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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 Sep 27. 2024

자존심과 긍휼

부부싸움의 종말

 3. 자존심과 긍휼


 모든 큰 싸움의 원인은 자존심 때문이었던 것 같다.

상대의 말투나 행동이 나를 무시하는 것 같을 때 분노가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잘못과 실수는 용서할 수 있어도, 내 자존감에 상처를 주는 행위는 쉽게 용서가 되지 않는다.

그만큼 인간은 누구나 나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존재이다.


 부부 싸움은 더욱 그렇다. 아무리 나와 비슷한 사람과 천생연분으로 만났다고 해도, 내 자존심에 상처를 주면 감정이 쌓인다. 생물학적으로 정 반대의 남녀가 만나 함께 생활한다는 것 자체가 큰 모험이 아닐 수 없다.  

젊어서는 남녀 모두 왕성한 성적 끌림에 모든 것이 가려지지만 콩깍지는 벗겨지기 마련이다.

우리의 뇌는 어떤 쾌락에도 적응해 버리고 더 이상의 도파민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면 상대의 다른 점과 못난 점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이런 배우자가 자신을 무시하는 언행을 일삼는다면 더 이상 같이 있을 이유가 없게 된다.

욕망으로 타오른 사랑은 이미 이별을 전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성적 매력은 새로운 호기심과 긴장을 연료로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은 재료가 소진되면 새로운 욕망을 찾아 떠나게 된다.


 그런데 상대가 불쌍해 보이기 시작하면 헤어지기 쉽지 않다.

끓어오르던 분노도 상대가 불쌍해 보이면 순식간에 사그라진다. 우리 부부 싸움의 아내가 불쌍해 보이는 순간이었던 것 같다. 아무리 언성을 높이며 싸우다가도 울고 있는 아내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면 분노는 사라졌다. 나 하나 믿고 시집왔고, 장모님과도 사이가 안 좋아, 내가 싫다고 하면 갈 곳이 없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마음이 가라앉았다.


 우리 작은 형은 평생 가정을 돌보지 않았는데 형수는 이혼은커녕 최근에는 사이가 좋아졌다.

아이들도 직장인이 되었고 아빠와도 잘 지낸다. 가족 모임이 있던 날 아내와 내가 너무 궁금해 물어봤다.

"형수님은 어떻게 작은형과 이혼하지 않을 수 있었어요?"

그러자 형수가 말했다. "찬일 씨가 너무 불쌍해서요"

책임감 없고 욕심 없는 형이지만 형수 자존심에 상처를 주지는 않은 것 같다.


 우리가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간구하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자존심은 내 마음에 상처를 준 상대를 바라보며 분노케 하고, 긍휼은 상대를 대하는 내 마음에 집중하며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정답이 없는 삶 속에서 자기 본능에 충실하며 살아도 저마다 만족한 삶이 될 것이다.

다만 중년 이후의 행복을 향해 가려면 젊어서는 절제하고 저축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한 인간이 느끼는 고통과 쾌락의 인생 총량은 대부분 엇비슷할 것 같기 때문이다.


 고통을 앞 당겨 진하게 치를수록 중년 이후의 행복 양은 더 커질 수 있다.

이 믿음이 있지 않고서는 젊은 날의 욕망과 쾌락을 절제하며 저축해 두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젊어서 짧고 강하게 소진시키고 살 것인지, 중년 이후 긴 시간을 가지고 조금씩 꺼내어 쓰며 살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이다.  지금 내 모습은 중년 백수에 불과하지만 스무 살에 되뇌었던 "젊음은 기구할수록, 희망은 희박할수록"의 결과물이라 생각한다. 비록 희박한 희망일지라도 꿈꾸고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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