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념> 피트 데이비스 지음.
어떠한 것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틀' 이 필요하다. 어떤 '틀'로 대상을 바라보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이에 따라 대상에 대한 감상과, 그로부터 얻는 통찰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틀'은 사상일 수도, 철학일 수도, 이론일 수도, 가설일 수도 있다. 책은 세상을 보는 여러 '틀'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하나의 의미를 가지는데, 이 책에서 제시하는 '틀'은 매우 심층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이 심층적인가? 이 책은 반문화를 통해 현 문화를 이해하게 해 준다. 이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차차 설명하겠다.
이 책에서 반문화(counterculture)란 제목인 '전념' 이다.
현 문화는 '무한 탐색 모드' 혹은 '액체 근대' 라고 불린다.
우리는 종교 조직이나 정부, 정당, 기업, 언론, 의료 및 사법 체계, 국가, 이데올로기 등 사실상 거의 모든 주요 기관과 제도를 신뢰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중 어느 하나와 공개적으로 관계를 맺는 일에 거부감을 느낀다. 한편 책, 뉴스, 예능 등의 미디어는 점점 짧아지고 있다. 이는 현대인의 주의 지속 시간이 짧아져서이기도 하지만, 전념하는 지속 시간이 짧아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26-27p)
이들(전념하는 사람들)은 특정한 무언가와 관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거기에 오랜 시간과 노력을 할애함으로써 관계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다. 이를 위해 복도로 연결된 문을 닫고 다른 선택지들을 기꺼이 포기한다. (25p)
일단 저자는 현대 사회를 '무한 탐색 모드' 또는 '액체 근대'라고 정의한다. 현대 사회는 정보와 선택지의 홍수 속에서 최대한 다양한 경험을 통해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회다. 우리는 한 곳에 머물러 있으려고 하지 않으며, 최대한도의 다양성을 탐색한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성을 추구할 '자유'는 이 시대의 중요한 가치다.
하지만 '반문화'의 '전념하는 사람들'은 때로는 다양성을 포기한다.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 그리고 공동체에 헌신한다. 20년 동안 노예 해방 운동을 한 인권운동가, 20년 동안 집 앞 정원을 가꾸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 들을 생각해 보면 편하다.
저자는 '전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무한 탐색 모드'의 중요성도 전혀 간과하지 않는다. 분명 여기에도 장점이 있다. 저자는 '무한 탐색 모드'의 장점 3가지로 융통성, 진짜 자아 찾기, 새로움 을 꼽는다. 우리는 융통성 있게 아니다 싶은 일은 일찍이 포기할 수 있고, 이것저것 다 해보면서 나의 진짜 자아를 찾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경험은 항상 새롭다. 얼마나 좋은가.
"이렇듯 무한 탐색 모드는 적어도 어느 시점까지는 진짜 끝내준다." (52p)
하지만, 뭐든지 과하면 독이 되는 법이다. 이 무한 탐색 모드는 어느 순간부터 독으로 작용할 여지가 있다.
우선 너무 많은 선택지에 방황하게 된다. 결정이 마비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선택 장애'가 있다고 말한다. 많은 선택지 중에 뭘 골라야 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혹시라도 잘못된 것을 고르면 어떡하지. 내가 고른 이거보다 저게 더 괜찮은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고민과, 후회와, '선택 장애'를 달고 살게 되는 것이다.
