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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동 Dec 10. 2022

제주에서 영화인으로 산다는 것

제주대학교 영화동아리의 두 번째 영화 <상자> 제작에 참여한 후기


역시 영화인. 몇 달 전 누군가가 나에게 단 코멘트다. 영화인? 나 영화인인가? 영화인이라고 하면 영화를 만드는 사람 아닐까?


분명히 작가라는 말을 듣고 싶어서 이 모든 일을 시작했는데 말이다. 뭐에 홀린 듯이 이런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근원은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2004년 즈음이었나. 엄마 손 잡고 갔던 미용실에 씨네21이 있었고, 거기엔 김혜리 기자의 글이 있었다. 글의 소재가 뭐였는지는 거의 20여 년이 지난 지금이라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신선함이라는 감정이다. 글을 쓴다는 건 그런 느낌이구나. 그때 그 재미를 처음 발견했다. 작년 6월. 난 일부러 뭔가 틈새시장을 공략하려고 했던 건 아닌데 어느 정도 원하던 것들이 이뤄지는 모습을 발견했다. <이터널스>와 <파워 오브 도그>를 보고 리뷰를 쓰며 오랫동안 떠나 있던 집에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21개월의 노예 생활에서 찾을 수 있는 내적인 뿌듯함이자 성장 동력이었다.


영화인. 오히려 영화인이라기보다 그냥 글 쓰는 사람 쪽에 가깝지 않았나. 첫 시작은 그냥 뭔가 쓰는 것이 좋아서 그랬다. 그 소재가 영화였을 뿐이다. 영화감상을 '기능적'으로 사용했던 과거의 나. 이제는 2022년의 12월, 한 해의 끝마무리를 지을 때가 왔다. 한 15분 전쯤에 했던 생각. <화이트 노이즈>를 보러 갈까 말까? 이거 보려고 <결혼 이야기>를 봤는데 주말에 안 보고 지나가면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 수요일에 봤던 <더 메뉴>는 너무 좋았어. 새삼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에게 놀란다. 나 이거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시작이 어쨌건 간에 어느덧 나의 삶의 작은 일부라도 차지하고 있구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나의 미천한 재주인 글쓰기. 세상 사람들 중 누군가가 나의 글을 구리다고 욕해도 일생에서 놓을 수 없는 것이 글쓰기였다. 그 글쓰기는 영화라는 소재와 함께 나의 일상 중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원하는 것이 생겼다. 언젠가 나도 <이동진의 시네마 레터>처럼 영화 비평문을 빙자한(?) 에세이를 쓸 수 있겠지. 창작 그러니까 예술하는 사람들은 별반 나와 다르지 않다. 이 세상에 나보다 나은 인간은 사실 지천에 깔렸다. 비단 <본즈 앤 올> 리뷰를 쓰고 다른 글을 찾아본 나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 영화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예술은 전적으로 사람이 하는 일이다. 당연히 모든 영화의 퀄리티가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을 리는 없다(이게 가능한 사람들은 이미 국제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그래서 창작에 무언가를 거는 일은 참 무서운 일이다. 생각보다 더 많은 걸 걸어야 할지도 모르니까. 잘 만든 예술을 창작한다는 것은 거의 로또 1등 당첨에 준하는 일이다. 그거 받아보자고 삶을 걸기엔 잃는 게 많다.


12월 9일, '롯데시네마 제주아라'에서 상영회를 가졌다. 음향 사고가 아쉬웠다.


그런데 이걸 놓을 수 있나. 그건 불가능하다. 이렇게 태어났으면 항상 뭔가를 창작하며 살아야 한다. 세상에 이 사람들이 태어난 이유가 그런 것일 테지. 사실 제주에서 이 목적을 달성하기엔 너무나도 조악하고 열악하다. 제주에서 영화를 찍기엔 영화를 가르치는 전문 인력도 없다. 또 도지사가 누구인지를 막론하고 관객을 배려한 극장을 만든다거나 영화인을 지원해본 적이 과연 몇 번이나 있었나 싶다. 제주를 소재로 한 영화들? 다 패턴이 비슷하다. 최근에 <낮과 달>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타지 사람들이 제주 하면 아는 것들이 그대로 있어서 진부하게 느껴졌다. <인어공주>도, <계춘할망>도 정형화된 공식을 따랐던 게 아쉽다. 닫혀 있는 섬. 여기서 새로운 창작이라고 하는 것은 난이도가 올라갈 수밖에. 점점 이 '영화인'으로서의 발걸음을 자의, 타의 반으로 시작하고 있었던 나는 이런 제주의 환경에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말로만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을 떠들지만 현실적으로는 뭐 아무것도 없는 현실이 야속하기도 했다.


