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태, <고기로 태어나서>
가끔, 내가 씹는 것이 누군가의 살점이라는 사실이 생생해지는 순간이 있다. 아주 찰나의 순간. 맘스터치의 싸이버거를 먹을 때, 친구들과 유명한 콩불고기 집에서 불고기를 집어들 때, 뼈해장국 집에서 고기의 살점을 발라 먹을 때. 무심코, 나는 이것이 한때 '육체'를 가졌던 동물의 살점이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턱을 의식적으로 움직이며 내가 씹고 있는 이것을 삼키려 애쓴다.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곳에서 정제의 과정을 거쳐 내 앞으로 온 이 살점의 존재를 무시하기 위해. 이것은 단순히 음식이며, 내가 이 음식을 먹는 것에 죄의식을 느낄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나는 현재 대학교 3학년으로, 학교에서 제공하는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다. 직접 조리를 하기 어려운 기숙사에서는 자주 배달 음식과 간편 음식을 섭취하게 된다. 때문에 기숙사에서 지내는 동안 고기를 입에 넣는 비율이 그 어느 때보다 증가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는 거의 매일 육류를 먹으며 지낸다. 아침마다 먹는 컵밥에도, 점심에 먹는 라면에도, 저녁에 친구들과 먹는 닭볶음탕에도 육류는 빠지지 않는다. 나의 육체는 다른 누군가의 살점에서 비롯된 단백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나는 그것을 때로는 의식하며, 때로는 의식하지 않으며 지낸다.
<고기로 태어나서>는 그런 내게 '육체'로서 존재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일깨워준 책이다. 내가 입에 넣고 씹고 삼키는 그 모든 고기들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고 어떤 과정을 통해서 내 식탁 앞에 도달했는지를 생생히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 사이에 개입되는 노동과 사회와 고통의 무게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며 내 앞에서 '고기'에 대한 모든 환상을 지워버린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나와 고기 사이에 그 어떤 간격도 남겨놓지 않는 것이다. 450여 페이지를 읽어나가는 동안 작가는 독자인 나의 고개를 똑바로 잡고 현실을 보라고 말한다. 똑바로 보세요. 당신이 소비하는 이 모든 것의 현실을요, 하고 말이다.
<고기로 태어나서>는 저자 '한승태'가 식용 고기를 다루는 농장들에서 직접 일을 체험해 보며 작성한 노동 에세이이다. 이때 저자가 체험한 농장은 각각 돼지, 닭, 개 농장이다. 돼지와 닭은 가장 대표적인 식용 고기라서, 개는 한국만의 특수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판단되어서 선택했다고 저자는 서두에 밝힌다. 이 책은 돼지와 닭과 개가 태어나서 사람에게 길러지고 도축되기까지의 과정을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다. 이 책의 목적에 따라 '고기와 사람 사이의 간격을 줄이기' 위해서다.
그렇기에 이 책은 섬뜩할 정도로 생생하고 잔인할 정도로 꼼꼼한 묘사에서부터 시작한다. 작가는 르포르타주, 혹은 특집 기사와 같은 건조하고 담담한 문체로 농장의 상황을 그려 나간다. 가장 처음 마주한 닭의 모습, 자신이 몰아낸 돼지들의 풍경, 철창 안에 갇혀 컹컹거리는 개들의 울부짖음을. 작가는 이 모든 것을 과장하지 않고 보고서를 작성하듯 적어 내린다. 조금은 사무적인 듯, 그러나 눈앞에 그려질 정도로 현실감 넘치는 묘사는 독자를 박진감 넘치는 노동 세계의 한가운데로 떨어뜨린다. 그리고 기다리게 한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가슴을 졸이게 하면서 말이다. 다음은 바로 그러한 묘사의 대표적인 예시다.
하지만 스톨 안에 갇혀 있는 모돈은 동사가 필요 없는 삶을 산다. 스톨이 허용하는 폭 안에선 ‘뒤도라보다’라는 말도 필요 없다. 모돈이 취할 수 있는 자세는 일어서거나 눕는 것뿐이다. 게다가 모돈은 언제나 임신 중 아니면 출산 중이기 때문에(임신과 출산 역시 내가 짐작조차 해볼 수 없는 종류의 고통이다) 움직이려는 욕구도 현저하게 떨어진다. 모돈은 밥 먹을 때가 아니면 자리에서 일어나는 법이 없는데 (어떤 돼지들은 오줌도 누운 채로 눈다) 그러는 사이 발끝에선 사슴뿔이 자라는 것이다.
