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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나요 Apr 09. 2023

파워포인트에서 사용하는 스토리텔링 기법

10년 넘게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다니면서 느낀 것이, 영화나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토리텔링이란 점이다. 좋은 배우를 쓰고, 빵빵하게 CG효과를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힘, 스토리텔링이 핵심이다. 어찌 보면 영화나 드라마에서 스토리텔링이 중요하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일은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업무 관련 말을 풀어내는 행동이다. 그게 이메일이 되었든, 미팅이 되었든, 서류가 되었든 말이다. 모든 것이 다 스토리텔링이다. 


그중 가장 질서 정연하게 나의 스토리텔링을 풀어나갈 수 있는 것이 파워포인트(PPT)라고 생각한다. 직장인이면 상당히 많은 문서를 파워포인트로 작업하게 된다. 실제로 프리젠테이션을 워드파일로 하는 경우는 없으니... 파워포인트만 만들다 보니 완전한 문장의 줄글 쓰는 게 어색할 정도이다. 


그럼 파워포인트(PPT)에서 스토리텔링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나는 스토리텔링을 위해서 먼저 PPT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 PPT를 만들건대 PPT를 쓰지 말라고? 문제가 곧장 PPT부터 만들다 보면 생각의 흐름이 정리되지 않고 한 장 한 장의 슬라이드를 만드는데 집중한다는 점이다. PPT는 태생적으로 한 장씩만 보인다. 물론 전체 슬라이드를 한 번에 작게 해서 볼 수는 있지만, 그렇게 편집이 불가해서, 결국 한 슬라이드씩만 본다. 그러면 전체 흐름이 아니라 한 장의 슬라이드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나는 PPT를 만들기 전에 내가 원하는 내용을 글로 써본다. 워드파일도 좋고, 손으로 직접 백지에 써보아도 좋고, 엑셀에 해도 좋다. 어차피 PPT는 줄 글로 쓰는 것이 아니라서 bullet point로 요점만 적는 것도 충분하다. 내가 진짜 말하고 싶은 내용이 무엇인지, 그걸 뒷받침하는 근거들은 무엇이 있는지,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서론에서 어떻게 썰을 풀지, 마지막에 들어갈 결론은 무엇일지 등등. 워드파일에 쓴다면 bullet point로 같은 생각의 덩어리는 묶어 가면서 쓰는 게 좋고 (들여쓰기를 해서 생각의 선후관계/상하관계까지 잡아주면 더 좋다), 엑셀로 하면 생각의 덩어리가 달라질 때마다 한 열씩 들여서 쓰면 상하관계까지 잘 잡을 수 있다. 나는 상당히 고전적인 스타일인지라 손으로 백지에 쓴다. 백지에 썼을 때의 좋은 점은, 그야말로 낙서하듯이 생각날 때 빈자리에 아무렇게나 써도 된다는 것이다. 여러 생각을 토해낸 후에 자기들 간의 관계는 찍찍 줄로 그어주면 된다는 점에서 나는 여전히 백지 (빈 A4종이)를 선호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원하는 내용을 쓴다는 것은 각 슬라이드의 헤드라인 (중심 생각)만을 써본다는 것이다. 그 중심생각들이 결국 다 모여서 스토리텔링을 이룬다. 슬라이드의 내용이 무엇이 들어갈지는 그 이후에 생각해 보면 된다. 이야기의 뼈대를 잡는 것은 결국 헤드라인이다. 헤드라인에 그냥 단어만 쓰고 문장을 쓰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헤드라인에 문장을 쓰는 것을 선호한다. 그래야 그 슬라이드만 봐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잘 보인다. 


