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를 발행하는 첫번째 글이 되었다. 이게 미리 작성해놓은 글은 아니다. 하지만 첫 글은 조금 풀려 있는 글을 쓰려고 한다. 왜냐하면 여태 내가 글쓰기에 대해 장벽을 쌓게 만든 최신 문제들을 회고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글을 조금 정돈된 형태로 올림으로써 점점 정성들여 잘 닦인, 더 잘 정돈된 글을 업로드하였으면 좋겠기 때문이다. 글은 쓰는 사람의 마음조차 조잡하게 만드는 사사로운 구멍이 많이 생기지만, 그 구멍의 유형을 분석하여 알아두면 쓰기가 더 쉬워진다. 그런 의미에서 첫 발행은 글쓰기에 거슬리는 문제를 자유롭게 얘기해보도록 하겠다.
브런치 작가 신청 이전에 저장만 해놓은 글이 세 개 있지만, 그 중 하나를 첫 발행으로 발행하지는 않는다. 발행을 고려해보긴 커녕 곱씹어 읽지도 않았다. 이건 최근에 내게 생긴 나쁜 습관이다. 이 습관은 이전의 나랑은 상반된다. 난 원래 내가 적었던 글을 다시 읽고 곱씹기를 즐겼다. 그러나 이젠 최근에 쓴 글을 잘 읽지 않고 싶어졌다. 몇 년 전에 써둔 글은 멀쩡히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 쓴 글에 손이 가지는 않는다. 그 원인을 살펴보자면, 글이 점점 조잡해졌기 때문인 것 같다. 어느 내용이 되었든 그 글을 쓸 당시에 적어도 두세번 검토하지 않고, 누구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후루룩 훑어보고 던지듯 끝내버리는 글은 나중에도 결코 읽지 않게 된다. 최근의 글들이 그랬다. 내가 쓰는 글이 짜임새 있게 정돈되었다기 보다는 한 맥을 유지하지 못하고 이리저리로 튀어나가 돌아오지 못하고 종결나는 일이 잦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게 종결이 아닌 실패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이따금 튀더라도 돌아오면 된다. 그러나 그것들의 문제는 튀고 나서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쓰기에 사용되는 뇌 기능이 아직 덜 회복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였다.
기능을 대폭 상실하기 이전에 난 원칙을 준수하기 보다는 감각적으로 글을 완성해 나갔을 것이다. 그저, '이건 아닌 것 같다'라는 감각이 든다면 '이게 맞는 것 같다'의 형태로 다듬었을 뿐인 것이다. 그게 자세히 어떤 것이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야 했겠지만, 그 기준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았다. 따로 기록해두지 않아도 기본 베이스로 살아 움직이는 감각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기준을 되찾았다는 입장에서 그 감회가 새롭다. 글쓰기의 기준이란 읽는 사람을 위할 뿐만 아니라 쓰는 입장 역시도 편리하게 해준다는 걸 알았다. 아니, 편리를 넘어서, 쓰는 걸 가능케 해준다. 기능의 회복과 기준과의 재회는 조용히 차근차근 다가온 것 같다. 되찾은 듯한 하루 하루가 있지만, 글쓰기의 즐거움은 아직 온전히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와중에도 글은 써보려고도 하고 읽어보려고도 했다. 왠지 붕 떠있는 듯한 시간이었다. 아직 미흡하지만 몇 가지의 기준을 대어 내용 있는 글을 쓰게 된 지금도 아마 과정에 있을 거라고 본다. 재회와 성장의 시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보통의 글쓰기가 암기된 내용을 기점으로 진행된다고 하면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재미를 찾아 발동되는 글쓰기는 머릿속에서 응축되었던 흐릿한 묶음을 문자화하며 진행된다. 그 흐릿한 묶음은 인위적 암기보다는 내 안에 물 흐르듯 각인된 어떤 경험과 생각들의 결합 또는 뭉치이다. 때문에 그렇게 자연스럽게 써지는 글쓰기는 이미 문자로 나열된 단어나 문장을 기점으로 출발하는 글보다 원체 쉽고 매끄럽다. 생각도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기억에서 흐릿해진 지난 내용 중에 툭 삐져나온 키워드가 있다. 우리는 그 키워드를 보고 '뭐지, 관련된 일이 있었는데...' 하며 흐려진 내용을 떠올리려 할 것이다. 금방 생각난다면 다행이지만, 그 키워드를 유심히 곱씹을 수록 그 이야기는 더 빠르게 미궁 속으로 사라지는 현상을 겪어본 적 있는가? 아마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친구가 한 단어를 내뱉으며 관련된 이야기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할 때, 그걸 듣는 나는 원래 알고 있었음에도 같이 잊어버리는 현상을 종종 겪는데, 이건 나 뿐만 아닌 다른 많은 이들도 현상인 것으로 알기 때문이다. 게슈탈트 붕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이 현상들로부터 꺼내고 싶은 핵심은, 사람의 이야기 보따리가 열리게 하는 영감은 본래 그 묶음 속에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일부 관념이라는 주장이다. 우리가 흔히들 문자나 키워드로부터 그것이 의미하는 것과 관련된 더 많은 것들을 떠올리게 한다고 생각하며, 그런 일이 안 일어나는 것도 아니지만, 문자라는 기표에 담긴 기의란 부지불식간에 흩어져 기표 껍질만 남게 하곤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더 우선이다.
