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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n 매거진 Sep 18. 2023

15년만에 다시 토슈즈를 신었다

의사가 된 발레리나, 박주혜 원장 인터뷰

일곱 살 때부터 발레를 시작해 각종 전국 대회에서 수상한 발레 꿈나무는
열여섯 살 나이에 신체 조건의 한계를 느끼고 발레를 그만둔다.
좌절도 잠시, 새로운 꿈을 향해 정진해 마침내 의사가 되었다.
의사가 된 발레리나, 박주혜 원장을 만나 발레와 의학에 대해 물었다.
ⓒ 박주혜

8년간 발레 전공 후 진로를 변경했다

어릴 때는 감춰져 있던 신체 단점이 2차성징 이후 두드러지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한계가 명확해졌다. 특히 턴아웃(발뒤꿈치를 붙이고 발끝이 180도가 되도록 하는 발레의 기본 동작)이 그랬다. 성공으로 가는 길이 매우 좁은 발레계에서 스스로의 기준에 미치지 못해 압박감에 시달렸다. 진로를 변경하기로 결심하고 당시 재학 중이던 예원학교에서 인문계 고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평소 어려운 것을 쉽게 풀어 설명하는 것을 좋아하고, 잘하는 편이었다. 이를 잘 살릴 수 있는 직업이 의사라고 생각했다. 환자들은 내 몸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잘 모르니 두려워하는 경우가 많다. 의사는 의학적 지식과 명확한 설명을 통해 이런 두려움을 일정 부분 해소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뿐 아니라 발레를 했던 경험을 접목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 의사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진로 변경 이후 힘든 점은 없었나?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던 것을 그만둬야 하는 아쉬움이나 참담함도 분명 있었다. 그러나 진로 변경 후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너무 오랜 기간 좌절을 느끼고 육체적으로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전학을 간 이후에도 음악이 들릴 때마다 춤을 추고 싶기도 했지만 체중 조절과 혹독한 경쟁으로부터의 해방감이 더 컸다.


선행학습을 마친 친구들을 따라가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9등급에서 1등급이 되었다거나 하는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없다. 이전 학교에서도 발레와 학업을 병행해 왔기 때문이다. 진로 변경 후 학업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고, 시간을 더 투자하니 그 친구들을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게 되었다. 고등학생 시절을 생각하면 바들바들 떨면서 열심히 공부한 기억이 선명하다.(웃음)

발레 경험이 공부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되었나?

의학 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로 한다는 말이 있다. 바른 자세와 체력을 갖추고 있어야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머리가 좋은 친구들은 한 번 보고 외우고 응용하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그런 경우가 아니었다. 결국 누가 책상 앞에서 끈기 있게 오랜 시간 집중할 수 있느냐의 싸움인데, 발레를 하면서 기른 체력이 큰 도움이 됐다. 발레를 전공할 당시 했던 스트레칭이나 운동을 꾸준히 하면서 체력적으로 지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의학 공부가 발레를 이해하는 데 어떤 영향을 주었나?

발레를 전공하면서 내 몸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해부학을 제대로 배우고 나니 이전까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내 몸이 너무나 새롭게 느껴졌다. 뼈, 근육, 인대 등의 위치와 쓰임새 등을 공부한 후 발레 동작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다.


예를 들어 턴아웃은 단순히 발만 팔자걸음처럼 바깥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다. 고관절의 넙다리뼈 머리부터 그 아래 모든 다리를 통째로 바깥으로 돌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고관절 외회전에 기여하는 심부외회전근에 집중해야 한다. 또 고관절 외회전을 방해하는 엉덩넙다리인대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스트레칭이 필요하다. 이렇듯 한 동작을 하기 위해 여러 신체 부위가 복합적으로 활용되는 것이다. 의학 공부를 하기 전에는 이런 것을 전혀 몰랐다. 동작 원리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나니 ‘척추를 쌓아 올려라’, ‘안쪽 허벅지를 꺼내라’ 같은 추상적인 설명이 조금 더 명쾌하게 다가왔다.


공부를 하며 위로와 치유의 감정도 느꼈다. 예전에는 턴아웃이 막연히 두려웠다. 그런데 해부학을 바탕으로 몸의 어떤 부분 때문에 동작이 잘되지 않는지 면밀히 탐구하고 나니 두려움이 많이 사라졌다. 이 과정이 내게는 큰 위안이 됐다.


