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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동 Oct 10. 2022

서늘한 미소 뒤에서 바라보는 심연에 관한 공포

<스마일> 스포일러 없는 리뷰

'어두운 날들이여 안녕, 외로운 눈물이여 안녕, 이제는 행복해질 시간이라 생각해' 밴드 자우림의 보컬 김윤아가 노래 가사를 부른다. 신나는 노래. 왠지 모르게 내 마음도 활짝 웃는 것 같다. 사실 어제 좀 늦게 잤다. 내가 좋아하는 맨유의 경기를 보다 늦게 잤다. 아니 사실 그 이전에 책을 한 권 읽고 잤다. 바로 <혐오의 과학>이라는 책이다. 전 세계를 강타한 혐오범죄에 탐구했던 이 책. 450페이지 정도 되는 분량이지만 거의 하루 꼬박 걸려서 다 읽었다. 엥? 이러지 않았는데? 나 그래도 책 일찍 읽는 편이었는데, 갑자기 내용이 너무 어렵게 느껴 저서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했다.


왜 이렇게 됐지? 생각해보면 그동안 책을 읽었다고 스스로 생각해왔기 때문이었다. 깊게 따져보면 그것은 책을 읽은 게 아니라 책을 '단지 본'것에 가깝다. 그것도 영화를 보는 것처럼 집중해서 본 게 아니다. 그냥 시선을 그쪽으로 옮긴 것뿐이다. 왜 그렇게 됐지? 즐거운 하루라고 생각했지만 갑자기 거리에 멈춰 서서 음악을 바꾼다. 바로 들리는 건 자우림의 <샤이닝>이다. 내가 기댈 곳은 어디인가. 룰루랄라 가벼운 발걸음으로 가던 카페가 갑자기 무거워진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갑자기 씁쓸해진다. 내가 견뎌온 삶의 시간들이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만 이것 때문에 가끔 세상이 무서워질 때가 있다. <샤이닝>이 지났다. 바로 나오는 곡은 아이유의 <밤편지>다. 또 느닷없이 드는 생각. 이런 거 생각해서 뭐해? 그냥 그렇게 묻어두는 거지. 다시 컨디션이 좋지도 않지만 안 좋지도 않은 상태로 돌아간다. 인생이 아름다운 이유는 어쨌든 웃을 만한 순간을 주기 때문은 아닐까? 이렇게 왔다갔다 하는 나와 우라를 위해 호러 영화 한 편이 등장했다. 관객을 불러들일 거면 좀 예쁜 웃음이 좋았을 걸, 이 사람들은 너무 기괴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 <스마일>이다.





기괴하게 웃는 사람들


정신건강의학과 주치의 로즈 코터. 그녀는 직업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사회에 무언가를 기여한다는 생각은 로즈의 소중한 동기부여다. 쉬는 날도 없이 일하는 로즈. 여느 날과 다름없이 진료를 보고 있었다. 그녀 앞으로 들어온 환자 한 명이 있었다. 환자의 이름은 로라. 로라는 남들은 볼 수 없지만 자기에게는 보이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 의사의 관점에선 분명한 망상이다. 로라의 상태를 진단하는 로즈. 로라는 크게 화를 내며 난 미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로라가 목격했던 광경을 털어놓는다. 대학원생이었던 로라. 그녀의 담당 교수였던 무뇨즈가 로라를 호출했고, 금세 망치로 자기의 머리를 스스로 가격해서 죽었다고 한다. 죽으면서 건넸던 말은 유언이 아니라 기괴한 웃음뿐이었다고 전하는 로라. 무뇨스 교수의 자살 이후 로라의 눈에만 이상한 웃음이 보인다. 당황하는 로즈. 주치의로서 무언가 피드백을 건네주고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로라가 발작을 일으켰다. 공황까지 오는 것 같다. 더 화들짝 놀라는 로즈. 로라는 발작을 일으키며 “그것이 오고 있어요!”라고 소리 지른다. 갑자기 이 발작을 멈추더니 로즈는 주변에 있는 깨진 조각을 줍는다. 기괴하게 웃는 로라. 곧 로라는 깨진 조각으로 스스로 목을 그어 목숨을 끊는다.


충격적인 상황. 정신과 주치의라고 해서 특별하게 멘탈이 강한 건 아니다.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로즈. 정신적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녀에게 계속 찝찝하게 머리에 남는 건 로라가 죽기 전에 로즈에게 했던 말이다. “무뇨스 교수는 자살하기 전에 기괴하게 미소를 지었어요!”라는 말이 비단 자기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다음 날. 로즈는 지나가다가 환자 한 명이 이상하게 웃는 모습을 목격한다. 환자 칼에게 다가가는 로즈. 칼은 로즈에게 다가가자마자 “넌 죽게 될 거야!”라고 소리친다. 화들짝 놀라는 로즈. 정작 칼은 계속 수면 상태였다. 이때 겪은 일을 상관에게 말하는 로즈. 상관은 로즈에게 일주일 동안 잠깐 쉬고 오라고 말한다. 그 때만 해도 잘 몰랐다. 로즈는  큰 구멍을 파고 있었다는 걸.


