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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동 Apr 14. 2024

존재하지 않는 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해석 감상 등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하라사와라는 작은 산골 마을에 딸과 살고 있는 남자 타쿠미(오미카 히토시)다. 조용히 일 하는 중인 타쿠미. 장작을 열심히 팬다. 톱으로 나무도 자른다. 일하다 담배 한 번 피워준다. 이런 타쿠미에겐 일행이 있다. "타쿠미 상!" 타쿠미에게 다가오는 타쿠미의 친구. 타쿠미는 친구에게 자연물의 많은 것들을 알려주며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눈다. '땅와사비' 하나를 뽑는 타쿠미. 친구에게 "너희 우동집에 이거 넣어서 먹으면 좋을 것"이라고 조언한다. 그렇게 숲 속에서 시간을 보내니 친구가 타쿠미에게 말 한마디를 건넨다. "그런데, 딸 하나(니시카와 료)는요?" 사실 타쿠미는 건망증이 심하다. 하나가 어린이집에서 하원하는 때가 오면 집으로 데려와야 했다. 내 정신 좀 봐! 사랑하는 딸을 데리러 가는 타쿠미. 그러나 친구가 타쿠미에게 말 한마디를 더 건넨다. "오늘 우리 동네에 글램핑을 짓겠다면서 워크숍을 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기 올 거죠?"라고 묻는 친구. 타쿠미는 "간다"라고 답한다. 모든 것이 상류에서 하류로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다. 영화는 서늘하게 이 마을에 일어나는 일들을 비추고, 특별한 결말로 이야기를 마무리짓는다.



이 영화의 결말은 일반적이지 않다. 영화의 느릿느릿한 템포때문에도 그렇고, 인물의 감정선엔 특히 더 그렇다. 영화의 많은 것들은 상황만 몇 개 보여줄 뿐 이 둘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이 덕에 영화가 좀 뭉뚱그려진 채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래서 왜 타쿠미는 타카하시를 죽인 거야? 하나는 어떻게 된 거야? 확실하게 말해주지 않아 의문점만 생긴다. 단순히 줄거리와 결말만 그럴까? 영화의 어떤 장면들은 기이할 정도로 길어서 어느 부분에서 장면이 끊길지 예상이 잘 안 간다. 단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제목만 직관적으로 들어와서 '이 영화가 복잡다단한 인간성을 보여주려고 하는구나!'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 같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 영화가 엔딩에서 타쿠미가 타카하시를 공격하는 일이 영화 내내 반복됐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이를 위해 영화의 몇 키워드에 대해 써 볼 것이다.


첫 번째 키워드는 단절이다. 글쓴이의 시선에 가장 먼저 들어왔던 단절은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다. 이 팬데믹 사태는 영화에서 두 사건에 개입하며 인물 간의 갈등을 드러낸다. 우선 이 영화의 핵심 갈등은 마을의 어느 곳에 글램핑 터를 짓는 것이다. 이 글램핑 터를 짓는 이유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경영이 상대적으로 어려워졌으니 정부에 보조금을 받기 위해'다. 이 공사는 곧 양 측을 갈라놓는 계기가 되어 중반부까지 인물들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방해한다. 또 다른 단절은 의사소통의 단절이다. 워크숍에서 박살이 난 타카하시와 마유즈키. 주민들에게 "사장에게 말하고 오라"라는 피드백을 듣는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 사장과 대화를 시도한다. 하지만 이 의사소통은 무언가 특별하다. 바로 줌(zoom)으로 회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대화 내용 역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갔다고 보기 어렵다. 타카하시와 마유즈키의 상사는 두 사람의 주장을 별로 귀담아 안 듣고 그냥 무작정 "선주민 남자(타쿠미)에게 글램핑 터 부지의 관리인 직을 제의해라"라고 말한다. 이 대화는 방식의 측면에서도 제약이 많은데 내용도 알차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타카하시와 마유즈키 - 둘의 상사 간의 대화가 단절됐다는 것을 단적으로 암시하는 연출이다. 