고립을 낳을 수도 있다. 일명 '아노미' 상태이다. 삶을 조직할 기준이나 법이 없다고 느끼는 것, 즉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못하는 외로움이다. 혹은 '지나치게 쿨한 상태'를 의미한다. 무엇과도 깊은 관계를 가질 수 없는 공허함이다. 다들 이 공허함을 느껴 봤는지 모르겠다. 나는 대학에 입학하고 이 '아노미'를 느낀 것 같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지?' 라는 생각이 들어 무기력해지는 느낌. 무엇을 해도 의미가 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었달까. 아무리 유튜브를 보고, 나가서 친구들을 만나고, 심지어는 공부를 해도 뭔가 의미있다는 느낌이 들지가 않더라. 이런 것도 무한 탐색 모드의 단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혹은, 무한 탐색 모드는 우리의 인생을 그저 '수박 겉핥기' 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무한 탐색 모드는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즐거움을 주지만, '깊이'에서 오는 즐거움을 주지는 못한다. 새로움에서 오는 즐거움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줄어든다. 하지만 깊이에서 오는 즐거움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늘어난다. 시간이 갈수록 두 부류의 삶이 달라지는 것이다. 한쪽은 점점 지루해지지만, 한쪽은 점점 즐거워진다. 책에 '깊이'와 관련된 인상 깊은 구절이 있다.
"전념하기의 핵심은 시간을 통제하는 것에 있다. 죽음은 삶의 길이를 통제한다. 그러나 삶의 깊이를 통제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전념하기는 우리에게 주어진 한정적인 시간을 인정하는 대신, 제한 없는 깊이를 추구하겠다는 결정이다." (41p)
이와 같이 무한 탐색 모드는 즐겁지만, 우리의 삶을 피상적으로 만든다. 알게모르게 현대사회가 주는 피상적임, 공허함 등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면, 이 책은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것이다. 현대 사회를 이해하는 하나의 깔끔한 '틀'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분명히 나에게는 수많은 선택지가 주어졌고, 세상도 훨씬 자유로워졌다. 나는 무엇이든 할 자유가 있다! 하지만, 알게모르게 스며드는 공허함과 무기력, 아노미가 그 이면에 있다. 우리에게는 자유가 주어졌지만, 자유에는 책임과 후회가 따르며, 이는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동시에 스트레스와 고단함도 안겨 준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무한 탐색 모드'를 지속한다면 즐거움은 더더욱 얕아지며 삶은 점점 피상적이게 된다는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저자는 '전념'을 제시한다. 이는 정확히 현문화의 요구에 반대되는 것이다. 현재 문화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탐색할 것을 요구하지만, 전념하기의 반문화는 그 정반대다. 하나에 깊이 전념해라, 그것이 전념하기 반문화의 핵심이다. 지금 당장 전념하지 않아도 된다. '무한 탐색 모드'에서 오는 자유의 즐거움을 충분히 즐기다가, 공허함이 밀려올 즈음부터 전념하기를 시작해도 늦지 않다. 참 이상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문제가 있다. 세상에는 우리의 '전념'을 막는 두려움들이 존재한다. 저자는 이 '두려움'으로 3가지를 제시한다. 후회에 대한 두려움, 유대에 대한 두려움, 고립에 대한 두려움 이 그것이다.
'혹시 전념할 다른 더 좋은 선택지가 있었으면 어떡하지?' 처럼 후회할까봐, 무언가와 깊은 관계를 맺음으로서 나의 정체성, 평판, 통제감이 위협받을까봐, 혹은 전념 때문에 무언가 다른 새로운 기회를 놓치지는 않았을까 전전긍긍할까봐, 사람들은 전념하는 데 망설일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이 불안감들을 하나씩 해소해 주려고 한다. 구체적인 부분은 책을 읽어 보기를 바란다. 어쨌든, 깊이는 새로운 즐거움을 주고, 전념과 헌신은 공동체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그에 상응하는 가치를 부여한다. 사람들은 영웅이 되고 싶어하지만, 현실에서 진정한 영웅은 순간의 희생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 오랜 시간 한 가지에 전념할 때 등장한다. 여기까지가 2장까지의 내용이다.
3장은 정말 기가 막혔다. <액체 세계 속 고체 인간>. 현문화인 '액체 세계와' 그에 대항하는 반문화의 '고체 인간'을 비교한다. 나는 이 단원에서 정말 밑줄과 표시를 많이 했다.
