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의미다 - 176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안다. 하지만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꺼리고 두려워한다. 죽음은 완전한 비가역적 사건이기에 죽음을 경험한 사람도, 죽음에 대해 증언해 줄 사람도 살아있는 사람 중에는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죽음은 완전한 미지의 영역이다.
탄생의 순간이 요란하고 힘겨운 고통이듯 죽는 순간 역시 이승에서의 마지막 힘겨운 싸움이다. 보통 젊어서는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다가 나이가 들면 비로소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제야 죽음 과정을 두려워하고 ‘좋은 죽음(Well-dying)’을 생각한다. 그렇다면 과연 ‘좋은 죽음’은 있기는 한 것인가? 있다면 어떤 죽음이 ‘좋은 죽음’인가?
좋은 죽음의 규정은 다양하지만 좋은 죽음은 분명히 존재한다. 따라서 죽음 당사자뿐 아니라 예비 죽음 당사자인 우리 모두 좋은 죽음에 대하여 한 번쯤 성찰해 보는 것이 꼭 필요하다.
미국 연방정부는 ‘좋은 죽음’이란 “환자와 가족과 돌보는 사람이 고통과 괴로움에서 해방되고, 환자와 가족의 바람에 전체적으로 조화되며, 임상적․문화적․윤리적 기준에도 상당히 부합되는 것”이라 규정했다. 또한 일반인 셋 중에 한 명은 사람이 죽음이 임박했을 때 그냥 죽게 내버려두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죽음에 직면했을 때 가능한 한 오래 사는 것보다 고통 없이 평안하고 차분하게 죽는 걸 ‘좋은 죽음’이라 생각한다.
가장 일반적인 ‘좋은 죽음’에 대한 규정은 ‘품위 있고 존엄하게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하지만 끝까지 의식이 깨어있는 죽음을 맞이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 대부분의 죽음 과정에서 마지막은 몸도 정신도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상태에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좋은 죽음을 나이와 결부시켜 말하기도 한다. 나이 든 노인의 죽음을 ‘호상(好喪)’이라 말하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그런데 사람마다 규정하는 나이가 다 다르다. 과연 몇 살을 죽기 적당한 때라고 말할 수 있을까? 흔히 장수하면 좋다고 생각하지만, 불행한 상태로 오래 사는 사람도 있고, 상당히 짧은 기간이라도 행복하고 충만한 삶을 산 사람도 있다. 삶의 질은 삶의 기간에 달려 있지 않다. 직접 살아보기 전까진 뭐가 좋다고 단정지어 말하기 어렵다.
또한 좋은 죽음을 자연스러운 죽음이라 말하기도 한다. 과연 자연스러운 죽음이란 어떤 죽음인가? 이때 고령으로 인한 기력의 상실로 죽음에 이르는 것만 자연스럽다고 여기기 쉽다. 사고를 당하거나 전염병 등으로 죽은 사람은 자연스럽지 않은 것인가? 그러면 천재지변과 같이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에 의한 죽음은 무엇인가? 과연 자연스럽지 않은 죽음은 어떤 죽음인가?
좋은 죽음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보면, 임종을 앞둔 할아버지가 식구들에 둘러싸인 채 한 사람씩 얼굴을 보며 ‘사랑한다’라고 말하며 이별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런 죽음은 흔치 않다. ‘안락사(존엄사)’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노환으로 천천히 죽어가는 사람이든 사고로 인한 갑작스러운 죽음이든 기력 상실로 그렇게 말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대부분의 죽음은 한순간에 숨이 넘어가는 것이다. 질병이나 노령으로 천천히 죽어가는 사람은 대부분 마지막 며칠이나 몇 시간 동안 의식이 없다. 설사 있더라도 말할 기력이 없다. 가만히 누워있는 모습이 평온해 보이지만 실제로 평온한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많은 사람이 잠든 상태에서 살며시 찾아오는 죽음을 최고의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 ‘잠들 듯이 죽고 싶다’라는 말을 하는데, 속은 들여다보면 죽어가는 부분을 아예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죽음도 갑작스레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황망할 따름이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 몸을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상태에서 조용히 떠나는 걸 상상하지만 그거야말로 상상에 불과하다. 몸과 마음을 온전히 통제할 수 있다면 죽지 않는다. 소위 좋은 죽음에 대한 강박의 결과일 뿐이다.
사람들은 죽어가면서 품위를 잃을까 봐 몹시 두려워한다. 안락사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흔히 대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품위 유지이다. ‘존엄사’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유다. 품위 있게 죽으려면 그런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스스로 먹지 못하고 스스로 뒤처리를 못해 도움을 받아야 하는 걸 두려워한다. 자기 몸을 스스로 돌보지 못하는 데서 오는 고통과 모욕감을 몹시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상황이 닥치면 할 수 없이 도움을 받으면서도 그런 상황이 품위를 떨어뜨린다고 여긴다. 나아가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고 인간답게 대접받을 권리가 사라진다고 여기기도 한다.