- 한승태, <고기로 태어나서>, 208쪽.
긴장감 있는 묘사로 곧 농장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그려나가던 작가는 글의 중반 즈음 이르렀을 때 농장 안에서 생활하는 '개인'들에게로 초점을 옮긴다. 농장에서 '노동'으로 주제 변화가 일어나는 시점이다. 이때쯤 독자는 겨우 한숨을 돌린다. 그러나 휴식은 길지 않다. 이 끔찍한 환경에서도 사람이 산다는 것에 다시 한번 놀라기 때문이다. 작가는 농장이 있기 위해서는 그 농장을 가동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지적한다. 너무나 당연한 명제지만 그래서 너무나 당연하게 잊고 있던 사실. 이 사실을 짚어내며 작가는 고기-육체-노동의 알레고리를 만들어낸다.
규모만큼 직원도 많았는데 평상시에는 열네 명이었고 출하가 있는 날에는 일용직을 여럿 고용했다. 이 중에서 다섯 명이 이주노동자였다. 베트남 출신의 30대 여성이 한 명, 길림이 고향인 중년의 중국인이 한 명, 나머지는 모두 20, 30대 캄보디아 남자들이었다.
- 한승태, <고기로 태어나서>, 47쪽
사람이 모이면 자연스럽게 무리가 구성되기 마련이다. 저자가 체험한 모든 농장은 각각 하나의 작은 사회였다. 그 사회 안에서 벌어지는 사고의 양상은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두드러지는 것이 있다면 바로 외국인 노동자를 바라보는 일관된 혐오와 차별의 시선일 것이다. 작가는 노동하는 사람들이라는 사회에서 만들어지는 위계질서를 가리키면서 가장 아래에 위치한 외국인 노동자들을 향한 혐오와 멸시의 시선을 읽어낸다. 그리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런 위계가 만들어지고 그 위계 안에서 노동자들은 어떻게 행위하는지를 묘사한다. 즉, 노동자를 통해 사회의 축소판을 엿보는 것이다. 그렇게 고기-육체-노동의 알레고리에는 '사회'라는 사슬이 추가된다.
결국 차별은 혐오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완성된다. ‘다른’ 존재에 대한 혐오와 ‘우리 편’에 대한 사랑.
(...)
차별에 구체적인 형태를 제공하는 것은 혐오지만 그것에 끈질긴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은 사랑이다. 게다가 그런 사랑을 통해 얻은 이익을 거절하겠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등의 원칙에 공감하지만 자신이 혜태글 누릴 가능성이 명백한 경우엔 노골적으로 차별을 요구하기도 한다. 문제를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만드는 것도 이런 지점이다.
- 한승태, <고기로 태어나서>, 218쪽
고기-육체-노동-사회로 이어지는 글의 흐름은 작가의 사유로 마지막을 환기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진다. 일반적인 에세이의 패턴이지만 한승태 작가는 이 양상을 조금 뒤틀면서 글을 독특하게 만든다. 바로 윤리적 우월성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분석에 자신의 견해를 더하는 것으로 글을 마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작가는 개농장의 열악한 시설과 노동환경을 지적한 뒤 그것에 대해 윤리적으로 성찰하기보다는 그 안에서 소멸되는 인격을 묘사한다. 다시 말하면 윤리적 우월성을 포기하고, 독자에게 사실을 분석하고 개인적인 성찰을 유도하게 하는 게 작가만의 글쓰기 방식이다. 책의 414쪽의 문장이 바로 그러한 예시를 보여준다.
“나는 이제껏 살면서 뭘 해도 지배를 했지 남의 지배를 받으면서 일한 적은 없는 사람이야.”
(…) 그는 잔인한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그는 다른 존재의 처지에 자신을 대입해 보는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사람이었다. (…) 말하자면 그는 다른 존재의 고통을 상상하는 것에 철저하게 무능했다. 이 농장은 그러한 상상력의 결핍 위에 세워진 궁전이었다.
갑이 을의 처지를 상상하는 것이 힘든 이리라면 인간이 동물의 고통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동물은 특히나 식용 가축은 인간 앞에선 영원불변의 을일 테니 말이다.