우리는 자판기를 소유할 수 없지만, 음료를 선택할 수는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시스템을 설계하는 데에 직접 참여할 수 없지만, 여러 선택지 중에서 고를 수는 있다. 그리고 그 사실에 그럭저럭 만족하며 살아간다. 마이클 샌델의 말처럼 과거의 우리에게 자유는 "시민으로서 우리의 집단적인 밀도를 다스리는 힘을 형성하는 능력"을 갖는 것이었으나, 지금은 "접근할 수 없는 익명의 관료체제가 제공하는 선택지 중에서 원하는 것을 고르는 능력"으로 그 의미가 바뀌었다. (245p)
매우 생생하고 와닿는 비유다. 우후죽순 생겨나는 플랫폼 기업들만 생각해 봐도 그렇다. 그들은 자판기를 소유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자판기의 음료를 선택할 수는 있다. 분명 자유가 주어졌고 선택지가 늘어났지만, 플랫폼 '내부에서의' 자유가 아닌가? 진정한 자유와 전념은 우리에게 선택지를 제공해주는 틀 자체를 깰 때 누릴 수 있는 게 아닐가.
여전히 우리는 생산 대신에 소비를, 관계 형성 대신에 선택을, 헌신 대신에 탐색만 하게 하는 힘에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 (246p)
그래서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도덕적 조언을 할 때마다 "물론 모든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할 권리가 있으니 내가 너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냥 내 생각엔 이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라는 말로 시작해야 한다고 느낀다. 또는, 규범 준수를 요구했다가 보수적이고 고리타분한 '꼰대'라는 비난을 듣게 될까 봐 아예 입을 다무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물론 이러한 종류의 책임 의식이 억압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252p)
이 부분은 현대 사회의 딜레마 같기도 하다. 누군가에게 어떠한 도덕적 조언을 하기 곤란한 상태. 여기서 말하는 도덕적 조언은 '자기 생각을 강요하는 것' 이 아니라, 그냥 권고 정도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너에게 이런 문제점이 있는 것 같은데, 이렇게 고쳐 보면 어떻겠니?" 라는 식의 조언을 한다고 상상해 보자. '어쩌라고', '니가 뭔데', '신경 끄세요' 식의 답변이 돌아올 것만 같지 않은가(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건 아니고, 사회 분위기가 이렇지 않냐는 것이다) 어쨌든 이런 권고는, 잘 살고 있는 나를 자극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어찌 보면 도움되는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도덕적 조언이 힘든 사회 분위기는 긍정적이기만 한 것 같지는 않다. 혹시 이런 주장이 약간 불편하다면 추가적인 설명이 있다.
"각자의 도덕적 선택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각자가 가진다" 라는 것과 "타인의 도덕적 선택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하면 안 된다." 라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선택지 열어두기 문화에서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유효한 것이 좋다. 도덕성에 관한 생각을 공유하는 것은 선택지의 최대화를 저해하기 때문이다. (253p)
이 책의 큰 장점이다. 공동체에 헌신할 것을 요구하지만 개인의 자유를 간과하지도 않는다. 이런 태도는 '무한 탐색 모드' 에 익숙해진 우리를 살살 설득해서 저자의 말에 귀기울이게 만든다.
그러나 사람들이 전념하기를 점점 더 거부하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가치에 따라 자유롭게 살아야 하는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기관들도 구성원들에게 공통된 도덕적 기준이나 요건을 요구할 생각을 포기했다. 그리고 도덕성 대신에 중립을 채워 넣었다. 그러면 기관의 초점이 '특정 사명을 위해 나아가는 것'에서 '효율성을 촉진하는 것'으로 바뀐다. (254p)
현대의 '중립'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이 아닌가. '무한 탐색 모드' 의 도래에 따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 에 대한 제시는 위험해졌다. 누군가의 자유를 침해할 여지가 있으니까. 물론 이는 우리의 선택지를 열어 주고 자유를 보장한다는 이점이 있다. 하지만 공동체의 규범이나 방향은 잃을 것이다. '공동체의 규범' 이나 '무엇을 해야 한다' 이런 말에 약간의 반발심이 생긴다면 (이 책을 읽기 전 내가 그랬다) 한번 이 책을 읽어봐라. 이 책은 공동체의 중요성을 역설하지만, 개인의 자유를 보장해야 함을 충분히 인정한다. 다만 지나친 자유 추구에서 오는 공허함, 그것을 '공동체에 대한 헌신' 으로 채울 수 있음을 매우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 때문이다. 자유와 공동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도 좋은 책이다.
