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행 목표였던 미술관 많이 가기의 결과
2023년 11월부터 2024년 5월까지의 세계여행 목표 중 하나였던 '미술관 & 갤러리 많이 가기'. 그 마음이 175일 내내 잘 이어져 30개의 미술관과 갤러리를 다녀왔다. 여기에 미술에 포함되는 작품이 있었음에도 뮤지엄으로 구분된 곳도 있었으니 30개가 넘는 여러 나라의 미술관과 갤러리를 다녀온 셈이다. 이렇게 걸작을 자주 봐도 되나. 영광스러운 경험이었다.
미술 관련 전공도 아니고 미술사에 대해 외우고 있는 것도 깃털만큼 가볍지만, 많이 보고 싶었다. 생각해 보면 매번 그런 식이었다. 글을 잘 쓰고 싶어서 책을 꾸준히 읽었고, 음악을 잘 알고 싶어서 클래식 케이팝 재즈 등 폭넓게 들었다. 국사의 흐름을 이해하고 싶어서 국립 박물관을 챙겨 다녔다. 경험치를 늘리면 뭐라도 배운다는 생각으로 항상 그 세상에 나를 빠뜨렸다. 미술도 작품을 많이 보다 보면 더 친해질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기대가 담긴 여행이었다. 화가가 될 건 아니니까 부담 없이 많은 작품들을 보면서 나만의 미술여행을 해보자. 그렇게 만난 셀 수 없이 많은 작품들. 전공도 직업도 지식도 어느 것 하나 미술과 가깝지 못하지만, 감상하는 시간을 사랑하는 여행자는 미술여행으로 무엇을 얻었나.
작품을 감상할 때 도슨트를 듣거나 오디오 가이드를 듣는 상황이 아니라면 작품 옆에 있는 해설을 읽기 전에 내가 가진 경험과 인생관을 바탕으로 먼저 의미를 상상한다. 어떠한 틀도 없이 자유롭게 작품 속을 유영하며 즐긴다. 그 뒤에 해설이 있으면 구글 번역기를 통해 읽어본다. 정답을 맞히는 것보다는 작가와 서로 생각한 의견을 교환하는 시간에 가깝다. 채점하지 않았다. 작품을 해석하면서 정답을 맞히려고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도 된다는 걸 도슨트 가이드님들을 통해 확인(?) 받은 뒤로는 더욱더 적극적으로 작품을 내 방식대로 바라보고 그렇게 취향을 만들어갔다.
그래서 때때로 어떤 작품은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 내 상황과 감정을 비추고 있는 거울.
벨기에 브뤼셀에는 벨기에 출신 초현실주의 작가인 '르네 마그리트'의 뮤지엄이 있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이 다수 전시되고 있는데 그곳에서 <LE COMAINE D'ARNHEIM>을 보고는 1초도 되지 않은 찰나에 답을 내렸다. 내 세계여행을 표현할 수 있는 그림은 이거다. 독수리가 날개를 펼치고 있는 모양의 거대한 설산. 그 앞에 여느 달걀과 다를 바 없는 작은 흰색 알. 오르려고 하면 깨질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만, 그럼에도 알은 산을 응시하고 있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나아가고 싶은 나를 비추는 그림이었다. 이 작품은 여러 버전으로 그려져 있었는데 모든 버전이 당찬 모험심과 걱정 어린 심란함 그 사이 어딘가를 번민하고 있는 내 여행을 그림이 잘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거울 같은 그림들을 마주할 때마다 세상에 정답이 있는 건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작품들을 보다 보면 같은 사물을 보더라도 작가마다 표현하는 방식이, 집어넣는 의미가 달랐다. 신화 속 이야기를 똑같이 들어도 무엇을 강조하고 중심에 내세우는지는 작가마다 차이가 있었다.
특히 종교화는 같은 일화로 그림을 그려도 작가마다 표현하는 방법이나 부각하는 인물이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어느 것 하나를 두고 잘못 갖다 썼다고 하지 않는다. 그저 하나의 에피소드에서 받아들인 게 다를 뿐이다. 여행 전에는 '종교화는 무교인 내가 받아들이기엔 너무 먼 존재인가 봐' 단념했는데, 이런 점을 이해하고부터는 종교화를 보는 게 조금은 즐거워졌다. 최근에도 카라바조 내한 전시였던 <빛의 거장 카라바조&바로크 얼굴들>에서 오랜만에 종교화를 감상했는데 '성 토마스의 의심'을 주제로 한 두 작품을 비교하며 봤던 시간이 유독 진한 기억으로 남았다.
미술관을 갈 때마다 자유롭게 바라보다 보니 자연스레 미술관 밖에서도 답을 정하지 않게 됐다. 규정하지 않으면 더 많은 것들이 보이고 유연하게 받아들인다. 대뜸 세계여행 중에 안 읽던 경영 서적을 전자책으로 완독 한 건 그 영향 중 하나다. 나는 이 경계 없는 시선 덕분에 아는 세상이 많아졌다고 생각한다. 가 본 땅의 영역은 이에 비할 바가 아니다.
작품과 작가를 하나하나 알게 되면 그 도시가 달리 보인다. 브뤼셀에 르네 마크리트 미술관이 있는 줄 몰랐다면 벨기에를 기억할 때 르네 마그리트의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거다.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보볼리 정원을 두고 보티첼리의 봄을 닮은 정원이라고 기억하지 않았을 거다. 뉴욕이 미술의 도시라고 느끼지 않았을 거고 태국 여행을 마치면서 그들만의 정체성이 뚜렷한 독창적인 예술 국가이기도 하다고 감상을 쓰지 않았을 거다. 그곳이 갖고 있는 여러 요소를 분야에 상관없이 흡수하면 여행하는 지역에 대한 감상도 풍부해진다는 걸 자주 느꼈다. 여행자에게 잡학은 중요하다. 여행하는 삶을 살기로 했으면 더 경계 없이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작품뿐만 아니라, 전시된 공간에 대해서도 경험치가 쌓였다. 미술관과 갤러리를 다니면서 얻은 의외의 재미이자 배움이었다. 어떤 미술관도 똑같은 모양은 없었다. 기존에 다른 용도로 쓰던 건물을 미술관으로 용도 변경해 동선은 다소 불편하지만 이색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 리처드 마이어 등 세계적인 건축가가 지은 건축물 자체부터 작품이었던 곳. 작아서 소도시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던 곳. 작품만큼 공간에도 시선을 두고 이에 대한 감상을 남기는 건 미술을 좋아하는 여행자의 소소한 취미 중 하나였다. 건물 입구는 어떤 과정으로 들어가게 되는지, 작품 해설 팻말은 어디에 붙이는지, 동선은 어떤 선을 그리고 있는지, 조명이 작품을 보는 데에 어떤 도움을 주고 있는지 하나하나 기억할 수 있게끔 집중해서 봤다. 학습의 목적보다는 탐험에 가까웠다. 낯선 도시들을 여행하는 여행자와 퍽 잘 어울리는 미술관 나들이였다.
그러고 한국에 돌아와서 몇 가지 전시를 관람했는데 나도 모르게 작품 외 요소에 시선을 두게 되는 거다. 조명 때문에 오히려 작품 색깔이 날린다던지 해설을 적어둔 팻말의 폰트가 너무 작다던지 아쉬움이 생겼다. 전시되는 작품만큼 공간도 중요하다는 걸 확실하게 깨닫고 돌아온 모양이다. 무언가를 전시한다는 것이 관람객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또 배려하는 게 필요한 프로젝트라는 걸 이제는 잘 안다.
✍️글 쓰고 사진찍는 윤슬의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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