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암흑기의 전조

하드디스크가 금값이 된 시대, 지워지는 우리의 기억

by 덴덴마스터

외장 하드라는 현실적인 저주


매년 어느 쇼핑몰의 할인 기간 알림이 오면 습관적으로 외장 하드를 한두 개씩 샀다. 과거 사용하던 2테라짜리 외장하드에 문제가 생기면서 파일이 날아갔던 기억이 트라우마가 되어 지금의 습관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게 대단했던 파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작은 파일이 더 이상 복구할 수 없고, 구할 수 없게 됐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이었다. 처음에 2테라 외장하드를 구입하던 습관은, 시간이 지나 자연스레 4테라, 5테라짜리 외장하드 구입으로 이어졌다.


배드 섹터가 생긴 하드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폐기하고, 새로운 외장으로 넘기는 과정을 반복. 그렇게 개인적인 아카이브를 유지해 왔다. 문제는 몇 년 전부터 슬금슬금 오르던 가격이었다. 이제는 앞자리가 바뀐 가격을 마주해야 했고, 이번에는 차마 구입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단 몇 만 원 차이긴 했지만, 앞자리가 바뀌니 심리적 마지노선이 무너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치솟는 외장하드의 가격은 단순한 물가 상승이 아닌 것을.


AI라는 거대한 불꽃을 태우기 위해 개인의 저장 공간은 약탈당하고 있었고 기억의 영토를 확장할 권리는 서서히 박탈당하고 있었다.


자본이 선택한 데이터 vs 버려진 데이터


어떤 데이터들은 이제 세상 그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유령이 되었다. 이유는 명확하다. 자본의 논리에서 '수요가 없는 데이터'로 분류되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필요로 하는 데이터는 어떻게든 살아남는다. 웹 어딘가에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선택받지 못한 데이터들은 그 흔적마저 사라진다. 그 기록이 개인적일수록 소멸의 속도는 더욱 빠르다.


과거 아날로그 시대의 기록물들은 물리적 실체를 가졌기에 생명력이 끈질겼다. LP에서 CD와 DVD로 이어지는 매체들은 비록 부피를 차지할지언정 어딘가에 '남겨짐'으로써 역사를 증명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클라우드와 스트리밍으로 전이된 디지털 시대의 데이터들은 가혹한 운명에 놓였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저장 장치에 보존하지 않는 한, 서비스의 종료와 함께 데이터는 우주의 먼지처럼 사라져 버린다.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유니텔, 그리고 개인적으로 애정했던 키텔. '텔넷 시대'의 방대한 텍스트 데이터들은 서비스가 종료된 순간 사라져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로스트 미디어가 되었다고 한다. 그 시대를 지나온 사람이라면 당시의 밀도 높은 논의와 순수한 열정이 지금 시대에 얼마나 가치를 지닐지 알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언어를 학습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데이터를 긁어모으는 지금, 90년대의 인간의 사유가 담겼던 기록들을 잃어버렸다. 그런 텍스트들이 미래에 가치를 가질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시의 자본은 그 가치를 0으로 환산했고, 삭제해버렸다.


자본이 선택하지 않은 기억은 '망각'이라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들이 보기에 "가장 먼저 지워도 될 것들"로 치부되어 사라진 자료들은 그 시대를 증명할 가장 순수한 파편들이었던 것이다. 결국 자본이 휘두른 삭제의 칼날은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를 통째로 들어내어, 90년대를 기록이 부재하는 '실종된 시대'로 만들어 버렸다.


로스트 미디어를 지키는 비효율의 숭고함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고, 지킬 이유조차 없어 보이는 데이터들이, 미래 어느 시점에는 가치가 폭발적으로 치솟을 수 도 있다. 물리적인 골동품이 세월의 풍파를 겪고 나면 어느 순간 가치가 상승하듯이, 형체 없는 데이터도 시간이 흐르면 그 시대를 증명하고 복원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세계 곳곳에서 인터넷상의 데이터들을 수집해 보관하는 '디지털 아카이브'가 만들어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이유로 개인적으로 외장 하드를 그렇게 모으고 보관하고 있는 건 아니다. 거창한 대의명분보다는, 개인적으로 그것들을 찾지 못하는 시대가 오게 될지 모른다는 근원적인 불안감이 더 큰 이유다.


얼마 전 대규모 정전사태에 웨이모의 자율주행 택시들이 올 스톱되어 샌프란시스코 도로는 대 혼란이 왔다.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로 인해 일부 시스템의 데이터는 백업 데이터까지 모두 유실되었다. 이런 사건을 보면서 클라우드와 스트리밍은 거대한 신기루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되었다. 영상과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들, 텍스트 기반의 여러 게시판들에게 이런 일이 없으란 법이 있을까?


IT 기업들의 서버는 모두 대비를 하고 있겠지만, 예외적으로 파괴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말란 법이 없다. 모르는 사이 우리는 모든 기억을 외주에 의존하고 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는지, 무엇을 썼는지, 그리고 얼마나 보고 들었는지. 그들의 플러그가 뽑히면 우리의 기억은 뿌리째 뽑혀나간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말이다.


그렇기에 자신에게 소중한 데이터는 스스로 보존을 해야 한다. 비록 외장 하드를 사고 데이터를 옮기는 번거로운 수고를 동반할지라도, 자신만의 디지털 방주는 스스로 구축을 해놓아야 세상에서 잊혀진다해도 나에게선 잊혀지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이 모두가 효율만 찾으며 가장 빠르게 가는 방법을 찾는 시대에 가장 느리고 비효율적인 보존을 선택한 이유다.


기록되지 않은 시간, 왜곡될 미래를 위하여


지금의 천정부지로 치솟은 외장하드 가격이 영원히 가지는 않길 바란다. 어느 음모론의 시나리오처럼, 하드웨어의 가격을 의도적으로 높여 인류의 모든 데이터를 클라우드라는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가두려는 시도가 현실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언젠가 하드 가격이 정상화되었을 때, 그 높은 가격 장벽 때문에 기록되지 못한 채 소거된 시간들이 있다면 어찌 될 것인가. 그 공백의 기간은 과거 '텔넷의 시대'가 그러했듯, 후대에게 영원히 '실종된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 역사에서 기록되지 않은 빈자리는 결코 비어 있지 않는다. 그 자리는 후세의 자의적인 해석과 왜곡된 추측으로 점령당하기 마련이다. 오늘날 인터넷을 떠도는 과거에 대한 잘못된 정보들이, 실종된 시대를 통과한 후손들이 써 내려간 일종의 '대체 역사 소설'임을 상기해 보면 이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기록이 부재하는 곳에서 진실은 힘을 잃고, 허구는 역사의 가면을 쓴다.


기억의 영토를 지키는 일은 단순히 데이터를 쌓아두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미래의 누군가가 나의 시대를 마음대로 재단하지 못하게 막는 최후의 보루다.


당신은 오늘, 무엇을 지우고 무엇을 남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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