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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생일의 기록

2025.4.9.

by La Francia

아이들이 달력을 볼 줄 알게 되면서, 그들이 '생일'을 대하는 태도에 적잖이 놀란다. 아이들에겐 자기 생일이 모든 날의 기준이 된다. 이를테면,


-8월 25일에 개학을 한다고? 여섯밤만 더 자면 내 생일인데!!
-아빠가 1월 내내 일본출장을 간다고? 그럼 내 생일에 아빠가 없는 거야? 말도 안 돼!

심지어 그들은 생일 약 60일 전부터 달력을 보며 디데이를 샌다.
-어디 보자.. 오, 이제 마흔두밤 남았다!


어린이들이 자기 생일만 챙기는 건 아니다. 이틀 전 아침, 담이는 등굣길에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서 놀랐다.

-여보세요? 왜?! 뭐 놓고 갔어?
-아니 엄마, 있잖아, 수요일에 뭐해야 하는지 알아?
-뭘 해야 하는데??
-엄마 생일파티! 그 얘기 아침에 까먹고 못하고 나와서 전화했어.


내 생일은 4월 9일이다. 하지만 내 귀여운 딸들이 3월 초부터 자기 엄마 생일 선물을 곱게 포장해서 책상서랍 속에 고이 넣어 놓은 걸 나는 안다.


드디어 오늘, 내 생일날.
아침에 남편이 미역국을 끓이고 밥을 지었다. 나는 식탁에 앉아 분주히 움직이는 그를 바라봤다. 생일이니까 누려야지, 하는 마음으로. 아이들은 오늘 저녁에 파티를 한다며 신이 났다. 내 생일인데 자기들이 더 기대하고 있는 것 같다. 오랜만에 맛본 남편의 미역국은 역시 훌륭했다.


오늘은 나의 생일이니 나에게 특히 잘해주고 싶었다.
날씨를 확인하니 아침 기온이 8도. 뛰기 딱 좋은 날이다. 아이들이 등교하자마자 나는 환복하고 러닝화를 신고 강변으로 나갔다. 남편과 함께 가끔 달리는 7Km 코스를 혼자 뛰었다. 바람이 불자 벚꽃 잎이 보슬보슬 날렸다. 꽃잎이 떨어져 나간 자리는 어느새 연둣빛 새순이 자리 잡았다. 봄날 아침의 강가에는 오리들이 유유히 떠다녔다.



40분 정도를 달리고 집에 들어와 폼롤러마사지를 하고 있는데 카톡으로 친구들에게 생일축하 메시지가 왔다. 나는 평소엔 연락을 거의 하지 않으면서도 서로의 생일을 꼬박꼬박 축하하는 단톡방 두어 개에 소속되어 있다. 카톡은 사람들의 생일을 부지런히 알려주므로 그걸 본 톡방 멤버들은 메시지와 이모티콘을 날린다. 립스틱, 비타민, 헤어에센스, 핸드크림, 바디미스트 따위의 선물도 오간다. 오늘 가장 먼저 받은 친구의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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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축하한다^^ 우리가 벌써 40이 넘었네. 10살 때 봤는데.. 세상에 뭐든 열심히 하는 네가 참 부럽고 보기 좋았다. 잘 지내고, 무엇을 하든지 평안할 수 있게 기도할게ㅎ 오늘 즐겁고 행복한 하루 보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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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지기. H의 메시지였다.
얘가 머나먼 경기도 양주로 이사 간 뒤로 못 만난 지가 몇 년 째인지 모르겠다. H의 말에 우리가 함께한 10대와 20대의 수많은 날들이 촤르르 스친다. 그 순간들이 마치 전생 같아서 아득한 눈물이 났다. 자주 만나지 못해도, 시시때때로 연락을 주고받지 않아도, 우리가 공유한 보석 같은 시간만으로도 H는 소중하다. 나는 너의 존재자체가 고맙다고 답했다. 그건 진실이었다.



언제나처럼 혼자 먹는 점심.
운동으로 허기가 져서 아무거나 먹어도 맛있겠다만 특별히 맛있는 것이 먹고 싶었다. 냉장고를 뒤지다가 냉동새우를 발견! 올리브오일 마늘 급히 팬에 올리고 호밀빵 두 조각을 에어프라이어에 데웠다. 평소엔 한 조각을 먹지만 오늘은 생일이니까 두 조각을 먹기로 했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먹고 싶었지만 오늘은 학교도서관 봉사활동하는 날이라 시간이 촉박했다. 빵에 올리브오일을 적셔서 새우를 올려 입어 욱여넣으며 와구와구 먹었다. 감탄할 만큼 맛있는 점심이었다.