사람이 중병에 걸리면 당연히 도움이 필요한 상태에 처하고 사생활이 크게 침해된다는 사실과 타인의 돌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있다. 남들이 우는 건 괜찮다. 고령의 노인이 대소변을 못 가려 도움이 필요한 건 당연하다. 하지만 내가 우는 모습을 남들이 보는 건 괜찮지 않다. 특히 내가 대소변을 못 가려 도움이 필요한 건 더욱 괜찮지 않다. 그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이중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은 죽어가면서도 주변 사람을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고 괴로움을 감추고 싶어 한다.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이상으로 자기 죽음이 멋지게 보이길 바란다. 마지막까지도 특별하게 보이길 바라는 것이다. 인간은 참으로 별난 생각이 많은 동물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삶의 마지막 처절한 고통과의 싸움인 죽음이 어찌 멋질 수 있겠는가. 인간의 존엄성이 타고난 가치에 비롯되는 것이지 죽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노화와 질병과 쇠약함은 그 존엄성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인간 생존에 가장 기초적으로 먹고 배설하는 행위를 스스로 처리하지 못하고 돌봄을 받는다 해서 존엄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착각에서 벗어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음을 인정하면서, 도움을 받는다고 나의 가치가 훼손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 몸이지만 자기 결정권을 가지지 못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을.
‘아름다운 죽음’이라는 뜻의 ‘안락사(安樂死, euthanasia)’는 ‘불치의 중병에 걸린 등의 이유로 치료 및 생명 유지가 무의미하다고 판단되는 생물에 대하여 직·간접적 방법으로 생물을 고통 없이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인위적인 행위’를 말한다. 인간에게 적용할 때는 ‘존엄사(尊嚴死, well-dying)’라 하여 여러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한에서 일부 국가에서 합법이고 증가하는 추세다. 안락사와 자살은 다르다. 이미 다양한 자살 방법이 있음에도 안락사가 요구되는 이유는 죽을 권리가 아닌 ‘덜 고통스럽게 죽을 권리’를 보장받기 위함이다.
최선의 치료에도 삶의 질이 나아지지 않는 시한부 환자의 경우, 연명치료로 고통받는 시간을 늘리기보다 가족과 이별의 시간을 가진 후 안락한 임종을 맞이하길 호소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연명보다는 ‘질 높은 삶과 죽음’을 더 높은 가치로 여긴다. 유족들도 연명치료를 힘들어한다. 연명치료로 더 고생만 하게 하고 보낸 것 같아서 죄책감과 후회가 든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오기도 하며 지켜보는 가족의 경제적, 정신적 부담이 크다.
현대에는 단순히 장수하는 것보다 건강 수명과 웰다잉이 중요시되는 추세다. 비약적으로 증가한 기대 수명과 비례해서, 인간은 양적인 단순 수명 연장보다 질적으로 높은 삶과 그 삶의 안락한 죽음을 원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난 이상 누구나 죽는다.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인간의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좋은 일일 수도 있지만 나쁜 일일 수도 있다. 최소한 신체가 건강하고 경제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이 없을 때 오래 살아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임종 환자에게 무익하고 무의미한 경관영양(頸管營養)과 같은 인공영양 치료는 아무 소용이 없다. 병을 치료해 주지 못하고 생명을 연장해 주지도 못한다. 설사 얼마간 연장해 준다 해도, 종착역으로 향해가는 기차를 억지로 잠시 붙잡는 꼴이다. 고통 속에서 몇 시간, 며칠을 더 사는 것보단 고통 없이 죽는 게 낫다.
사실, 죽음은 좋으냐 나쁘냐의 문제는 아니다. 당연히 특정 방식의 좋은 죽음이 있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규정하는 좋은 죽음 방식이 아닌 죽음이라 해서 나쁜 죽음이 아니다. 이러한 정의는 죽음 당사자가 아닌 보통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다. 죽음의 가치와 과정은 온전히 당사자의 몫이며 당사자가 정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다만 죽음이 임박해서 당사자가 그런 결정을 하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에 온전한 정신일 때 미리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다. 당사자 처지에서는 준비된 죽음이 가장 ‘좋은 죽음’, 아니면 ‘적합한 죽음’일 수 있다.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 영적, 개별적인 준비가 된 죽음이다.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 자신의 상황과 신념에 맞게 미리 준비해 둬야 한다. 준비하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먼저 유언장의 작성, 시신의 처리 방법, 죽음 과정에서 조력 여부 등 임종 과정을 죽기 전에 스스로 계획할 수 있다. 나아가 자신이 어떤 가치관으로 살아왔는지 되돌아보고 가족에게 죽음에 대한 자기 생각과 바람을 이야기하고 마음 나누기 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또한 죽음 과정의 조력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필수조건으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적극 검토해 볼 수 있다. 존엄사법 시행에 따라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돼 환자 개인의 결정권이 강화됐다. 건강할 때 의향서를 미리 작성해 제출하면 무의미한 연명치료 대신 통증 완화 치료와 상담 치료를 받음으로써,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고 당하는 죽음이 아닌 맞이하는 죽음이 가능하다. 이렇게 준비했다고 죽음을 통제하여 내가 선택했다고 할 수 없다. 하늘(저승사자)이 나를 선택한 것이다.
아무리 힘겨운 고통 속의 탄생이라도 환희와 축복이지만, 아무리 평온하고 품위 있는 죽음이라도 ‘좋은 죽음’일 수는 없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는 속담과 같이 가보지 못한 미지의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는 얘기.
단 하나~!, 좋은 죽음은 몸과 마음을 통제할 수 있을 때 준비하고 주어진 오늘을 열심히 살아내는 것뿐임을 기억하시길~!
https://brunch.co.kr/@dd05cb7dd85a42c/2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