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외주 준 사람들

잡동사니 창고에서 나오는 법

by 드림공화국

자정 무렵, 불 꺼진 방 안. 스마트폰 액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르스름하고 차가운 불빛만이 피곤에 지친 누군가의 얼굴을 비춘다. 무표정한 얼굴 아래, 엄지손가락은 기계적으로 화면을 위로 쓸어 올린다.
"상위 1% 부자들의 아침 루틴", 반사적으로 화면 '캡처'."챗GPT로 10분 만에 기획서 쓰는 법", 일단 '나중에 볼 영상'에 저장."요즘 커뮤니티에서 난리 난 그 사건 요약", 앞뒤 맥락도 모른 채 대화창에 '분노 이모티콘' 전송.
1시간째, 끝없이 쏟아지는 쇼츠와 릴스의 바다를 멍하니 부유(浮游)한다. 이내 스마트폰 화면 상단에 '저장 공간이 부족합니다'라는 알림이 뜬다. 그제야 홀린 듯 전원 버튼을 누른다. 까맣게 점멸한 액정 위로, 어딘가 길을 잃은 듯 텅 비어 있는 내 얼굴이 비친다.
내 사진첩에는 수만 장의 '성공 비결'이 쌓여 있고, 나는 수많은 단톡방에 속해 시시각각 세상의 감정을 공유받고 있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완벽하게 지식 및 타인과 연결된 시대를 살고 있는데, 왜 일상은 갈수록 피곤하고 마음은 지독히도 헛헛한 걸까? 세상 모든 정답을 손에 쥐고도 내 삶의 운전대를 놓쳐버린 우리의 민낯을 들여다본다.


우리가 느끼는 이 공허함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과거의 현인들은 우리와 같은 삶 속에서 어떻게 진실을 마주하고 지혜롭게 대처하였을까?


17세기 유럽의 귀족들은 신기한 물건을 모아두는 '호기심의 방(분더카머)'을 만드는 것을 삶의 큰 자부심으로 여겼다. 그러나 욕망의 호기심으로 무작정 모은 진귀한 물건들의 보관소는 머지않아 뭐가 뭔지 모르는 잡동사니 창고로 전락하고 말았다. 소유하고는 있으나 세상을 위해 쓰이지 않는 분더카머. 어쩌면 오늘날 우리의 스마트폰, 옷장, 신발장, 일 년에 한 번도 꺼내지 않는 고가의 가방들이 바로 21세기의 분더카머다.
독일의 학자 숄케 아렌스는 저서 『제텔카스텐』에서 현대인의 이러한 증상을 '수집가의 오류(Collector's Fallacy)'라고 꼬집는다. 유용한 글을 캡처하는 순간, 뇌에서 도파민이 분비되며 그 지식이 머릿속에 온전히 습득되었다고 착각하는 심리다. 하지만 내 삶의 맥락과 연결되지 않은 채 버튼 하나로 '소유'한 정보는 디지털 쓰레기일 뿐이다. 불필요한 지식을 과감히 덜어내듯, 정원사가 잡풀을 뽑고 쓸모없는 가지를 쳐내듯 우리의 삶도 꼭 필요한 것만 남기는 정돈이 필요하다.
지식과 소유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가끔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춘 채, 익명의 커뮤니티에서 누군가를 악마화하며 쉽게 분노하지는 않는가?


행동경제학의 창시자 대니얼 카너먼은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우리의 사고를 두 가지로 나눈다. 느리고 에너지가 많이 드는 '논리적 사고'와, 빠르고 감정적인 '즉각 반응'이 그것이다. 복잡한 타인의 맥락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팩트를 검증하는 논리적 사고는 뇌에 막대한 에너지를 소모시킨다. 현실이 각박하고 내면의 에너지가 고갈되었을 때, 뇌는 자동으로 즉각 반응 모드를 켜고 대상을 '우리 편'과 '적'으로 단순하게 분류해 버린다.


온라인에서 핏대를 세우며 타인을 혐오할 때 느껴지는 묘한 연대감. 그것은 정의감이 아니라, "나는 지금 복잡하게 생각할 여력이 없다"는 뇌의 게으름이자, 거대한 무리에 기대어 나의 불안을 덮으려는 '인지적 편안함'의 결과일 뿐이다.


수집가의 오류에 빠져 지식을 외주 하고, 즉각 반응에 기대어 감정마저 군중에게 맡겨버린 우리는 이제 삶의 결정권마저 21세기의 절대 권위자인 '알고리즘'에게 헌납하고 있지는 않을까?


조직심리학자 애덤 그랜트는 『싱크 어게인』에서, 현대인들이 자기 믿음만 고집하는 '전도사'나 무리의 인정만 갈구하는 '정치인' 모드로 살아간다고 비판한다. 과거 사람들이 "자연은 진공을 혐오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2천 년간 맹신했듯, 오늘날 우리는 유튜브 알고리즘과 베스트 댓글이라는 권위에 기꺼이 복종하는 전도사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이 수동성의 사슬을 끊으려면, 남이 떠먹여 주는 정답을 의심하고, 끊임없이 내 삶의 데이터로 직접 실험하며 스스로 결론을 갱신하는 주도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이제 어두운 방 안에서 스마트폰을 쥐고 있는 나 자신에게 되물어야 한다. 알고리즘이 떠먹여 주는 요약본을 넋 놓고 바라보며 대중의 얄팍한 분노에 무임승차하는 '엑스트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조금 피곤하고 흉터가 남더라도, 내 손으로 직접 흙을 파내고 실험하는 '내 삶의 과학적 실천가'가 될 것인가.


어김없이 내일 아침 알람이 울릴 것이고, 스마트폰 화면은 켜질 것이다. 그 잠금을 해제하기 전, 오늘 밤 잠시 멈춰보자. 무의미한 캡처 대신 오늘 하루의 실패를 한 줄로 기록하는 것. 타인을 향한 분노를 내 삶의 진단 계기판으로 읽어내는 것. 검색창에 정답을 묻기 전에 단 10분이라도 '모름'을 견뎌내는 것. 알고리즘이 던져주는 매끈한 정답 앞에서도 기꺼이 빈칸을 남겨두는 것.
"그 누구의 말도 그대로 믿지 마라(Nullius in verba)." 영국 왕립학회의 오랜 모토를 기억하자. 알고리즘과 군중이라는 거대한 잡동사니 창고의 문을 열고 나와, 기꺼이 사유의 고통을 껴안을 때 비로소 진짜 내 삶이 시작된다. 스마트폰의 화면을 끄는 고요한 순간, 당신의 찬란하고 고유한 일상이 비로소 환하게 켜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