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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동 Apr 10. 2022

내가 사랑했던 건 언젠가 날 울게 만들어

<루이스 웨인 : 사랑을 그린 고양이 화가>, 스포일러 없이 추천합니다!


아마 이번 생은 역시 틀려먹었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운명 같은 사랑을 만나 행복하게 사는 그런 것 말이다. 지금 내가 있는 카페도 아마 커플 두 분이 운영하는 곳인 거 같다. 앞에서 여자분이 남자분에게 무언가를 보여주는 모습이 기분이 좋았다. 나른한 일요일 오후 12시. 창가 앞에는 사람들이 몇 명 지나가고 있다. 매일 같은 것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 이 카페 사장님처럼 재미(?)를 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취업만 잘하면 즐길 거 다 즐기고 살 수 있겠지만 난 역시 솔로로 태어나서 갈 운명인가 보다 싶다.


난 언제쯤 모두가 사는 세상에 끼어들 수 있을까? 청승맞은 주책을 부리며 노트북을 켜 글을 쓴다. 확실히 세상은 아름다운 게 맞는 것 같은데 말이지. 어떤 부침이 있어도 다들 잘 사는 거 보면 이 세상 60억 인구 모두가 행운아다. 전 세계 어디를 가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만 봐도 사람이라는 존재는 여러모로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사람 덕분에 우리가 외롭지 않은 거고 공감하며 행복한 게 아닐까 싶다. 내가 앉아있는 카페 창으로 보이는 저 귀여운 캐릭터도 역시 사람이 그렸으니 일상의 자그마한 귀여움과 즐거움도 다 그들 덕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렇게 뭔가를 창작하거나 그리는 일은 사람들과 소통한다는 점에서 참 다행인 것 같다. 마음속에서 대화하고 싶은 사람이 없을 때 이렇게 글을 쓰면 여러모로 효과가 좋았다. 되게 별 것 아닌 거 같지만 뭔가를 표현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에겐 이거 되게 중요하다. 이렇게 살지 못하면 외로워지기 때문이다. 19세기 영국에 내면의 아픔을 그림으로 표현했던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극도로 우울한 현실 속에서 내면의 밝음을 표현하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운명적인 로맨스를 기다려 온 한 화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딱 봐도 그림 잘 그리게 생긴 사람


루이스 웨인은 그냥 화가다. '그냥 화가다'라는 문장이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다. 왜냐하면 그는 그림 빼고는 모든 게 서투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화가다. 잘생긴 것도 아니고, 말을 청산유수로 줄줄줄 하는 게 아니라서 그림 빼고는 사실 사람들의 기억에 잘 박히지 않는 인물이기도 하다.

근데 이 말은 즉슨 그림 하나는 귀엽게 잘 그린다는 뜻도 된다. 친구도 없고 애인은 당연하며 가족과도 사이가 그렇게까진 좋지 않았던 루이스. 갑자기 가족을 부양해야 할 사정이 되자 부랴부랴 일을 구하기 시작한다. 근데 루이스에게는 과제 하나가 더 있다. 바쁘게 살아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없겠지? 조카들을 돌볼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로 치면 양반쯤 됐던 루이스. 어렵지 않게 가정교사 한 명을 구하게 된다.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였지만 대화가 잘 통하는 것 같다. 둘은 서로에게 사랑에 빠지게 되고, 이내 결혼 이야기까지 오고 가는 관계가 된다. 세상의 따가운 시선이나 남매들의 압박이 있었지만 루이스 웨인은 아내와 함께하는 장밋빛 미래를 꿈꾼다. 영화는 이 루이스가 그려왔던 미래를 소재로 삼은 영화다. 이 인물이 어떤 상황을 겪어 행복감을 느꼈고, 그 행복감이 어떻게 그의 삶에 영향을 끼쳤는지를 조명한다.



사랑을 그리면서 우울함은 글로


이 영화를 보지 않으면 '귀여운 고양이들이 나오는 로코물'로 생각하기 쉽다. 그도 그럴 것이 포스터 색감이 세상 밝으며 '사랑을 그린 고양이 화가'라는 부제까지 있으니 그 생각이 막 뚱딴지같은 추론은 아닌 셈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실제 내용을 까 보면 완벽히 다르다. 영화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상실이다. 주인공 루이스 웨인은 한 데 머무르지 못하고 부유하는 인간이다. 뚜렷한 친구가 있었나? 그건 아니다. 영화 전체적으로 아내를 제외하고 루이스가 마음을 여는 사람은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윽박지르기만 하는 여동생들이나. 노쇠해진 어머니를 보면 '이 사람이 가족에게도 위안받지 못했던 부분이 있다'라고 이해하기 충분하다. 또 이 사람은 영악하지는 못했다. 자기 걸 잘 챙겼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해서 일상 속에서 페널티를 겪는 묘사가 몇 번 나온다. 이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안 그래도  정신이 나갈 것 같은 현실에 주인공 루이스가 겪는 장애물들이 몇 개 더 있다. 영화는 이 굴곡진 루이스의 삶을 보여준다. 아마 여러분이 이 작품을 보기 전에 '아마 이럴 거야'라고 생각한 것 이상으로 떨어진다고 예상해 본다. 그러나 이렇게 아래로 수직 낙하하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엔딩부에서는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카타르시스가 있다.