지난 5월부터 영화를 만들거나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 왔다. 이 노예 신분에는 제약이 많다. 남자라면 다들 하는 시기다. 그런데 이 멘트로 이렇게 투정을 감추기는 싫다. 현재 15개월째 되는 시점 심심한 게 많으니까. 그러나 이들 덕에 시간 금방 갔다. 어느 주에 있던 시네마톡에서 웃던 날도, 같이 봤던 <토니 에드만>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다. 혼자 영화를 보던 나. 같이 본다는 것의 의미는 내 생각보다 넓은 품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도 속내를 내비치는 것이 쉽지 않은 나. 여전히 어려운 일이지만 나 혼자 만들어온 세상과 나의 언어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돼서 좋았다. 사실 이런 것 때문에 영화를 봤었는데 말이다. 감상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 내가 느낀 기분을 타인도 느끼길 바라는 것. 세상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것. 나만의 깊이를 사람들에게 거부감 없이 전하는 것. 그게 내가 비평문의 탈을 쓴 에세이를 쓰는 이유였다. 직업정신이 뭐야? 이게 직업정신이지. 물론 나도 작가로서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모른다. 그런데 내 인생의 일부 내지는 전부를 걸어볼 만하다고 느꼈다. 연대의 의미는 그런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알게 해 주는 것.


알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다른 세상으로 나아갔다. 이런 글을 쓰며 듣기만 했던 이야기. 눈앞에서 펼쳐졌다. 시나리오를 쓴다던가 촬영을 한다던가 실질적인 제작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실제 제작비에 나의 돈을 투자하고, 나름 영화 관련한 글을 쓴다는 경험치를 활용해서 이리저리 발품도 팔아봤다. 아예 없는 쪽에 가까운 빈곤한 환경에서 영화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랐다. 그리고 내 목표는 이뤄졌다. 노예 생활 때문에 금전적으로 가난했던 나. 많은 돈을 제작비에 투자하지 못했다. 또 내가 발품 팔았던 것이 얼마나 많은 투자자를 만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영화가 실제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니 의미가 깊었다. 분명 더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할 결과물일지도 모르겠다. 19분의 러닝타임. '너는 그런 글을 써서 보내는 사람이면 이 영화에 대해 뭔가 코멘트를 할 수 있지 않니'나 '딱히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그럴듯한 걸 쓰는 사람'이니 만큼 피드백을 할 수도 있다. 솔직히 불가능 한 건 아니다. 감독이랑 어느 정도 안다? 그거 때문에 안 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그냥 싫을 뿐이다. 어떤 시도는 그 존재만으로도 응원하고 싶다. 또 어쩌면 내가 그리는 삶이 '영화인'일지도 모른다. 이런 나에게 뭔가 의무감처럼 이 존재들에 대해 언급하고 싶어 진다.


단편영화 <상자>는 잃어버린 기억에 관한 영화다. 사진관을 운영하는 주인공. 주인공에겐 '해리성 기억상실증'이라는 병이 있다. 머릿속에 지우개가 들었다.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 주인공은 자취방에 메모지를 빼곡히 적어놓는 것으로 일상을 보내려 한다.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연애도 했었고, 친구도 있다. 그게 전부는 아니었는데.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을 좇아 나 자신을 받아들이고 싶다. 작은 여행 같은 일상. 여행지로 유명한 제주에서 산다는 것은 그런 여행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인공의 도착지는 어디일까. 감독이 이전에 개인 채널에 올린 영상의 톤이 단편영화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던 것이 영화의 최고 장점으로 뽑고 싶다. 또한 영화의 무의식에 기억에 대한 해석, 그러니까 '기억은 그 사람 자체'라는 의미도 어느 정도 담겨 있는 것 같다. 여러분이 억지로 지워서라도 잊고 싶은 '나 자신'은 무엇인가? 생각하며 많이들 봐주시길 바란다. 그리고 (글쓴이 대신) 쓴소리를 하셔도 감독이 잘 알아듣지 않을까 생각한다. 많은 응원과 격려 부탁드린다.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








https://youtu.be/xbAKWpOqFX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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