단기적으로만 생각하면 우리는 삶이 편하고 쉽길 바란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명예를 얻을 기회를 갈망한다. (265p)
정말 그런 것 같다. 내가 도공이라고, 화가 지망생이라고, 드럼 연주자라고 생각해 보자. 지금 당장 스승님에게 구박받는 것, 그것은 참 힘들다. 스승이 원망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 <위플래쉬>를 떠올려보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그 피드백으로 인해 훌륭한 장인이 된다면, 사회적으로 명예와 존경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매우 거대한 가치일 것이다. 물론 피드백 방식에 민감한 시대기야 하겠지만 말이다.
어떤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려면 세계의 한구석에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270p)
우리가 어른에게 배움을 얻을 때는 주로 그들을 '신뢰할 수 있는 길잡이'로 여길 때다. 즉, 권위가 아니라 영감과 존경으로 그들을 따르게 될 때다. (274p)
그러니 누군가에게 영감을 주는 어른이 되고 싶다면, 그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의 분야에 헌신하는 전문가가 되고, 그 영감과 지혜를 보고 사람들이 따르는 것 아닐까.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생각하면 안 되는 것처럼 여긴다. 그저 개인적인 발전만이 유일한 목표이자 고민거리인 것 같았다. (282p)
이 구절이 내 머리를 한 대 세게 쳤다. 아, 이게 문제였구나. 대학에 진학하고 2년 동안 도저히 의욕이 안 났는데, 그냥 내 마음속엔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돈을 엄청 많이 벌면 되지 않겠어?' 정도의 생각만 있었다. 인생의 목적이 뭐지? 하면, 막연하게 '그냥, 돈을 많이 벌고 인정받는 거?' 정도의 생각이었달까. 하지만 이런 믿음이 나를 무기력하게 만든 것 같다. 열심히는 살아야 되는데, 대체 무엇을 위해? '돈을 벌면 인정받을 수 있겠지...' 식의 막연한 믿음은 너무 약했다. 무언가 따라갈 신념이 필요했던 것이다. 아마 모든 사람이 내심 따라갈 신념을 원하고 있지는 않을까.
세상을 이롭게 만들겠다는 신념.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신념. 누군가의 눈에 이는 위선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공동체적 신념의 가치를 느낀다면, 아마 좀 색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생각보다 세상이 충만해지는 느낌. '전념'은 개인의 발전에도 도움이 된다. 현대 사회가 나에게 제공해주지 못한 부분을 스스로 채울 수 있다. 조금 더 완전한 '나'에 다가서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큰 가치가 있다. 현대 사회의 가치를 정면으로 맞서는 '반문화'를 제시함으로써, 우리가 평소에 놓치고 있던 부분을 채워 준다. 숲 안에 있으면 숲을 볼 수 없다. 하지만 현 문화라는 숲에서 나와 반문화라는 헬기를 타고 숲을 보면, 어떤 길로 가야 할지 보일 것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현대 사회를 보는 새로운 '틀'을 제공해 준다.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혹여라도 이 글을 보고 약간의 반발심이 들거나 이 책이 뭔가 '꼰대같은' 책은 아닐까 생각이 된다면, 전혀 그렇지 않음을 알았으면 좋겠다. 300페이지짜리 책을 몇 페이지로 완벽히 전달할 수는 없다. 가장 좋은 것은 책을 직접 읽어보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전념하기 반문화'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면, 아마 새로운 인생이 열릴 수도 있다. 나의 안위를 돌보는 삶에서, 공동체와 대의를 위해 전념하는 삶으로. 이는 분명 고된 길일 수 있겠지만 나의 가치를 드높이는 행위이자, 좀 더 거대한 행복을 찾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다들 한번쯤은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 는 생각이 드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