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부터 모 정치인의 '헝가리식 대출' 도입이 화제가 된 적 있다. 헝가리는 지난 2019년부터 출산 예정 부부에게 4천만원 저금리 대출을 주고, 셋째까지 낳을 경우 남은 원금을 전액 탕감해주는 제도를 도입했는데 이를 벤치마킹하자는 것. 설익은 발표내용과 맥락에 대해 대통령실 차원의 반박을 비롯한 다양한 비판이 있었지만, 이런 파격적인 대책을 고려해야 할 정도로 한국의 저출산이 심각해졌다는 방증으로 보이기도 한다.
저출산이 국가적 과제가 된지도 20년이 넘어가는 시점. 이젠 국민 누구나가 저출산에 대해 한 마디씩 자기 견해가 생길 정도다. 누군가는 청년실업을, 불평등을 이야기한다. 저녁 없는 삶과 성별 갈등도 빠질수 없다. 의견은 다양하고, 정권이 바뀌고 온갖 정책이 난무하지만 허무하리만큼 떨어지는 출산율에 과거 '헬조선' 담론처럼 거의 종말론에 가까운 분위기가 논의장에 가득찬 느낌이다.
하지만, 유독 한국에서 이토록 깊고 심하게 계속되는 저출산에 대해 나는 좀 다르게 본다. 한국은 희망이 없어서가 아니라, 희망이 있기에 오히려 저출산이 지속되고 있다는 가설이다.
몇 가지 숫자와 트렌드를 한번 들여다 보자.
한 사회에 신분상승의 희망이 얼마나 있는지, 즉 개인의 노력 아니면 '수저'가 중요한 사회인지는 보통 부모와 자식간의 소득 상관성을 통해 분석한다. 한국은 어떨까? 각종 연금, 보험 등 공신력 있는 데이터에 따르면 놀랍게도(!!) 유럽이나 미국의 절반 이하로 극히 낮게 나온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캔자스주립대 김창환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산업구조가 고도화된 2010년대를 사는 25~34세 청년층은 대학졸업 후 관리전문직을 획득할 수 있는 기대치가 이전 시대에 비해 훨씬 올라간 상황이다. https://sovidence.tistory.com/1217
즉, 김창환 교수의 표현대로 한국은 '고착화된 수저계급론과 그에 따른 수렁과 절망이 아니라, 동일한 목표를 향해 만인과 만인에 대한 투쟁을 실시하는, 그래서 활발한 계층이동이 오히려 스트레스인 사회'라는 뜻이다.
활발한 계층이동이 저출산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증거는 어떨까. 연결고리는 산모 출산연령의 지속적 상승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의 2021년 기준 첫째아 평균 출산연령은 32.6세로 OECD 최고 수준이다. 무엇보다 중요한건 상승폭인데, 2001년 28.0세였던 초산연령이 2010년 30.1세, 2017년 31.6세, 2021년 32.6세로 최근 10년간 오히려 더 급속하게 상승 중이다. 이러한 상승속도는 유럽이나 미국, 유사한 경제구조를 갖춘 일본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빠른 수준이다.
초산연령을 높이는 요소는 다양하겠지만, 여성들이 20대후반~30대초반을 출산과 양육에 투자할 커리어 상의 기회비용이 높아졌다는 점을 빼놓을수 없다. 한국은 사회적 계급이 아직 고착화되지 않은, 경쟁에 뛰어들어 지위를 상승시킬 수 있는 기대감이 남아있는 나라, 즉 '아직 게임이 끝나지 않은 나라'라고 볼 수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의 최근 연구자료도 이런 가설을 뒷받침한다. 2010~2019년까지 출산율 변화를 분석한 결과, 사회적 신분상승 가능성 및 기대감이 큰 대졸 이상 고학력 가구의 출산율 감소폭은 48.1%로, 고졸 이하 가구의 11.6%에 비해 훨씬 컸다. 특이할 점은, 사회 전반적으로 대졸 이상 고학력 가구의 비중이 늘면서 전체 출산가구에서 고학력 가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소폭 증가했다는 점이다.
그외에도 2021년 박현준, 정인관의 연구, 2020년 WEF 사회이동 보고서, 2011년 이후 통계청 가계금융복지조사 등 대부분 조사에서 한국은 절대적 수준에서 높거나 최소한 다른 나라 대비 준수한 사회이동성을 보여준다.
정리하면, 세간의 인식과 달리 2010년대 이후 한국은 청년들이 대학에 진학하고 계층을 이동시킬 여지를 많이 확보해 온 나라였다. 청년들은 그 어느 세대보다 '불공정'에 예민하게 반응할 정도로 소득향상과 지위개선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졌고, 출산 적령기에 가정보다 커리어를 추구해 온 것이다. 한국인들의 유별난 저출산 기조는 단순히 절망의 상징이 아닌, 사회가 성장하며 신분상승의 희망과 기회가 보다 넓은 청년들에게 부여되면서 발생한 결과라고 난 해석한다.
저출산이 사회발전의 징후라면, 정부와 시민들은 손놓고 있어도 괜찮은 걸까? 서울대 이철희 교수는 저출산의 '속도'와 '정도'를 지적한다. 세대별 인구 비율이 지금과 같이 급격히 깨져나갈 경우 국민연금 등 각종 복지지출이나 국방지출 등 재정부담 문제가 채 준비되지 않은채 다가올 수 있다. 또한, 아이를 낳고 싶으나 사회경제적 여건이나 건강으로 이를 실현하지 못하는 부부들에게 출산 지원은 인권과 자유의 확장 측면에서 타당한 정책이다. (이철희, 2018)
그렇다면 앞으로의 정책 방향성은 어때야 할까. 일단 아이를 낳고 싶으나 낳지 못하는 이들은 없어야 한다. 난임시술에 대한 지원을 대폭 확대하고, 출산 전후 건강관리에 소요되는 비용은 국가가 전액 보장하는 방법도 있다. 커리어나 돌봄 부담으로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데 어려움이 있는 가구를 위한 재택 돌봄시장을 활성화(당근마켓?)하거나 조부모님들의 손자녀 돌봄비용을 지원하는 아이디어도 가능할 것이다.
좀더 극단적으로는, 출산이 사회적 신분상승을 오히려 부추기도록 할 수 있다. 신혼부부에게 인기지역 아파트 입주기회를 확대하고, 출산 시 분양권으로 전환해줘서 '애 낳으면 자본가'가 된다는 시그널을 주거나, 아예 정부부처나 공공기관 중심으로 출산 및 다자녀 직원에 대해 승진 시 가점부여 등 인사상 혜택을 파격적으로 주는 정책도 가능하다.
정책이 극단적으로 갈수록 욕은 엄청 먹을 것이다. 특히 싱글가구 중심으로. 하지만 한국처럼 어느 정도 선진화와 민주화가 진척된 나라, 나름대로의 '파레토 균형'이 달성되고 있는 나라에서 진정한 변화를 일으키려면 욕이 나올 정도의 정책이어야 가능한 것 아닐까. 물론 개인적으론, 앞서 말했듯 저출산 자체가 사회 역동성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그런 극단적 정책까지 써가며 자원배분을 뒤집을 필요에 대해선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줄 요약
1. 한국은 여전히 신분상승 게임이 끝나지 않은 활력 있는 나라다.
2. 한국의 극단적 저출산은 높은 사회적 이동성과 떼놓고 보기 어려운 현상이다.
3. 그렇기에 진정한 저출산 반전은 '애 낳으면 신분상승'이란 시그널을 줄 때 비로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