더 많은 것들을 떠올리게 하는 경우에 익숙해져 있다는 건, 매끄럽게 잘 읽히는 글을 많이 읽었음을 근거로 삼을 수 있다. 그럴 경우 그 사람이 읽은 텍스트는 이미지를 곧잘 지시하기 때문이다. 이미지의 연발이 일어나도록, 읽음이 마치 보거나 겪는 듯한 매끄러움을 줄 수록 내용도 쏙쏙 들어온다. 게슈탈트 붕괴가 인지적 피로를 유발하는 문자를 보는 상태에 해당한다면, 매끄러운 읽기 과정은 그의 반대로 인지 상태를 말똥말똥 선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잘 정돈된 글을 제공하는 누군가의 정성 없이는, 텍스트는 기본적으로 껍질이다. 심지어 단어와 같이 어디에든 붙을 수 있는 작은 요소로 쪼개진 텍스트의 경우, 그 자체가 의미를 가지기 보다는 더 긴 문장에 속해 함께 의미를 만드는 기능 역할에 가깝다. 그거 하나로는 이미지 하나를 완성하기도 미약한 것이다. 이런 것은 대개 예시 문장이 어떻느냐에 따라 그것이 기능하여 작동하는 이미지가 휙휙 바뀐다. 언어를 배우는 학습자의 입장에서 그런 단어 하나를 암기하기 위해선 그 단어가 작동하는 예시 문장들을 결합하여 '보통 어떤 때에 쓰이는지'를 느낌적으로 알아야 한다. 이처럼 의미를 이해시키는 매개체라는 차원에서 텍스트가 그 자체로 가지는 힘은 작고 흐릿하다. 이를 보완하여 의미 전달력을 강화하고자 할 수록, 문단의 덩치가 불어져 나가는 것이다. 살을 붙여도 의미 전달이 안 된다면, 불필요한 부분을 수정하거나 잘라내기도 해서 말이다.
그런 고로 글쓰기를 하고자 할 수록, 껍질이 아닌 속을 찾아 나서야 한다. 즉 문자를 물리도록 쳐다보기만 하지 말고 문자가 지시하는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글보다는 오감으로 경험하는 세상이 정신을 번뜩이게 하기 쉬울 지도 모른다. 그러나, 글이 세상의 액기스를 모아 세상을 본 못지 않게 날 번뜩이게 한다면, 실제 세상을 보는 경험과 견줄 만 하다. 실제로 훌륭한 글로 알려졌고 실제로 좋을 텍스트들은, 세상의 액기스를 모아 잘 정돈한 글이거나, 또 세상을 물리도록 쳐다보아서는 느낄 수 없는 의미를 발견하게 하는 창조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글쓰기를 할 때, 이야기 보따리의 입구가 다물리려고 할 때면, 여태 쓴 글의 일부에서 무언갈 꺼내려고 오랫동안 빤히 바라볼 필요 없다. 그럴 수록 지난 글자들의 의미는 빠르게 공허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세상과 연결되는 나 자신을 전체적으로 환기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 어느 순간부터 노트북을 키고 새하얀 화면에 내 글을 채워나가려고 하면, 희게 빛나는 사각형이 날 꽉 동여매어 압박하는 것 같았다. 왜인지 몰라도 이 사각 화면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그건 어쩌면, 처음에 몇 자 적어내린 글자들에게서 이 뒤의 공백을 채울 무언가를 갈취하고 있는, 압박하는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공허와 겨루는 나 자신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그러한 나 자신이 생기면 필히 그 사람으로부터 도망치려는 내 또한 생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글쓰기에 대한 회고는 추가할 내용이 더 생길 것 같아, 이 발행을 첫화로 앞으로 더 이어나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