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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뎀뵤 Nov 06. 2019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는 말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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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략 이런 사람이다. 언니가 절대 안 빌려주겠다는 흰 블라우스를 입고 나가서 (흰 블라우스를 입고 나간 날은 왜 꼭 떡볶이 먹을 일이 생기는지) 빨간 떡볶이 국물을 튀겨서 온다. 우리집에서 우산을 가장 많이 잃어버리는 사람도 나다. 설거지도 방청소도 언니처럼 야무지게 마무리하지 못한다. 우리집에서 넘어지고 쏟고 잃어버리고 깨고 엎지르는 건 내 담당이다. 그때마다 엄마와 언니는 나에게 왜 이렇게 덜렁거리고 허술하냐고 했고, 나도 그렇게 알고 지냈다. 나는 덜렁거리고 허술한 사람.



입사하고 2년쯤 지났을 때 일이다. 팀장님은 엑셀 파일 하나를 나에게 맡기셨다. 파일에는 협력사의 계약 내용과 이행계획이 담겨 있었다. 이 파일을 공유해서 지급요청도 하고 광고 집행도 했다. 말 그대로 엑셀 속 숫자 하나하나가 그대로 돈이 되는 중요한 파일이었다. 덜렁거리고 허술한 내가 과연 이걸 할 수 있을까. 해도 될까. 잘못해서 회사에 큰 손해를 끼치면 어떡하지. 나는 파일을 열어 보기도 전에 잔뜩 겁을 먹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엑셀 파일 속 숫자를 보는 게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심지어 재미있었다. 이후에도 팀별 예산과 결산을 비롯해 숫자를 다루는 각종 리포트 자료들은 내 담당이 됐다. 세상 최고 덜렁이로 살아온 내가 세상 최고 꼼꼼함을 요구하는 숫자 관리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즐겁게. 어떤 일을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게 재능이라면 분명 나는 숫자 보기 분야의 천재였다.


동료들은 나에게 꼼꼼하고 섬세하다고 칭찬했다. 제가요? 그럴 리가요. 뭔가 잘못 보신 거 같아요. 우리 엄마랑 언니는 저보고 매일 덜렁이라고 하는데요.라고 말하며 칭찬을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한두 번이 아니라 일할 때마다 매번 듣게 되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 혼란스러웠다. 내가 정말 꼼꼼한 사람인가. 덜렁거리는 사람인가.



어느 날 동료가 말했다. 뎀뵤야. 이 세상에 덜렁과 꼼꼼을 1부터 10까지로 나눈다면 너네 집에서는 네가 1이야. 하지만 이 세상 사람들 전체를 놓고 본다면 너네 가족들이 통째로 10에 그것도 완전 극극극 10에 가 있는 거지. 그러니 네가 집에서 아무리 덜렁거리는 1이라 해도,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세상 전체의 스펙트럼 안에서 보면 꼼꼼한 10이 될 수도 있는 거야. 오랫동안 어지러웠던 나에 대한 선 하나가 명확히 그려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는 말의 함정에 빠져 있다 보면 자신을 바로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 가족들이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친구들이 말해주는 것, 혹은 스스로가 자신에게 느끼는 것,,, 내가 알고 있는 ‘원래의 나’라고 생각하는 이미지들이 어디서 온 것인지 들여다봐야 한다. 어떤 대상과 이야기를 하느냐에 따라 나는 아주아주 다른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물에 갇혀 있던 시선을 벗어던지고 나서야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정반대 되는 평가나 이야기도 온전히 귀 기울여 듣게 됐다. 그들이 말하는 모습 또한 나임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누군가 나에게 했던 평가들.

내가 갖고 있던 나에 대한 생각들.

언제든지 뒤바뀔 수 있는 상대적인 것들이다.

그 안에 갇히지 않아야 한다.

원래의 나는 어디서 온 것이고,

나는 어떤 사람들에 비추어 나를 바라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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