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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네 Jan 27. 2022

무스타파의 나라에서는 누구도 늙을 수 없다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

   최근 한국 사회는 기술을 통해 장애와 노화를 완전히 제거하기로 마음먹은 것처럼 보인다. 농어를 쓰는 청각장애인에게 목소리를 선사하고, 평생 휠체어에 앉아 지내던 지체장애인에게 의체를 주어 일으켜 세우는 식이다. 지난 10년 간 급속도로 발전한 기술의 현실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누가 2021년에는 유전자조작기술로 태아의 장애를 진단하고, 대대로 내려오는 유전병을 치료하며, 더 나아가서는 mRNA를 이용해 백신까지 만든다고 상상이나 했을까? 이 정도 발전 수준이면 머지않아 지구상의 누구도 아프지 않고, 나이 들지 않고, 죽지 않는 삶이 가능할 것 같다. 모든 지구인들이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미래. 한국 사회는 이러한 미래가 우리의 비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 미래는 이상적인 한편으로 괴상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기술을 통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기술을 통해 장애를 ‘극복’한다는 생각은 테크노에이블리즘에서 비롯된 편견이 아닐까? 우리가 고쳐야 할 것은 무엇이며 이것을 고치게 되었을 때 사회는 어떻게 변화할까? 이 사회가 제시하는 이상향은 무엇이며, 이 이상향은 누구에 의해 설정된 것일까? 만약 젊고 아름다운 모습만이 이상적이라면, 이 이상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어떻게 사회에서 소외될까? 마지막으로, 정말 기술의 최고조의 오르게 되면 우리는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는 걸까?


헉슬리의『멋진 신세계』와 포드주의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바로 이 질문들에 대한 20세기의 답변이다. 인간이 유리병에 담겨 생산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유쾌하면서도 신랄한 어조로 기술만능주의가 정점에 오른 전체주의 국가를 비판하고 있다. 이 사회에서 인간은 가공된 수정란을 원재료로 제작되는 생산물이다. 산소 공급 조절을 통해 계급에 맞는 몸으로 탄생되는 이 생산물들은, 포드주의 체제 아래 각자의 위치에서 주어진 일을 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누구도 이러한 사회 시스템에 의문을 가지지 않는데, 바로 발달한 의료 기술과 환각제 ‘소마’가 사람들이 질문할 기회를 차단하기 때문이다. 생산물로서의 인간, 발달한 의료기술, 환각제 소마. 헉슬리는 이러한 설정을 바탕으로 기술만능주의의 매끄러운 세계를 우리 눈앞에 펼쳐 놓는다.


   어쩐지 꺼림칙하고 불쾌하지만 동시에 이상적이면서 완벽하고, 정말 가능할 것 같은 유토피아. 하지만 이 환상에 금이 가기 시작하는 것은 이 소설의 초점화자 ‘존’이 등장하면서부터다. 아직 유성생식이 이뤄지는 ‘야만 사회’에서 올라온 존과 기술 유토피아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무스타파 총통이 대립하면서, 둘의 충돌은 기술 유토피아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바로 세계국, 기술 유토피아가 개인의 행복을 위장 삼아 기술만능주의의 유지를 위해 개인을 부품처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술 유토피아는 포드주의 없이 체제를 이어가기 힘들다. 기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집약적인 대량생산 방식만큼 기술을 이상화하는 체제가 드물기 때문이다. 기계화된 인간 생산 방식을 찬양하는 소설의 첫 장면을 떠올려보자. 인공 부화기를 통해 난자와 정자가 수정되고, 병 속에 담긴 수정란은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이동하며 산소 조절과 각종 약품 처리를 통해 계급에 맞는 신체와 지능으로 가공된다. 그렇게 생산된 아이들은 여러 교육 과정을 거쳐 해당 계급에 맞은 제품으로 완성되고, 완성된 기계는 자신의 직무에 따라 생산에 도입된다. 그리고 의료기술을 통해 최고의 생산성만을 발휘하다 수명이 다하면 폐기되고 다시 만들어진다. 즉 이 사회에서 인간은 기계와 다를 바 없다. 인간은 포드주의의 최대효율, 대량생산을 위해서 사용되고 폐기되며, 그 빈자리는 곧 새로운 인간으로 대체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기술의 개입이 필연적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포드주의와 기술 유토피아는 절묘하게 결합된다.


멋진 신세계와 포드주의


포드주의의 위험성과 과학지상주의에 대한 21세기의 응답


   세계국(World State)이 소마의 복용을 행복의 전부로 언급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 체제는 결코 자연스럽지 않다. 기계화된 생산라인이 필요하고, 이에 개인이 수긍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기에 이 사회는 개인이 생산과 소비 외의 다른 욕구를 가질 기회를 차단해야 하고, 그 대표적인 방법으로 환각제를 사용하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의료기술이 죽음을 극복하지 못한 게 아니라 극복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다. 사람이 죽지 않으면 생산은 중단된다. 생산 중단은 곧 기술의 무용으로 이어진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생산효율을 위해 영원히 젊어야 하지만, 결국에는 죽어야 한다. ‘늙음’은 존재할 수 없다. 취약한 인간이란 기술의 무능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니까. 남는 것은 기계화된 신체다. 인간의 존엄은 사라지고 기술 유토피아를 향해 달려가는 기계뿐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보자. 이제 우리는 기술 유토피아의 이상향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으리란 것을 알게 되었다. 기술을 통해 영원한 젊음을, 완벽한 유토피아의 세계를 쟁취하겠다는 기대의 허구성 또한.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기술의 발달을 멈출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기술이 우리에게 주는 편리함이 명백하기 때문이고, 기술을 통해 이동권과 생활권을 획득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올더스 헉슬리 역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답을 주저하는 듯하다. ‘존’이 기술 유토피아와 야만 사회 간의 갈등을 좁히지 못한 채 자살하고 마는 결말이 그 어려움을 드러낸다.


멋진 신세계가 보여주는 과학지상주의의 환상성과 21세기에 던지는 질문


   필자 역시 이에 대한 답을 내놓긴 어렵다. 그럼에도 한 가지 제안하고픈 건, 인간의 노화와 장애를 부정하는 일을 그만두자는 것이다. 영원한 젊음이 상징하는 가치, 완벽한 신체가 표방하는 정상성으로부터 우리는 벗어나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우리의 취약성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가장 나약할 때 인간의 존엄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사회 내에서 생산력을 잃은 생명들을 제거하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우리가 그들을 죽이지 않는 것은 그들이 인간으로서 존엄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가장 취약한 존재를 제거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존엄을 확인한다. 정상성 아래 소외된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릴 수 있게 된다. 천천히 취약해지는 과정을 견디는 것, 세계국에서 삭제된 늙음을 인정하며 기술의 발달과 괴리를 좁혀나가는 것. 그것이 21세기를 사는 필자가, 20세기의 헉슬리에게 건네는 응답이다.





참고자료 :

올더스 헉슬리, 안정효 옮김, <멋진 신세계>, 소암 출판사, 2015.

이미지 출처 :

1) Alem Omerovic on Unsplash

2) Augusto Navarro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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