두 번째로 암시하고 있는 이 영화의 단절은 건망증이다. 타쿠미는 뭐든 잘 잊어버린다. 영화 초반부에 딸 하나를 데리러 가는 것을 잊어버린다. 친구 덕에 그 약속을 떠올린다. 사실 처음 볼 때 이 장면을 그냥 별 것 없다고 넘겼다. 깜빡 잊어버리는 건 그냥 우연 같은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잊어버린다'라는 모티브를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본다면 분명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 영화에서 타쿠미는 앞과 뒤에 일어난 일 중 먼저 발생한 사건을 잊어버리는 건망증을 가지고 있다. 이는 영화가 (후술 하겠지만) 자연의 순리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의미가 특별하다. 타쿠미는 전을 잊어버리고 이후에 일어난 일만 기억했다. 이 결과로 딸 하나를 데려오는 걸 잊어버렸다. 영화가 전에 일어난 일을 잊어버린 자에게 소소한 벌을 내렸다고 볼 수 있고, 역시 타쿠미는 사건의 전부를 오롯이 받아들이지 않아 '단절'을 체화한 캐릭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로 하나를 둘러싼 단절도 이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초반부에 하나는 사슴의 사체(뼈)를 본다. 아빠에게 "얘는 총에 맞았다"는 말을 들은 하나. 이 하나는 연이어서 사슴을 목격한다. 초반에 사슴이 죽은 걸 봤다. 그다음 장면은 사슴이 살아있는 장면이었다. 그다음의 다음 장면은 하나가 사슴에게 공격당한 뒤의 장면이다. 이 장면들이 시간 순서대로 읽어도 큰 문제는 없지만 글쓴이가 영화를 두 번째 볼 때는 '두 번째 장면이 진짜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어느 순간부터 혼자 다니는 모습만 나온다. 이야기를 이끄는 동력도 뭣도 없는 채 신화의 한 장면 같은 장소를 돌아다닌다. 하나가 공격당했다는 묘사가 있을 리가 없다. 엔딩에서 코피 흘리는 하나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신기루 같은 하나의 행보를 더 신비롭게 만드는 장면이 있다. 소파에서 잠을 자는 하나. 카메라는 아버지 타쿠미가 하나를 업고 어디론가 가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 장면이 끝나면 다시 하나가 소파에서 잠을 자고 있다. 과연 뭐가 진짜일까? 어떤 장면이 영화의 메인 플롯인지는 하마구치 류스케도 모를 것 같지만 우리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하나와 관련된 몇 장면들은 순리를 벗어나는 연출에 근거해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하나는 "숲 깊은 곳에 들어가면 사슴에게 공격당할 수 있어"라는 경고를 무시한다. 종합해 보자. 하나는 섭리를 어기는 존재다. 이를 영화 안의 이야기로, 또 연출로 보여주고 있다. 단지 하나라는 존재 하나만으로 그 모든 모순을 이을 뿐이다.


단절 다음으로 설명하고 싶은 키워드는 양 측간의 갈등이다. 영화는 성실하게 두 집단이 가진 인간적인 면모를 묘사한다. 이 소시민스러운 순간을 보여주는 방식을 보면 흥미로운 것이 있다. 우선 전반부. 영화의 주인공이 타쿠미이기 때문에 타쿠미 쪽 서사가 나온다. 아내는 세상을 떠났고 귀여운 딸 하나와 함께 산다. 어떤 장면에선 아버지 타쿠미가 딸 하나를 업고 길을 걷는 장면이나 자연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도 있다. 인물의 이런 감정적인 부분은 사실 영화와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 타쿠미한테 어떤 사정이 있건 없건간에 살인자는 살인자 아닌가? 하지만 이 묘사는 후반부에 타카하시와 마유즈키가 자동차에서 나누는 대화를 보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이 차 안 대화 장면은 사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를 본 분들이라면 기시감이 느껴지는 부분일 것이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전작 <드라이브 마이 카>와 <우연과 상상>에서 자동차 안의 대화를 사람과 사람 간의 마음의 장벽을 허무는 과정으로 소화했다. 이 장면은 그 대화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관객에게 역시 적용된다. 관객들도 인물에게 마음을 여는 것이다. 이 장면의 역할까지 본다면 두 세계에 정을 붙인 감독의 의도가 느껴진다. 소개팅 앱이나 마유즈키의 직업이 요양보호사였다는 사실이 굳이 들어간 이유는 역시 이 둘(타카하시, 마유즈키)도 그냥 평범한 소시민에 지나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또 이 차 안 대화 장면이 들어간 시점도 의미심장하다. 이야기의 중후반인데, 이 영화가 가령 <매그놀리아> 내지는 <도그데이즈>(2024)같이 각자의 입장이 중요한 옴니버스 영화라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이 타카하시-마유즈키의 인간적인 면모는 초반부에 들어가야 적절하다. 왜? 이 둘에게도 마음을 열 만한 가치가 충분하고 역시 주인공이니까. 그런데 하마구치 류스케는 과감하게 중후반부에 배치한다. 이 장면 이후 '하나가 실종되고 - 타카하시가 살해당한다'는 인과관계가 성립된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 장면을 통해 그린 인물이 영화에서 어떤 의미를 보여주는지 느껴지는 듯하다. 두 사람은 전적으로 동격에 놓인 선량한 사람이다. 악인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이 영화의 살인사건은 평범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다. 더 직설적으로, 우리는 이 영화 하이라이트에 일어난 살인사건을 100%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 세상에 있는 다양한 것들이 서로 충돌하며 작용하는데 어떻게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까? 




