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전날, 원래라면 시댁 친지들과 승*도 여행을 떠났을 것이다. 6월에도 신랑, 아이들만 보낸 터라 이번 여행은 함께 하고 싶었다. 3개월 넘게 이어진 간병과 2순위로 밀려난 가족과의 일상에 균형이 필요한 시기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연휴를 하루 남긴 밤, 격리치료 중이던 엄마의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고 K병원으로 재입원했다. 엄마는 낙담했고 고통에 신음했다. 엄마를 두고 여행을 즐길 수 있을까? 불편한 질문과 안쓰러운 눈빛이 오갈 것이고 즐거운 명절여행에 우울한 표정을 지을 수는 없으니 씩씩한 척, 괜찮은 척 허세를 부릴 걸 상상하니 더욱 가기 싫어졌다.
신랑은 ‘아버님, 어머님과도 언제 여행 갈 수 있을지 몰라.’ 말했지만 시어른들과 여행 갈 가능성이 죽음을 앞둔 엄마와의 시간과 어떻게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나에게 의무와 책임을 강요하지 말아 줘.
진심으로 나를 아낀다면 말이야.
오래도록 하고팠던 말이었다. 예전의 나라면 그저 받아들이며 미안해했을 상황이지만 ‘선택’이라는 단어에 골몰해 있는 요즘, 남편의 말이 목구멍을 죄었고 결국 토해버렸다.
매일 엄마의 죽음을 생각한다.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숨을 쉬고, 몸을 가눌 수조차 없는 엄마. 말할 수도 먹을 수도 없고 그저 온갖 의료장비에 기대 생명을 연장하는 하루하루를 견디는 엄마를 생각하면 참담하다. 하느님이 왜 이런 고통을 엄마에게 주신 건지 원망하고 분노한다. ‘살아있어 줘서 고맙다’는 말이 이토록 이기적일 줄이야. 지금 엄마의 행복이 삶에 있지 않고 고통 없는 죽음에 있다면 지금 우리의 노력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고통에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려면 다시 행복한 삶으로 떠오를 미래가 보장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엄마를 일상으로 되돌려놓는 일에만 골몰했는데 이제는 어떻게 잘 보내드릴 수 있을까 고민한다.
사람은 누구나 죽고,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 그럼에도 소중한 존재를 쉬이 떠나보낼 수 없는 게 인간이다. 보낼 수도 잡을 수도 없는 어정쩡한 마음으로 오늘도 엄마를 만나러 간다. 아직 숨이 남은 엄마를, 온기를 품은 엄마를 이승에서 조금 더 오래 만나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으로.
엄마의 수술 이후 가장 많이 생각하는 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일, 관계, 상황에 이끌려 원치 않은 일들에 품을 들이고 몸과 마음이 닳도록 두지 않겠다. 좋아하는 일, 존재, 공간만을 들이며 그 안에서 온 힘을 쏟을 것이다. 하고 싶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일을 할 것이다. 억지로, 마지못해, 책임과 의무라 해야 하는 일들은 밀어낼 것이다. 단단히 마음먹어도 예전의 패턴대로 행동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겠다. 나를 이끄는 문장과 배움이 ‘선택하는 삶’으로 이끌어 줄 것을 믿기에. 내일 죽어도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