저녁엔 남편과 아이들과 외식했다.

집에서 먹어도 되지만 생일이니 맛있는 걸 먹자는 남편말에 그러자 했다. 굳이 사양하지 않는 것이 상대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맛있는 전복솥밥집에서 우리는 솥밥을, 아이들은 전복죽을 먹었다. 죽을 싹싹 긁어먹던 담이 물었다. 엄마, 부산할머니한테 전화했어? 아니, 깜빡했어. 나는 오늘 엄마한테 전화한다는 걸 홀랑 잊어버리고 만 거다. 담이는 테이블에 놓여있던 내 폰을 집어 들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부산할머니! 네! 근데 할머니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요? 몰라요?? 엄마 생일인데! 엄마 바꿔줄게요. 꼬마가 할머니를 약간 책망하는 듯 말하며, 나에게 폰을 쥐어 준다.


엄마는 내 생일을 잊고 있었다고 했다. 요즘 주식이 떨어져서 며칠째 정신이 없다며 챙겨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엄마의 취미생활을 아는 나는 전혀 섭섭하지 않았다. 원래 생일엔 자식이 낳아준 엄마에게 고마워하며 챙겨주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믿는다.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주식은 떨어질 때도 있는 거야.. 너무 마음 쓰지 마요, 하나마나한 위로를 했다.


밥을 먹고 우리는 식당 근처 공원에서 잠시 밤산책을 했다. 아이들이 달리기 시합을 하자고 해서 축구장 절반정도 되는 거리를 경주했다. 보리가 1등을 했다. 나는 진짜 최선을 다해서 뛰었는데, 3학년 딸에게 와장창 졌다. 심지어 남편도 졌다! 보리는 대단한 아이다.


집에 돌아오자 아이들은 옷 갈아입으러 안방에 들어간 나를 방에서 못 나오게 했다. 보나 마나 식탁에서 케이크에 초를 꽂고 불을 붙이고 있겠지. 이 형식적인 생일리츄얼에 감흥이 떨어지는 건 너무 많이 겪었기 때문일까. 반면 아이들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지 흥분하여 호들갑이다. 문밖에서 엄마! 이제 나오세요! 하는 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바로 방문 앞에 담이 케이크를 들고 서있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가 시작되고 아이들은 나에게 케이크를 넘겨주며 박수를 친다. 남편은 늘 그러듯 이 장면을 동영상으로 촬영 중이다.


보리가 선물한 잠옷은 내가 갖고 싶다고 찜한 것이었다. 내가 곧장 갈아입고 나오자 보리가 뛸 듯이 기뻐했다. 담은 나에게 책을 선물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이것도 내가 콕 집어 준 책이다. 보리가 쓴 편지에 나는 좀 놀랐다. 편지가 너무 길다. 아이가 쓴 것 같지 않은 문장. 마 어디서 베낀 건 아닐 테고.. 보리가 언제부터 이런 문장을 구사할 줄 알았을까 싶어서 읽고 또 읽었다.



식탁 위엔 러넌큘러스가 있다. 어제 진우에게 받은 꽃이다. 진우는 이웃집에 사는 담의 친구로 우리 집 독서모임 원년 멤버이다. 담이한테 내 생일을 전해 듣고는 어제 독서모임 때 꽃을 가지고 왔었다. 참한 남자 어린이가 꽃다발을 조심스레 들고 들어오던 모습이 다시 떠올라서 나도 모르게 웃는다.




언제부턴가 생일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았다.

뭔가 대단한 걸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걸까. 생일이 지나가면 허무감 비슷한 감정이 남는 걸 경험한 이후였다. 누군가의 생일에 뭔가 해줘야 한다는 무감, 내 생일에 돌려받을 것만 같은 부담. 불필요한 생각을 너무 많이 하게 되는 '생일' 자체에 피로감이 있었다.



내 생일에는 그저 내가 나를 한번 더 들여다봐주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걸 찾아서 그걸 누리게 해 준다면 더 좋겠고. 그러기 위해서 내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상황에서 더 편안한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혼자서는 스스로를 알 수 없다. 마음을 나누는 행위 너머에 진짜 앎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건 좋은 일이다. 마음이 따뜻해지고, 크게 웃고, 눈시울이 붉어지는 일이다. 사는 것이 좋다고 느껴질 만한 날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생일을 알게 된다면, 주저 없이 축하한다고 말하고 싶다. 일 년에 하루 정도는 마음 놓고 누려도 될 테니까. 우린 누구나 그럴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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