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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동 Mar 05. 2023

후회뿐인 삶,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고래 한 마리

<더 웨일> 스포일러 없는 리뷰


1

불청객


어딘가 끙끙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길을 지나가고 있는 선교사 토마스. 어느 외진 곳에서 들리는 소리에 문을 열고 들어가 보기로 한다. 뭐지? 집에 들어가 보니 어떤 남자가 낑낑대고 있다. 그러나 이 남자는 어딘가 좀 특별하다. 엄청난 거구의 남자. 어디선가 퀴퀴한 냄새도 나는 것 같다. 남자의 노트북에선 야한 동영상이 나오고 있다. 황급히 닫는 거구의 남자. 거동이 힘들어 보인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황급히 묻는 토마스. 엄청난 몸무게에 앞가림도 힘들어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토마스에게 별 말 하지 않는다. “거기 종이에 써져 있는 몇 문장 보이죠? 그걸 읽어줘요!” 911이 아닌 부탁, 살짝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읽는다. 이게 뭔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에세이 같은 글. “이게 뭐죠?”묻지만 “내가 좋아하는 책의 구절이다”란 답만 할 뿐이다. 읽어준다. 금세 침착해진 거구의 남자. 하지만 토마스가 그곳에 간 이유는 분명하다. 선교사 일을 하는 토마스. "도와드릴까요?" 하지만 어림없다. 곧이어 남자의 간호사가 왔기 때문이다. 간호사의 이름은 리즈. 어렵지 않게 거구의 남자 이름이 찰리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200kg도 넘어가는 체중. 지금 바로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지만 이유가 무엇인지 찰리는 버티고 있다. 리즈의 입에서 병원 타령을 반복하기엔 이제 그녀도 지쳤다. 마지막 경고를 전하는 리즈. 이렇게 돼지 취급받고, 또 그렇게 살아가는 삶을 계속하다간 주말 즈음에 고혈압으로 마지막 날을 맞이할 것 같다. 언제 이렇게 와 버렸나. 끝이 두려운 찰리. 어쩌면 생의 마지막 날을 앞둔 오늘, 이제 마지막 끝마무리를 하려고 한다. 딸 엘리와의 마지막을 앞둔 채로. 


연극 무대같이


영화는 한정된 공간에서 이야기를 이끌고 있다. 주인공 찰리가 272kg의 거구이기 때문에 이 특성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생긴 이야기의 배경은 찰리와 영화를 설명하는 좋은 특성이 된다. 우선 첫 번째. 영화의 핵심인 구원이다. 이 영화에서 찰리가 움직이는 행동은 결국 어떤 것과 은유된다. 이는 공간을 벗어난다는 것과 관련이 있는데, 영화에서 공간적 배경을 설정한 것이 연출 요소 활용한 것이다. 또 인물의 내면을 묘사하는데도 경제적이다. 방구석이 더럽다. 이런 인물의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 공간을 그렇게 설정한 느낌이 좀 있다. 


인물들의 리액션에 집중한 영화의 특성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적절한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이 집의 공간적인 특성이 인물과의 대화에 특화된 곳으로 묘사되는 것 같이 보인다. 문이 많은 방문, 부엌과 거실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 그 거실과 집 입구가 근처에 있다는 것이 장면 연출에 있어 특이점을 가질 수 있는 좋은 연결고리가 되었다. 그리고 영화 전체적으로 묘하게 연극 같은 느낌이 있다. 이는 인물이 음식을 먹을 때마다 느껴지는 거리감과 관련이 있는데, 후반부 폭발하는 에너지를 어느 정도는 제어하기 위함인 것으로 보인다. 연극이 원작인 것을 영화화시킨 결과가 돋보인다.