사진에는 전기가 없지만


영화 안에 루이스가 실제로 대사를 치는 부분이 있다. '사진에는 전기가 없다!'라는 말이다. 사진은 플래시를 터트려서 기록으로 남기는 매체다. 이 대사의 뜻이 실제 물리학적으로 전기가 있는지 없는지를 따진다는 뜻이 아니다. 이 작품에서의 '전기'는 다른 비유적인 표현으로 쓰이는데 이는 극의 주제의식과도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웨인이 비유한 이 '전기'에 대한 묘사가 괜찮았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찾을 때 짜릿한 느낌이 들곤 한다. 어쩔 땐 '와 이거다' 싶기도 할 것이고, 또 살아있다는 느낌을 준다던가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근데 이 지점을 첫눈에 반한 사람처럼 굉장히 짜릿하고 특별한 순간으로만 연출했다면 좀 과헀을 것 같다. 영화는 이 지점을 피해 간다. 감독이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루이스가 이에 기대는 것에 각본상의 허점이 없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인물 설정, 고압적인 자매들, 자식을 낳지 않았다는 것, 당시의 신분 격차로 인한 사회적 시선까지 불안정한 인물을 만들어내며 관객의 감정이입을 원활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몰입이 잘 되는 영화'라는 뜻이다. 마치 이 작품에서 전기가 통한 루이스 웨인처럼.


날 행복하게 해주는 것을 찾아


영화의 핵심 키워드는 간단하다. 루이스 웨인의 일대기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시점에 관한 작품이다. 그리고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그림의 속성과도 이어진다. 그림은 내가 본 것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 형태가 바뀌는 예술이다. 루이스 웨인은 재수 없는 동물의 상징이었던 고양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해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 아티스트다. 이는 곧 예술가가 자기 적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들릴 수 있으나 난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원인이나 동기부여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다. 물론 그것이 중요한 건 여지가 없다. 그러나 고양이가 인물에게 어떤 방식으로 변해왔는지를 눈 딱 뜨고 보다 보면 단순히 한 가지의 의미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인물이 세상에게 건넸던 효과가 아니라,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묘사했다는 뜻이다. 이는 어쩌면 감독이 '네가 하고 싶은 걸 해'식의 동기부여를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고 추론할 수 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아내 에밀리가 하는 대사와도 연결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비극적으로 반복되는 삶에도 아름다운 구석은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그 아름다운 부분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외로웠던 루이스의 삶에서 그림같이 아름다운 몇몇 장면이 있던 이유는 그가 그의 전기를 따라가서 생긴 것들이다. 감독은 극의 주요 분기점마다 그림과 현실을 교차시키는 연출법으로 행복한 루이스의 모습을 기억에 남게 만들어준다.


아카데미 한 지 딱 2주


이 글을 쓰는 시간은 4월 10일이다. 아카데미가 3월 27일이었으니까 정확히 2주 지난 셈이다. 이때 남우주연상은 윌 스미스에게 돌아갔다. 난 <킹 리처드>를 안 봐서 그런가 내심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받았으면 했었다. 아카데미나 칸, 베니스가 뭐 우리 동네 시상식도 아니고 아무 때나 노미네이트 되는 게 아니니까.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아마 또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주요 시상식에 이름을 올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20대부터 70대 노인까지 얼굴에 모든 곡절이 담겨있기는 쉽지 않을 텐데 비주얼적으로도 소화하는 멋진 모습을 선보였다. 또 섬세한 감졍묘사도 기억에 남는다. 극 중에서 반복되는 트라우마나 자매들을 만날 때의 표정 변화 같은 것이 이 인물 내면에 잠겨있는 깊이를 느껴지게 하는 훌륭한 연기였다. 그리고 이 영화의 후반부 하이라이트 신이라고 볼 수 있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서의 연기는 <파워 오브 도그>에서 코디 스핏 맥피와 담배를 피우는 신만큼이나 임팩트가 강했다. 장면의 설정상 배우의 화려한 연기법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데 이 부분을 보면 압도된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그림 같은 영화


영화의 다른 장점으로는 미술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화가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보니 그림이 많이 나온다. 근데 이 그림들이 아무래도 실제 쓰였던 작품들을 갖고 왔을 텐데 루이스 웨인의 입장 변화에 달라지는 것을 잘 사용했다. 또 전반부에 이 극의 하이라이트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이 부분은 엔딩에 다시 한번 반복되는데,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티켓 값 2/3은 한다고 본다. 내가 갔던 파리의 퐁텐 플로가 생각나는 연출이었다. 이 외에도 특정 질환에 대한 묘사가 거슬릴 정도가 아니었다는 것도 이야기해 볼 법하다. 인물이 겪는 고통을 가볍게 쓰지 않고, 또 타인이 보는 시점도 적절히 넣었으며 병세 시각화가 좋아서 기괴하다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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