호러 만세


영화의 톤은 흑백이었다. 주인공은 남자 둘. 남자 둘은 등대에서 일하고 있다. 두 남자는 따뜻한 성격을 가지지 않았다. 내내 까칠한 두 남자. 어떤 남자는 자기 이름도 거짓으로 둘러댔다. 나이 든 남자는 내내 젊은 남자에게 극언을 내뱉는다. 아무도 없는 등대와 해안가. 상사인 것처럼 구는 중년의 남자와 많은 일에 젊은 사람은 학을 떼고 있다. 이렇게 불안한 자의식이 점점 깊어질 때쯤 젊은 남자의 눈에 인어의 시체가 보인다. 분명히 과거에 전해 듣기로는 '인어의 시체를 목격하는 것은 그 광경을 본 자가 미쳐가고 있다는 뜻'이라고 했었다. 미쳐가고 있는 것인가. 나를 침잠하는 바닷가와 서서히 조여 오는 사운드에 젊은 남자는 정신을 잃어간다. 앞에서 소재로 쓴 영화는 <라이트하우스>다. 이 영화가 대중적으로 잘 통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찾아보진 않았지만 분명히 신화에서도 레퍼런스가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가 끝까지 봐야 이해가 용이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영화를 깊게 파지 않은 분들이라면 도중에 하차할 확률이 굉장히 높다. 그렇게 큰 호불호가 갈리는 영화지만 나는 이 <라이트하우스>가 또 하나의 마스터피스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사운드와 흑백 연출로 서서히 돌아버리는 인물의 처지를 깊게 잘 묘사했다. 러닝타임을 보면서 내내 돌아버릴 것 같은 기분 때문에 극의 끝까지 잘 볼 수 있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우리나라에 <곡성>이란 영화가 이미 있었다. 그렇지만 <라이트하우스> 역시 신선했다고 생각한다. <곡성>과 비슷하게 인물을 서서히 옥죄는 연출을 보다 새롭게 접근했다. '얼마나 끔찍할까'의 공포가 아닌 '내가 처한 상황이 답도 희망도 없다'라는 두려움을 영화 전반을 이끄는 정서로 선택한 것이다. <곡성>이 2016년이고 <라이트하우스>가 2019년이니 이 두 영화는 꽤나 신선했다고 볼 수 있다. <쏘우> 시리즈를 위시로 한 슬래셔 무비나 <살인 소설>에서 봤던 '갑툭튀' 형 점프 스퀘어를 넘어 두려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호러는 이렇게 점점 더 한 발자국씩 나아가고 있는 듯하다. 장르에서 조금씩 빈틀어서 더 새로운 결과물이 계속 나오기 때문이다.


이 <스마일>은 이런 관점에서 신선하다. 일단 우리는 배트맨의 호적수 '조커'를 알고 있다. 찢어진 입으로 기괴한 웃음을 내뱉는 조커. 히스 레저와 호아킨 피닉스의 명연기로 전 세계 관객들에게 임팩트를 한 방 먹였다. 또 어렸을 때 '빨간 마스크' 한번쯤 다들 들어봤잖아? 이렇게 웃는 모습으로 기괴함을 연출하는 방식은 잘 생각해보면 사실 몇 번 봤었다. 또 <트루스 오어 데어>라는 영화가 이미 개봉했었다고 한다. 이 영화가 신선한 이유가 단지 웃음 때문에? 아니다. 영화의 핵심 소재와 웃음이 갖는 관련성이 탁월하기 때문에 신선하다. 일단 이 웃음과 영화의 주요 소재는 끊임없이 대비된다. 극에서 웃는 얼굴의 모습이 '아예 고통이 없음'을 암시하는 장면도 있다. 이는 왜 이 스마일이라는 소재가 양면적인 측면을 가질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설명이 된다. 핵심 소재를 결국 넘어서야 '스마일'로 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내면의 무언가를 담아내지 못하면 결국 불안한 자의식 속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현대사회의 그림자는 영화 전부를 관통하며 호러 분위기를 연출한다. '스마일'이라는 제목과 포스터를 보러 갔다가 더 깊숙한 내면의 심연을 맞이하게 되는 셈이다.