구원에 관한


영화 전체적으로 반복되는 단어는 '구원'이다. 영화는 여러 구원을 묘사하고 있다. 우선 영화를 보다 보면 러닝타임 내내 드는 생각이 있다. '아니 왜 병원을 안 가지? / 왜 음식을 안 끊지?'라는 생각이다. 이 찰리가 지은 원죄는 굉장히 원초적이다. 그냥 폭식을 끊거나 병원에 가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건 우리 입장에서나 쉬운 말이다. 영화 중 어떤 인물의 입에서 찰리의 위기를 반박하는 것도 그 일부인데, 이를 반영하듯 인물의 욕망이 굉장히 복잡하게 연출된 것이 극에서 하고자 했던 말과 관련이 있다. 사실 영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은 인물의 단면마저도 촘촘하게 묘사되어 있다. 무슨 말이냐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 찰리/리즈/엘리/토마스의 속사정이 후반까지 쭉 나온다. 이 중 대표적으로 찰리의 문제는 영화 모든 내용을 관통하며 이어져 있다(나머지 세 명도 마찬가지). 찰리가 왜 혼자가 되었는가? 와 찰리가 왜 음식을 끊지 못하는가? 는 큰 관련이 있는 셈이다. 이는 곧 영화 후반부에서 전반부의 떡밥을 수거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 모든 행동의 원인과 이유는 간단해서 말은 쉬워 보이지만 이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당연하다. 되돌리기엔 너무 멀리 왔기 때문이다. 이 '너무 멀리 왔다'의 딜레마는 우리 삶 속에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오늘 하는 생각들, 지금 당장 내일 일어나서 안 할 거라고 100% 확신할 수 있을까? 점점 줄어들 순 있어도 완벽하게 싹 낫지는 않을 것이다. 역시 찰리와 같이 어떤 것에 후회하는 일도 지금 당장 내일 없어질 거라는 보장이 없다. 이 깊은 골을 영화는 죽음이라는 소재로 풀어가려고 했던 흔적이 보인다. 영화에서 찰리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 또 리즈가 죽음에 반응하는 방식을 보면 묘한 공통점이 느껴진다. 이 두 사람의 각기 다른 스탠스는 결국 어떤 공통점을 도출한다. 바로 자기 파괴적이라는 속성이다. 자기 파괴적인 태도로 변한 것에 '어?'로 마음이 변해가는 것이 영화의 강점이 된다.


이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어떻게 인물마다 표현하는지가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드는 강점이 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영화의 네 인물이 갖고 있는 모티브는 '그럴 수 있는데 그럴 수가 없다'라는 아이러니다. 이 아이러니를 다른 말로 하면 '타인이 내리는 해결책이 절대 모든 것의 해결방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문장은 영화 최후반부 하이라이트 신 연출이나 전반부 주인공이 늘 갖고 사는 에세이, 토마스라는 인물이 내포하고 있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영화가 '구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 부분 연출이 어떤 분들에게 좀 무책임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이야기의 끝마무리가 모호한 점은 아쉽다. 그러나 영화가 제시하는 구원의 양태는 관객에게 하여금 감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삶이 서려있는 연기


1999년이었다. 한 남자가 할리우드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한다. 건장한 피지컬에 섹시한 이목구비가 매력이었다. 출연 영화는 <미이라> 시리즈. 그전부터 쌓아 올린 인기가 폭발한 것이다. 연기력. 외모. 스타성 모두 다 인정받은 프레이저. 그에게 위기가 들이닥친다. 누군가의 성희롱과 이혼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크게 다가온 건  <미이라> 시리즈에서 일하다 생긴 신체적인 문제다. 무릎 연골을 죄다 수술해야 했던 프레이저. 악재는 한꺼번에 겹쳤다. 사람이 미웠다. 오랫동안 암흑기가 있었다. 2014년 이후 제대로 된 작품이 없었다.


그리고 현재. 브랜든 프레이저는 <이니셰린의 밴시> 콜린 파렐, <앨비스>의 오스틴 버틀러와 함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로 유력하다. 현재 미국 배우조합상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프레이저. BAFTA에서 상을 받은 오스틴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확신하기는 이르다. 그러나 글쓴이는 이 연기가 아카데미를 위시한 여러 시상식에 안성맞춤이었다고 확신한다. 영화에서 봤던 브랜든 프레이저의 연기는 단순히 특수효과를 끼었기 때문에 훌륭한 것이 아니었다. 영화가 품고 있는 딜레마인 자기 파괴라는 속성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것이 중요한지를 잘 알고 보여주는 연기였다. 가령 리즈에게 음식을 달라는 신이 있다. 이 목소리 톤과 시놉시스에 나왔던 "내가 인생에서 잘한 일이 단 하나라도 있단 것을 알아야겠어!"신의 말투는 정말 강약조절에 있어 능수능란한 배우라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한다. 당연히 이 <더 웨일>의 가장 큰 장점이다. 이 사람의 연기 하나만으로도 감정을 이입하고 영화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이디 싱크나 홍 차우의 퍼포먼스도 좋았지만 이 브랜든 프레이저의 연기가 두드러졌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 것 같다. 심지어 폭식 연기도 잘한다. 감독 의도를 잘 살리면서 먹는다. 


뭐 이런 연기를 하는 데 있어 자기의 삶이 투영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 아닐까 싶다. 무의식 중에 이 찰리 캐릭터에 감정이입 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자기와 닮아있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브랜든 프레이저. 이 물아일체는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나도 저렇게 이해 안 되고, 깊은 사람이었지' 하는 생각이 들기 충분하다. 또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고래'라는 키워드에 감정이입하게 도와준다. 영화는 살짝 무책임하기도 하다. 또한 영화의 몇몇 설정은 감독의 전작에서 갖고 온 느낌이 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전하는 카타르시스는 아는 맛임에도 폭발적이다. 이제는 멍하니 앉아있을 때가 아니다. 다시 한번 더 일어서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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