글쓴이는 위에서 단절과 양 측의 갈등에 대해 서술했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필연이다. 사실 글쓴이가 쓰지 않은 부분이 있다. 단절과 갈등에 대한 부분을 더 깊게 쓰지 않은 것이다. 사실 위에서 쓴 '단절'과 '두 집단 사이의 갈등'은 필연이라는 키워드 하에 묶여있다. 첫 번째 예시. 마유즈키가 팔을 다치고 하나가 공격당한 사건이다. 이 둘은 전적으로 별개의 사건이다. 마유즈키는 집에서 쉬는 걸 선택했고 하나는 촌장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야기에서 절묘하게 공통점을 가지며 반복된다. 두 인물은 자연의 경고를 들었어야 했다는 점이다. 두 인물에게 공통된 필연이 주어졌고 이 필연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차이점이 갈린 것이다. 두 번째 예시. 주인공의 집에 회장님이 와서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후반부에서 다시 반복된다. 무엇으로? 마유즈키와 타카하시가 상사와 비대면으로 대화하는 장면이다. 둘은 겉으로 보기에 목적과 내용이 아예 다르다는 점에서 아~무 상관없는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두 대화는 상호 간의 입장을 공고히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이렇게 별개의 사건처럼 보이는 일이 공통점을 가진다는 점은 영화에서 중요하다. 각기 다른 입장에 놓인 인물들이 당연한 순리를 거치는 것이다. '사랑하는 딸'과 '집으로 데려다주는 것'을 잊어버린 것 역시 상호 충돌한다. 하지만 둘이 별개의 것인 거랑 이 두 사건은 하나의 키워드로 엮인다. 타쿠미가 건망증이 심하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이 그 줄기다. 이렇게 두 별개의 사건이 하나의 필연으로 이어진다는 방식은 영화에서 하나가 공격당한 것과도 이어진다. 바로 초반부 타쿠미와 하나가 사슴의 뼈를 보고 "총을 맞았다"라고 말하는 장면과 이어지는 것이다. 이 둘은 별개처럼 보인다. 이것은 이 장면을 묘사하는 전후의 톤에서 더 두드러지는데, 전반부는 다큐 같은 템포였지만 후반부는 판타지스럽게 보여주기 때문에 두 사건은 별개의 영화에서 일어나는 일 같다. 하지만 이 두 장면 역시 공통점이 있다.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 장면으로 인해 생명에 위협이 간다. 명확한 사건을 보여주지 않았음에도 우리가 '이럴 땐 보통 이런 일이 일어나지!'라는 생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필연적인 일들을 엇갈리게 제시하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 필연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것들을 느끼고 있다. 누군가가 존재해서 이 사건을 연결시킨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단순히 플롯에서만 이런 맥락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음향이나 편집, 촬영 같은 것도 이 충돌을 시청각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우선 초반부. 아버지 타쿠미가 딸 하나를 업고 걸어가고 있다. 영화가 있는 그대로 보여줄 거면 하나를 만나고 업히고 하는 장면을 보여줘도 된다. 하지만 영화는 편집을 촬영으로 대체해서 부녀를 보여준다. 이러면 뭐가 생기냐. 이야기가 초장부터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 그러니까 기이하다는 느낌을 주기 쉽다. 이 장면에 들어가는 음향은 역시 이 연출의 연장선상이다. 사운드가 부녀간의 감정을 쭉 보여주는 듯하다가 갑자기 끊는다. 단절이다. 우리가 영화까지 가는 감정선은 단절되지만 영화 안의 내적논리는 그 순간에도 재생되고 있다. 심지어 이 장면이 아니더라도 음악이 들리다가 끊기는 형태는 반복된다. 단절의 이미지를 하나로 이어서 이야기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영화의 편집 역시 이상한 리듬감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마치 사운드가 들리다가 끊기는 것처럼 영화가 테이크를 길게 뺄 때의 규칙이 안 보인다. 가령 초반에 주인공이 물통에 물을 채울 때를 본다면 그냥 물만 길고 끝나는 게 아니라 들고 지나가는 것까지 다 보여준다. 그런데 어느 장면에서는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편집을 촬영으로 대체한다. 또 어떤 장면에선 두 사람의 시점을 고의적으로 충돌시키는 편집까지 보여준다. 가령 주인공이 땅와사비를 뽑는 장면을 보면 재미있다. 카메라에서 땅와사비 뽑는 장면을 보면 땅와사비의 시점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장면부터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다음 장면이 땅와사비를 뽑는 장면이다. 이 두 장면은 자연물을 이용하는 인간의 모습과 그 자연물의 시점을 동시에 등장시켰다. 뿐만 아니라 타쿠미가 자동차를 끌고 주차하는 장면을 보면 초반에는 타쿠미의 차량을 보여주다가 후반에는 차 뒤편에 있는 여자를 카메라가 보여준다. 이 주차 장면이나 땅와사비 장면이나 그 자체를 바라보는 인간의 시점을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그 모습을 바라보는 영화 안의 누군가도 함께 등장시킨 것이다. 천재적인 발상이다. 이야기에서 우연처럼 보이는 두 사건에 묘한 선후관계를 제시해서 필연으로 만든 걸로 모자라 카메라워킹으로 영화 안에 존재하는 3자를 등장시킨 것이다. 악인이 존재하지 않지만 3자는 존재하다는 것. 그리고 이 3자가 이 세계를 움직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3자는 무엇일까? 영화의 첫 장면과 가장 마지막 장면이 아예 다른 맥락임에도 이야기의 틀을 이룬다는 점에서 수미상관처럼 느껴지고, 엔딩에서 새끼 사슴과 하나를 동일시시키고, 이 폭넓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 영화 등장인물들이 지키지 못한 것에 책임을 묻게 하는 것. 그게 무엇일까?