익숙한 맛으로


소재에 대한 접근은 신선했지만 다른 측면에서 기존 영화들과 비슷하다고 느낄 수 있는 지점도 있다. 바로 이미지 사용법이다. 이 영화는 이미지 사용을 잘했다. 일단 포스터부터 볼 수 있는 기괴한 미소는 누구 아이디어인지 궁금하다. 세상에서 가장 께름칙한 미소를 가져다가 포스터에 박았다. 이 웃는 얼굴은 영화 끝까지 반복해서 나타난다. 관객들은 이 기괴한 미소에 1차적으로 적응한다. 으. 저거 기분 나쁘게 웃네. 그런데 여기다 기름을 붓는다. 바로 미술을 활용했던 방식이다. 극은 여러모로 잔인하게 소품을 잘 활용한다. 자기가 직접 날카로운 걸 갖고 목을 긋는 건 기본이다. 직접 자기 머리 가죽을 벗기기도 하고, 식칼 비슷한 걸로 사람 몸을 푹푹 찌르기도 한다. 또 중후반부쯤에 굉장히 잔인하게 피살당한 인물의 사진이 나온다. 이런 고어 묘사가 영화에서 가볍게 휙 쓰이지 않았다는 것은 이 작품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처음 로라의 자살부터 감정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엔딩 직전 시퀀스에서 해소시키는 방식이 인상 깊었다. 영화가 두렵다가도 주제와 맞닿아 있으니 경제적으로 잘 썼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또 이 감독의 연출 방식은 사운드 구성에도 강점이 있다. 봤던 소재를 중반부까지 이끄는 건 음향의 힘이 다 했다. 사실 이런저런 영화를 봤던 글쓴이의 입장에서는 이 영화의 초반부 전개가 익숙할 수밖에 없다. 앞에서 쓴 <곡성> <유전> <라이트하우스>를 살짝 비튼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는 기존의 것들과 차이점을 부여하며 초장부터 빠른 템포로 관객을 시종일관 제압한다. 예를 들어 칼이 로즈에게 '넌 결국 죽게 될 거야!'라고 소리 지르는 신이 있다. 목소리 톤을 일부러 그렇게 연출한 듯싶다. 살짝 얼빠진 것 같지만 오히려 그것이 서늘한 경고가 될 때가 있다. 영화는 이 지점을 기가 막히게 캐치해서 표현한다. 또 지지징하는 효과음도 어느 장면에서 기괴해야 하고 그렇지 않아야 하는지 정확히 이해한 채로 잘 들어갔다. 우리가 어떤 밴드의 음악을 듣는다고 가정해보자. 밴드 합주를 하는데 드럼이 압도적으로 못하면 티가 날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다르다. 영화는 이야기에 딱 달라붙은 상태로 소리를 묘사한다. 작게 "로...즈"하는 속삭임도, 로즈의 눈에 타인의 기괴한 미소가 보일 때도 사운드에 변박을 주며 충분한 호러 분위기를 조성한다. 올해 <탑건 : 메버릭>이 거의 800만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하며 대박을 쳤다. 이 영화의 강점으로 많은 분들이 음향을 뽑는 것으로 알고 있다. 부르릉하는 비행기 소리를 사실적으로 구현하는 것이 그렇게 쉬울 것 같진 않다. 영화는 이와 다른 측면에서 강점을 내비친다. 아마 이 영화의 음향 효과가 기억이 안 나실 수도 있다. 아마 이 영화의 음향이 관객을 내내 붙잡고 집중하게 만들 테니까.


별개로 영화에서 강점으로 작용했던 건 캐릭터 설정이다. 우선 영화에는 로즈의 전남친과 현남친이 나온다. 여기서 현남친 캐릭터 설정이 좋았다. 우선 <유전>을 이야기할 수 있다. <유전> 거의 단점이 없다시피 한 영화지만 의문점이 드는 부분이 있다. 바로 아내 애니가 그렇게 미쳐가고, 아들을 하대하고 있는데 남편이 너무 조용하다는 것이다. 또 스콧 데릭슨의 <살인 소설>에서도 그냥 좀 조용히 신경 끄고 살지 왜 사서 고생을 만드는가? 에 대해서도 궁금했다. 글쓴이가 호러에 식견이 그렇게 넓은 것 같진 않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현남친 캐릭터는 확실히 클리셰를 벗어난 느낌이다. 앞의 두 영화 <유전> <살인 소설>과는 다르다. 아무리 사랑하는 여자친구라도 다 받아주는 건 너무 극적 장치라고 생각했다. 이를 비틀듯이 영화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인물을 묘사한다. 이 현남친 캐릭터와 비슷한 맥락을 하는 것이 상담사와 전남친 캐릭터다. 전자는 현남친과 비슷하게 적절하게 사용됐지만 후자는 엔딩부에서 살짝 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튼 두 인물이 영화를 이끌고 가는 데는 큰 무리가 없을 정도로 이야기가 좀 더 매끄럽게 물 흐르듯이 진행됐다. 이미지만큼이나 캐릭터를 잡았던 감독의 수가 돋보인다.