- 한승태, <고기로 태어나서>, 414쪽
'저 사람과 나는 달라'라고 선을 긋는 대신 '저 사람은 왜 저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까', 하고 들여다보는 일. 열악한 노동 환경을 조사하고 르포르타주를 쓰다 보면 흔히 저지르게 되는 우월성의 오류를 작가는 성실한 글쓰기로 비껴간다. 작가가 그 누구보다 열심히 성찰하고 생각하며 글을 썼다는 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저 사람은 왜 저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까', '왜 이 농장은 이런 시스템으로 굴러갈 수밖에 없는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면서 에세이는 스스로의 리듬을 만들어간다. 고기-육체-노동-사회-성찰의 알레고리가 진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읽히는 이유다.
이렇게 꼼꼼하게 쓰인 작품인 만큼, 어떤 세대에게 작품이 가장 사랑을 받았을지가 궁금했다. 알라딘에서는 주로 30~50대가, 여성과 남성을 가리지 않고 두루 읽힌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채식에 관심이 있고 사육과 도축 과정에 윤리적인 책임감을 느끼는 이들이 이 책을 읽었으리라고 판단된다. 실제로 후기를 살펴보면 채식에 관심이 있어서 이 책을 찾아보았다가 예상치 못한 현실에 놀라서 더욱 몰입하며 읽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많다.
내가 읽으면서 얻었던 것도 그런 후기와 비슷한 경험이었다. 우선 나는 돼지, 닭, 개농장이라는 장소에 크게 충격을 받았고, 그다음에는 그곳에 처우와 노동환경에 좌절했으며 작가의 성찰을 통해 환경의 개선을 함께 바라게 되었다. 이런 감정의 변화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고, 작가의 사유에 참여하는 것은 기꺼웠다. 그만큼 나는 책을 몰입감 있게 읽었고 작가의 이야기에 동감할 수 있었다.
왜일까?
그 이유로, 나는 앞서 길게 이야기한 알레고리도 있지만 '진실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다. 이 책은 작가가 직접 노동을 겪으면서 습득한 지식들을 풀어낸 책이다. 그 어느 것보다 현실에 밀접하게 닿아 있고, 그렇기에 생동감이 넘칠 수밖에 없다. 생동감이 넘치는 책은 독자들을 흡입력 있게 끌어당긴다. '직접 경험해서 쓴 글'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설득이다.
에세이는 기본적으로 작가가 나름대로 생각한 '진실'을 풀어놓은 책이다. <고기로 태어나서>는 기본적으로 르포르타주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작가의 사유가 적극적으로 개입된다는 점에서 노동에세이이기도 하다. 진실에 다가가는 르포르타주와 작가 나름의 진실에 접근하는 에세이가 효과적으로 결합하면서 이 책은 독특한 형식과 내용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두 가지의 진실이 얽히면서 독자로 하여금 제3의 생각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앞서 말하는 '진실성'의 측면은 그렇게 독자에게 효과적인 독서의 효과를 발휘한다. 의심하고, 궁금해하고, 탐구하고, 분노하는 독서는 이런 진실성에서 시작된다.
개농장을 나아가 공장식 농장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만든 것 역시 ‘의심하지 않음’이 아닌가 싶다.
- 한승태, <고기로 태어나서> 445쪽
아마 오랫동안 나는 이 책을 잊지 못할 것 같다. 이 책 자체가 준 충격감도 어마어마하지만, 이 책에 깃들어 있는 작가의 사유와 경험이 그 자체로 나를 압도해 버렸기 때문이다. 도대체 얼마나 고생하며 썼는지 가늠이 되지 않아서 읽는 내내 힘들었던 책이었다. 이렇게 힘든 독서는 정말 오랜만이라 이 책을 다시 읽으려면 한참의 휴식기를 거쳐야 가능할 것 같다.
그러나 그 어느때보다 치열하게 고기와 육체, 노동과 사회를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기숙사라는 환경에서 살기에 어쩔 수 없이 계속 고기를 섭취하게 되겠지만 그때마다 이 책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고기 한 점에 윤리 한 점. 내 앞에 오기까지의 그 잔인하고도 격렬한 과정을 끊임없이 상기하면서 더 윤리적으로, 동물들에게 삶이 더 가능한 방향을 고민하는 것이 이 책이 내게 남긴 유산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