예를 들어, 한 슬라이드에서 "여러 정보전달의 방법 중 이메일 사용 시 생각을 간결하고 빠르게 정리할 수 있다"라는 내용을 전달하고자 한다고 해보자. 나는 이 문장을 아예 헤드라인에 다 쓰는 것을 선호한다. 헤드라인은 두 줄을 넘어가면 안 되고, 한 줄과 절반 정도로 끝나야 가독성이 좋다. 만약 "정보전달 방법 중 이메일의 특징" 이런 식으로 헤드라인을 적으면, 생각이 드러나지 않는다. 발표를 직접 하면야 그래도 좀 낫지만, 문서로만 전달할 경우에는 글을 읽는 이가 슬라이드를 다 보고서 중심문장을 추론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슬라이드별 헤드라인을 쓰지 않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대규모의 청중 앞에서 발표하는 경우가 그렇다. 이럴 경우 슬라이드에는 덩그러니 이미지 하나만 있고 아무 말도 안 쓰여있을 수 있다. (애플 스티브잡스의 발표를 생각해 보시라). 그렇다고 할지언정, 내부적으로는 그 슬라이드에서 무엇을 말할지 헤드라인을 잡는다. 대중에게 보이지 않을 뿐이지, 말하는 사람은 각 슬라이드의 헤드라인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다시 돌아와서, 헤드라인을 다 구성한 후에 슬라이드별 흐름을 살펴본다. 이 헤드라인이 여기 위치에 들어가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는지. 눈치챘겠지만, 여기까지 우리는 슬라이드 내용에 무엇이 들어갈지 하나도 고민하지 않고 있다. 그건 나중에 하는 일이다. 핵심은 전체 흐름이 말이 잘 되는지를 계속 확인하는 것이다. 


반대로, 슬라이드를 다 만들어 놓은 상황에서 (안에 내용까지 다 채워 넣은 상황에서) 무언가 슬라이드가 마음에 안 들고 어디가 부족한지 보고 싶다면, 빈 PPT 파일을 하나 만든 후 거기에 기존 슬라이드들의 헤드라인만 가져다가 붙여 넣어본다. 한 슬라이드 당 헤드라인만 있고 아래는 텅텅 빈 백지 슬라이드들을 쭈욱 만든 후, 그걸 프린트해서 바닥에 쭉 펼쳐두고 순서를 한눈에 봐본다. 그럼 좀 더 어디의 논리가 비어있고, 어디 순서를 바꿔야 하는지가 눈에 잘 들어온다. 아무래도 안에 내용이 가득 차있으면 눈이 내용으로 간다. 헤드라인이 잘 잡혀있는 지를 확인하는 게 핵심이다. 




PPT 전반의 스토리라인이 잘 잡혀있고 헤드라인이 잘 들어갔으면, 이제는 일이 쉽다. 각 헤드라인을 뒷받침하는 내용을 각각의 슬라이드별로 넣어주면 된다. 초등학교 3학년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중심문장"과 "뒷받침 문장"은 정확히 PPT를 만들 때도 사용된다. 헤드라인이 중심문장이며, 슬라이드 내부 구성은 뒷받침문장이다. 


나는 전략컨설팅을 할 때는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를 정도의 빡빡한 슬라이드를 만들었다. 뒷받침문장을 그야말로 빡빡하게 (폰트도 작게) 써야 한다. 왜냐하면 컨설팅이란 직업 자체가 슬라이드를 만든 내용으로 클라이언트에게 돈을 받는 직업이니, PPT가 돈 값 한다는 인상을 심어야 한다. 


하지만 일반 기업에서 내부용 또는 외부 발표용으로 PPT를 만들 때는 뒷받침문장이 빡빡할 필요는 없다. 헤드라인을 뒷받침하는 역할만 충분하면 된다. 나는 한 슬라이드를 뒷받침하는 내용으로 그래프는 최대 2개 정도를 넣는 편이다 (좌우 한 개씩). 폰트도 너무 작게 쓰지 않는다. 빡빡할수록 듣는 사람은 나의 말을 듣지 않고 눈으로 슬라이드를 따라가려 하기 때문이다. 




물론 각 슬라이드를 멋지게 만드는 일도 중요하다. 하지만 결국은 스토리텔링이란 점, 스토리텔링은 기승전결 뼈대가 잘 갖추어져 있고, 내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잘 전달하며, 상대방이 흥미를 잃지 않는 것이란 점에서 PPT는 뼈대를 잡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얼마나 멋지게 꾸미는지, 예쁜 디자인을 얹히는지는 그 다음 일이다. 


재밌는 것은, 디즈니 전략팀에서 일하면서 본사 전략팀과 같이 일을 많이 했는데, 그들이 쓰는 PPT포맷은 백지란 점이다. 빈 백지에 검은 색상밖에 없고, 폰트도 14 이하는 안 썼다. 상당히 빡빡하지 않게 구성된 허허벌판 PPT였음에도 내용이 눈에 들어오게끔 하는 PPT였다. 다른 곳도 아니고 알록달록 말랑말랑한 디즈니의 전략팀인데! 


결국 모든 것은 스토리텔링, 이야기를 이끄는 힘이다. 일에서든 영화에서든. 


Photo by Teemu Paanan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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