아쉬운 것도 있어


그렇게 연출가의 강점도 들어가고 주인공 소시 베이컨의 열연도 느껴지지만 단점은 당연히 있다. 바로 점프 케어다.  연출 방식 전부가 무의미하게 들어가지는 않았다. 가령 예고에서도 나오는 분홍색 여자가 니트를 입고 창을 똑똑 두드리는 장면은 점프 스케어가  들어갔다고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끔찍한 이미지들과 함께 시너지를 부분도 군데군데 있다. 그러나 ( 부분도 예고에 나오는 부분이다) 주인공 로즈가 화들짝 놀라서 기절하는 곳이 굳이 유리여야 했는가?  대해서는 살짝 아쉽다. 비슷한 맥락에서 로즈가 헛것을 보는 장면이 여러  제시된다.  헛것을 볼까?  대해 생각해보면 그것의 원인 절반이 '집에 불을 켜지 않아서' 귀결 지을  있다. 이런 식으로 그냥 단순히 관객을 깜짝 놀래키기 위해 점프 케어가 소모적으로 사용됐던  많이 아쉽다. 이게 주요한 순간에 점프 케어가 들어간 것이 아닌 비교적  핵심인 장면에 들어가니까 이질감이  크다. 감독님이 자신이 없으셨나? 이미 충분히 영화  만들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엔딩부의 전개는 좀 아쉽다. 일단 영화를 보면서 중후반부에 방향키를 트는 부분이 있다. 글쓴이는 이 부분까지 이해할 수 있었다. 도입부에 로라가 죽기 전에 했던 대사가 생각나면서, 오히려 이렇게 이야기를 전개한 것이 더 완성도가 높은 각본일 거라고 생각했다. 또 이 방향키를 틈으로서 새롭게 나타나는 인물은 극의 주제적인 측면과도 관련 있다. 이 메시지에 대한 통찰을 보여줬다는 점에서도 이 인물의 등장이 소모성으로 휙 쓰이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오케이. 엔딩까지 가는 빌드업 좋았고. 터트려야 할 데에서 터트렸고. 클리셰 깨기까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극후반부 가장 마지막 시퀀스가 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조악하다고까지 느낀 부분이었다. 뻔한 호러에서 탈피하고 싶었나? 영화의 처음과 끝이 조응하고, 이 '웃는 것'의 속성과도 대응하는 방식은 1절만 하면 됐다. 그런데 굳이 그걸 그런 식으로 비틀었어야 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그 사람은 대체 무슨 잘못을 한 걸까?


결국 지은 미소에 관하여


어느덧 20대 중반을 지나고 나서야 드는 생각이 있다. 바로 어떤 인생이든 나와 그렇게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 같았던 내 유년시이었다. 이것도 충분히 비극적이지만 내가 어림잡지도 못할 정도로 뒤틀린 인생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다. 또 우리의 삶에서 이 영화가 차용한 주요 소재가 왜 인간에게 비극적일 수밖에 없는지 이유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어야 하는 것은 참 외로운 일이다. 그것만큼이나 더 아픈 건 주위 사람들이 그런 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역시 사람에게 참 안타까운 일이다.


영화는 이 지점을 경제적으로 활용하며 폭주한다. 결국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항상 누군가가 필요하다. 행동과학에 '담아내기'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각자의 어린 시절에 크고 작게 다가오는 부침을 '별 것 아니다'라고 버텨주는 것이 '담아내기'의 뜻이다. 우리 모두 불완전하기에 이 '담아내기'가 어느 정도 필요하다. 극은 이런 인간의 불완전성을 내세우며, 모두의 마음속에 진 응어리를 미소로 일깨운다. 내가 만든 세상을 일깨울 것인가, 아니면 영원히 미소 지으며 정신승리한 채로 버틸 것인가? 감독은 굉장히 서늘하고 기괴한 방식으로 여러분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조던 필, 아리 애스터, 로버트 애거스가 현재 호러 영화 기대주 탑 3으로 언급되고 있다. 뒤틀린 판타지/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발상/호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각 감독들의 주요 특징이다. 이 셋 만큼은 아니더라도 '인간 내면에 관해 묻는다'라는 특징을 가진 신성이 등장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추천드린다.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와 함께 극장에서 볼 만한 좋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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