글쓴이는 이 엇갈리지만 영화의 세계를 움직이는 것을 한 단어로 순리라고 생각한다. 이 문장을 쓰다가 갑자기 네이버 검색창에 '순리'라고 검색하면 '순한 이치와 도리, 또는 도리나 이치에 순종함'이라는 의미가 나온다. 이치와 도리. 당연하게 당면한 일에 대해 책임지는 자세를 취하는 것. 하나처럼 영화 안에서 독립된 사건으로 움직이는 인물들도, 타쿠미처럼 이상한 행동을 하는 인물도, 타카하시처럼 사람은 착하지만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을 지지 않은 사람들도 이 순리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이 생각은 영화에서 하나가 실종되면서 시작되는 장면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이 장면의 시작을 잘 보시면 물이 위에서 아래로 쪼르르 흘러가는 장면이 기점이다. 이 장면은 영화 안에서 맥락이 생기기도 한다. 워크숍 장면에서 마을회장 할아버지는 "상류에서 만들어진 일이 하류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런 일이 생긴다면 하류의 사람들이 상류의 주민들을 원망할 것"이라고 말한다. 주인공은 이에 힘입어 "중요한 건 균형"이라고 말한다. 영화 안에서 개입을 지양하고 순리에 따르자는 논리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 하나의 실종도 '당연히 일어나야 할 일'이라는 맥락이라는 걸 충분히 읽을 수 있다. 하나의 실종이 순리에 따른 결과가 되는 셈이다.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물론 영화는 하나의 실종만을 순리로 단정짓지 않았다. 순리에서 벗어난 것들은 영화 전,후반부에 두 개나 있다.


