 그중에서도 항상 선두를 차지해야 하는 치킨게임을 끝없이 해야 하는 참 비극적인 운명을 타고났다. 아니, 사실 타고난 운명은 없다. 그들은 송충이가 아니니까. 뽕잎을 먹어도 잘 만 살 수 있는 애벌레에 불과하니까.
- 제지와 원예, 식목
자 이제는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만수는 나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물이다. 제지업에 종사하며, 원예를 취미로 하고, 그의 집 주변에는 그가 심은 나무들로 가득하다. 이런 만수는 나무와 친하다고 할 수 있을까? 실상도 그러한가? 제지는 어떤 공정으로 이루어지는가 나무를 베어내어 이를 가공해서 종이를 만들어낸다. 이는 나무의 생명력의 상실을 통해 경제력으로 치환하는 과정이다. 원예는 어떠한가? 나무를 애정을 담아 기르는 것은 생명력의 재생인가? 아니다. 원예는 나무 본연의 생명력을 억제하고, 생장을 통제하여 만수의 미적 욕망을 채우는 폭력성을 지닌 행위이다. 그럼 식목은 진정한 생명력을 기르는 일이라고 볼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아니다. 만수의 식목, 정확하게는 만수 일가의 식목은 온갖 부도덕한 행위를 제물 삼아 가정의 수호라는 열매를 얻고자 하는 공양의식에 가깝다. 결국 만수는 나무의 생명력을 이용해 경제적 가치와, 욕망, 또 가정의 평안을 바라는 착취자로서의 인물인 것이다.
- 폭력성, 그리고 인간성
이러한 공양 의식은 만수의 폭력성과 연결된다. 아니 어쩌면 부도덕성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만수는 가정을 수호하기 위한, 정확히는 그의 가부장적인 인식과 운명론적 인식에 부합하며, 가정을 수호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의자 뺏기 게임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만수가 과연 폭력적인 인간이기에 살해라는 잔혹한 행위를 하게 되었을까? 물론 만수가 알코올의존증과 이를 통한 폭력성을 내재하고 있는 인물임은 맞다. 하지만 이것으로 만수가 폭력적인 인간이라고 못 박을 수 있나? 여러분은 오징어게임을 보았는가? 만약 당신이 정말 절박한 상황에 처해 그 게임에 참야 하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당신은 정말 아무도 안 죽이고,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을 자신이 있나? 아니, 직접적인 상해가 아니더라도, 상해를 입지 않는 자신과, 나를 대신하여 피해를 받은 누군가를 보며, 마음을 가라앉히지 않을 자신이 있나? 나는 없다. 만수도 삶이라는 게임에서 벼랑 끝에 몰리자 죽기보다 죽이는 쪽을 선택했을 뿐이다. 사실 우리는 모두 폭력성을 내재하고 있다. 만수의 행위는 이런 내재된 폭력성의 발현일뿐이며, 알코올의존증은 내재된 폭력성을 이해하기 쉽게 해 주는 영화적 장치이자, 폭탄주라는 트리거를 통해 이것이 발현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만수가 자신의 위치를 되찾아가는 과정에서 인간성을 상실해 가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해고자 명단도 제출하지 못하던 그가 3번의 살인을 통해 점차 인간성을 잃다가 최종장에서는 인력의 대체, 즉 노동자의 ‘모가지’를 주저 없이 날려버리는 모습은 인간성의 말소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러한 인간성을 보여주는 장치로서 영화에서는 ‘아픈 이’를 사용하고, 인간성의 발현을 ‘치통’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그가 폭력성에 힘입어 그 렌치로 과격하게 아픈 이를 뽑아버리는 것은 그의 폭력성을 보여주는 것뿐 아니라, 마지막 남은 그의 인간성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 태양에서 문으로
태양제지에서의 실직에서, 문제지로의 재취업으로 그의 자리를 다시 되찾는 여정을 끝마친 만수는 과연 전과 같을 수 있을까? 밝았던 태양 아래에서의 만수의 가정은 만수의 죄와 가족의 방조로 달 아래의 그림자에 드리워져 어두워지고 말았다.
- 어쩔 수가 없었을까?
여기까지 생각을 이어나가다 보니, 영화를 보는 내내 이어지던 이 질문을 안 할 수 없었다. 만수는 어쩔 수가 없었는가? 사실 우리가 만수를 보며 던졌던 꼭 저래야만 했나?라는 질문은 만수가 범모를 보며 던졌던 꼭 그래야만 했어?라는 질문과 동일하다. 사실 우리가 정답을 아는 것처럼 만수도, 또 범모도 어쩔 수 없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만수와 범모는, 그리고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다. 당신이 만약 만수였다면, 25년이라는 시간과 노력을 쏟아낸 업을 버리고 해고되었으니 그냥 치킨집이나 차리고 살 수 있겠는가? 어쩔 수가 없다는 영화 제목은 사실 영화를 보는 내내 들었던 우리의 질문에 대한 답장이자, 영화와 우리를 관통하는 문장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