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귀찮아도 기념해야 하는 이유
남편을 따라 미국에 와서 임신과 출산을 겪고 육아를 시작했다.
하루 대부분을 아이와 집안일에 쏟아붓다 보니
어느 순간 ‘나는 누구지?’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되었다.
우리말로는 주부, 영어로는 ‘홈메이커(Home maker)’라는 역할이
내 삶의 전부가 되어버린 것 같은 1년 반.
정체성과 자존감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던 그때
나는 이 책을 만났다.
『Memory-Making Mom』 — 기억을 선물하는 엄마.
이 책은 아직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은 작품이다.
그래서 더 소개하고 싶었다!
『Memory Making Mom』의 저자 제시카 스마트(Jessica Smartt)는
세 아이를 키우며 가정 안에서 기억과 신앙을 세우는 삶을 나누는 작가이자 강연자다.
“아이들이 언젠가 힘든 순간에 꺼내볼 수 있는 기억을 선물하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 책은 아내이자 엄마로서 가정을 돌보는 일이
얼마나 큰 의미와 잠재성을 지니는지 다시 보게 해 주었다.
가정에서 엄마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임무는
가족에게 삶의 버팀목이 되어줄 만한, 선물 같은 기억을 남겨주는 일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Jessica Smartt의 책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Traditions create positive memories we can draw on during times of sadness, temptation, or loneliness. They are a way of intentionally packing a box of memories for our kids to take with them when they leave home. We must be intentional to fill their boxes with verses memorized, foods relished, adventures made, beauty seen.
— Jessica Smartt, Memory-Making Mom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작은 습관들은
슬픔이나 유혹, 외로움이 찾아올 때
다시 꺼내볼 수 있는 따뜻한 기억이 된다.
아이들이 집을 떠나는 날,
두 손 가득 들고 갈 추억 상자를
의도적으로 채워 넣는 방식이다.
우리는 그 상자 속에
암송한 말씀, 좋아했던 음식, 함께 떠난 모험, 바라본 아름다움을
하나씩 정성스럽게 담아주어야 한다.
이 책을 통해
따뜻하고 안전한 가정이 가진 가치,
그 가정을 지키는 엄마의 사명,
그리고 이 일을 자랑스러워해도 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래서 묻게 된다.
아이에게 어떤 기억을 선물하고 싶은가?
미국에 온 지 햇수로 4년이 다 되어간다.
어쩐지 올해는 추석이 다가오자 간소하게나마 추석 음식을 준비하고싶었다.
전에는 이렇게 생각하곤 했다.
“굳이 미국까지 와서 번거롭게 한국 명절을 챙길 필요가 있을까?”
추석을 기념하고 싶었던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최근 알러지 증상으로 몸이 좋지 않아 고생하는 남편을 위한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또는 미국에서 자라고 있는 딸아이에게 한국의 명절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었을 수도 있다.
육아를 하며 요리를 하는 건 여의치 않을 것 같아 대형 한인마트인 H마트로 향했다.
화려하고 모던한 한국의 대형마트와는 달리
미국의 한인마트에 들어서면 어딘가 촌스럽다는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마트 내부를 걷다 보면
마치 가장 안전한 곳에 있는 것처럼 곧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낀다.
역시 나는 뼛속까지 한국인, 미국에서는 이방인이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이곳에서 송편과 전, 잡채를 카트에 담는다.
집에 돌아와 다음날 저녁식사가 될 이 음식들을 냉장고에 고이 넣어두었다.
추석 당일,
남편은 퇴근 후 식탁 휘 송편과 잡채를 보고 얼굴이 화색이 되었다.
아이는 평소와는 다른 저녁상이라고 느꼈는지 기대 스런 얼굴로 얼른 자기 의자에 앉았다.
이들이 기뻐하는 얼굴을 보자 최소한일지언정 추석 음식을 준비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석’의 문화와 기억을 우리 가족 안에서 계속 이어가고 싶다.
10월 12일 콜럼버스 데이 즈음, 늘 가는 애플피킹(사과 따기)도 빠질 수 없다.
주말에 피곤함을 무릅쓰고 올해도 사과농장을 찾았다.
오전부터 가족단위 사람들로 북적인다.
농장 입구에서 입장료를 지불한 후 사과를 따러 들어가면 곧 볼 수 있는 풍경들이 있다.
사과를 따는 도중에도 이미 사과를 하나씩 입으로 베어 먹고 있는
엄마, 아빠와 그 뒤를 따르는 아이들이다.
남편과 나 그리고 이레도 서둘러 빨갛게 잘 익은 사과를 땄다.
요즘 우리 가족이 가장 좋아하는 사과는 ‘허니크리스프(Honeycrisp)’라는 품종이다.
방금 나무에서 막 딴 사과를 옷에 대충 벅벅 문지른 후
우리는 기다릴 새도 없이 베어 먹기 시작했다.
어찌나 달콤했는지,
사과향을 따라 쫓아오는 벌들 때문에 혼이 났다.
자기 얼굴보다 조금 작은 사과에 얼굴을 묻고
즙을 잔뜩 흘리며 사과를 먹던 아이.
우습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했다.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도 다가온다.
칠면조 준비가 귀찮아도,
트리 장식이 번거로워도
기념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귀찮다고 그냥 지나쳐버리면
그만큼 기억될 추억은 사라져 버린다.
큰 창이 있는 새 집으로 이사 온 뒤,
노을이 지면 아이를 부른다.
“엄마랑 하늘 구경하자!”
그 말에 신나게 의자까지 끌고 오는 아이.
아이는 의자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고
아주 한참 동안 노을을 바라본다.
이 작은 순간을
고작 두 살인 아이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엄마인 나는 잊지 않을 것이다.
오랫동안 간직하여
훗날 훌쩍 커버린 아이에게
우리가 함께 보았던 노을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꼭 이야기해 줄 것이다.
토요일 아침은 팬케이크를 먹는 날이다.
팬케이크는 우리 가족 모두가 가장 좋아하는 메뉴 중 하나지만,
영양적인 이유로 자주 먹지는 않는 음식이다.
하지만 토요일 아침만큼은 예외적으로 메이플 시럽 듬뿍 뿌린 팬케이크를 먹는다.
건강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시간이다.
역시 토요일 아침은 팬케이크다!
때로는 번거롭고 비효율적이지만
일상의 작은 순간들을 기념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우리 삶 속에 효율이나 물질로 설명할 수 없는
우리 영혼 깊은 곳에서 갈망하는 가치가 있기 때문 아닐까.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There is something innate in us humans that craves routine. We are made in the image of the One who created the hours and rhythmic seasons and makes the sun rise every blessed day. We find comfort in the repetition and the counted-on. Especially our little ones. If you have any sort of regular family ritual, you probably already know exactly what I mean. Do your little ones erupt with joy when they realize, Today! Today is the day!”
— Jessica Smartt, Memory-Making Mom
우리 인간에게는 본능적으로 루틴을 갈망하는 마음이 있다.
시간을 만들고 계절의 리듬을 정하시며,
매일같이 축복처럼 해를 떠오르게 하신 그분의 형상대로
우리는 지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반복되고, 기대할 수 있는 것들 속에서 위로를 얻는다.
특히 아이들은 더욱 그렇다.
가족과 함께 이어가는 작은 의식이 하나라도 있다면
이미 이 말이 어떤 뜻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 이렇게 외치며 기쁨으로 가득 차 얼굴이 환해지지 않는가?
“오늘이야! 드디어 오늘!”
이 책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기억을 만드는 방법은 거창한 이벤트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바로 그것들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