순리에서 벗어난 것,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두 사람이 벌인 각각의 실수는 인물들에게 당연한 결과를 받아들이라는 암시처럼 보인다. 실수를 저지른 인간들은 영화 안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존재에 의해 처벌을 받는다. 그 첫 번째 실수는 타카하시의 것이다. 그 질문이 뭐냐. 영화에서 사실상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볼 수 있는 "사슴은 그래서 어디로 가지?"라는 질문이다. 타카하시는 이 질문에 그냥 대충 얼버무린다. 인간의 개발을 위해서라면 자연에 존재하는 어떤 것에 위협이 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이 사슴의 생사에 대해 깊게 탐구하지 않은 인간의 벌이 뭘까? 타쿠미에게 글램핑 터의 관리자 역할 같은 걸 대안으로 내민 벌은? 살인이다. 목숨을 잃는 것이다. 이 영화가 필연에 관한 영화처럼 보인다고 길게 쭉 썼다. 이 필연을 그대로 적용하면? 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인간의 개입에 대해 경고하는 자연을 무시하고 대충 얼버무리다 처형당한 인간의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왜 마유즈키가 살인의 피해자가 되지 않았을까? 자연에 의해 팔을 다친 마유즈키는 타쿠미의 집에서 쉰다. 경고를 마지막엔 받아들인 마유즈키는 살인의 피해자가 되지 않은 것이다. 만약 타쿠미와 동행했다면 마유즈키가 살인의 피해자가 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이 '실수에 의한 처벌'이라는 부분에 근거를 하나 더 하고 싶다. 이 영화의 인물들이 두 번째로 범한 실수에 대해 적는 것이다. 영화가 두 상황을 필연으로 잇는다고 길게 써왔다. 그럼 이 것(타쿠미의 살인)과 유사한 상황이 영화에 있다는 뜻이겠지? 글쓴이는 총성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초반부. 총성이 탕 울린다. 이 총성 때문에 사슴이 죽었다는 걸 타쿠미는 이미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방관한다. 일상에 지장이 갈 정도로 큰 소리지만 원인을 규명하지 않는다. 이는 곧 타쿠미도 타카츠키와 유사하게 자연의 경고를 방관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 모든 과정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해결에 노력하지 않은 것. 이는 영화 후반부 타카츠키가 의무를 포기한 것과 겹쳐 보인다. 그럼 어떻게 돼? 당연한 순리를 따르는 것이다. 나태한 인간이 방관한 탓에 애 먼 사슴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사슴은 총을 쏜 인간에게 분노해서 하나를 공격했다. 심지어 하나는 마유즈키처럼 자연의 경고, 그러니까 회장 할아버지의 조언을 듣지 않았다. 조건이 충분하다. 이 영화가 존재하지 않는 절대자를 보여주면서 순리를 묘사하는 만큼 엔딩에서 타카하시가 살해당하는 장면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이에 연장선상에서 하나가 공격당한 것 내지는 죽어가는 것은 당연한 순서다. 심지어 이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 대신 그 이유를 뭉뚱그려 보여준 것이야 말로 영화의 기획의도를 살리는 좋은 선택이다. 애초부터 그 원인을 규명할 수 있으면 자연 그 자체지 인간이 아니다. 


카메라와 편집도 이 이야기에 존재하는 절대자의 존재를 그대로 구현한다. 하나 보여준 다음 사슴 보여주고 사슴의 피살 보여준 다음 하나를 비춘다. 이건 편집이 의도적으로 두 존재를 동일시시켰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후 살인을 저지르고 하나와 함께 도망가는 타쿠미를 먼발치서 익스트림 롱쇼트로 찍는다. 어느새 형상조차 보이지 않으면 의식이 흐릿한 타카하시가 몸을 비틀거리면서 갑자기 튀어나온다. 중후반부 차에서 일어나는 대화와 가락국수집에서의 장면을 통해 강박적으로 대칭을 이룬 것과는 대비된다. 균형을 어긴 인간이라는 걸 영화가 기술적인 부분에서 강조하는 것이다. 



그냥 뚝딱 만든 각본 같아 보이지만 영화 안에 잡혀있는 내적 체계가 굉장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영화 안에서 구현하는 것. 이거야 말로 영화의 목적이자 모든 것이다. 마음이 움직이는 과정을 천천히 쌓아 올려 한 번에 터트렸던 <드라이브 마이 카>의 정성이, <우연과 상상>에서 인간이 서로를 마주하며 일어나는 묘한 스파크가 터졌던 그 순간을 엔딩으로 치환시켜 관객에게 강력한 충격을 선사한다. 또한 어디에 집중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예술의 속성과 동일시했던 것이 굉장히 신선했던 것처럼 이 영화는 철저하게 우리 세상에 살고 있는 무형의 존재를 등장시키는 괴력을 보여준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이치를 거부한 인간에게 응당한 처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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