블로그에 발레와 해부학 관련 글을 게시하고 있다

의학을 공부하며 이전보다는 단단한 마음으로 발레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내가 느낀 감정을 기록하고 공유하고 싶었다. 발레를 전공하는 사람이든 취미로 하는 사람이든,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키워드는 발레의 기본 동작이자 나에게는 애증의 동작인 턴아웃이 적합할 것 같았다. 뼈, 관절, 인대, 근육, 힘줄, 장기 등 턴아웃을 이해할 수 있는 해부학적 지식을 쉽게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작성하고 있다. 추후 의학과 연계된 발레 연구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 설명하는 글을 써보고 싶다. 명확히 알고 나면 막연한 두려움도 많이 사라지니까.


발레와 의학을 모두 경험해 본 입장에서 두 분야가 비슷한 부분이 있나?

모든 분야가 그렇겠지만, 발레와 의학은 특히나 탄탄한 기본기가 중요하다. 발레는 기초를 탄탄하게 하지 않으면 동작을 정확하게 수행할 수 없다. 기본이 되는 근육운동과 스트레칭, 플로우 워크를반복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발레 동작이 나오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의학 역시 뼈나 인대, 장기 등 기본기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어야 전체 구조를 볼 수 있다. 오랜 시간을 들여 신체에 대해 배우지 않으면 전문성을 갖춰 환자를 진찰할 수 없다.

발레를 그만둔 지 15년 만에 취미 발레를 시작했다

발레는 언제나 하고 싶었다. 비록 전문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음악이 나오면 표현하고 싶고, 춤을 추고 싶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예술적 본능을 충족하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고 싶고, 표현하고 싶어 하는 본능.


처음 발레 수업을 갔는데, 물을 잔뜩 먹은 솜이불처럼 몸이 너무 무거웠다. 몸이 예전처럼 마음대로 움직여주지도 않고, 체력이나 지구력도 많이 떨어져 있었다. 옛날 생각만 하면서 ‘이 정도 땀을 냈으니 이 동작은 해도 되겠지?’ 했다가 근육이 찢어져 2주 동안 수업에 못 나가기도 했다.(웃음) 처음에는 절망했는데,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조금씩 연습해 보려 하고 있다.


턴아웃을 대하는 사고도 유연해졌다. 예전에는 억지로라도 발을 180도로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완벽한 턴아웃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보니 스트레스도 많았다. 그렇지만 지금은 예전처럼 무리하지 않는다. 반드시 써야 하는 근육만 사용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동작을 하고 있다.


발레를 다시 시작한 후 어떤 변화가 생겼나?

발레가 재미있으니까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발레 수업에 가지 않는 날에는 헬스나 맨몸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운동을 하면 그다음 주에 발레를 하러 갔을 때 동작이 훨씬 잘되고 몸도 가볍다. 체력이 좋아지니 일상생활을 해나가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됐다. 정신적으로도 긍정적 변화가 생겼다. 전공생 시절 스스로를 힘들게 했던 것들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취미를 찾고 있는 이들에게 발레를 추천하고 싶은가?

권하고 싶다. 신체적·정신적 측면 모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체력이 길러지는 것은 물론, 카타르시스도 느낄 수 있다. 동작을 하거나 작품을 하면 성취감이나 쾌감을 경험할 수 있고 응어리진 감정도 풀린다.


처음으로 무엇인가를 시작할 때, 거기에 재미를 붙일 수 있는지가 상당히 중요하지 않나. 발레는 ‘덕질’을 할 수 있는 요소가 많다. 발레단마다 느낌이 다르고, 작품마다 결말이나 의상의 느낌도 다르다. 이런 부분을 찾다 보면 어느새 발레의 매력에 푹 빠져들 것이다.


취미 발레,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요즘에는 취미 발레의 문턱이 정말 낮아졌다. 대중화되면서 학원이나 연습실도 많이 생겼다. 입문 장비도 저렴한 것이 많다. 우선 학원에 등록해 조금씩 배워보는 것을 권한다. 다만 발레만 하는 것은 추천하지 않는다. 일주일 내내 쉬다가 학원에 가서 무리하게 진도를 따라가다 가는 다치거나 원하는 대로 동작이 나오지 않아 흥미를 잃을 수 있다. 헬스나 필라테스 같은 운동을 통해 체력이나 유연성을 길러가며 병행하는 것이 좋다.


발레 하는 의사로서 목표가 있다면?

발레를 일하는 과정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창구로 둘지, 본업의 영역으로 끌어들일지 고민하고 있다. 해외 사례를 보면 무용수들의 신체 부상이나 동작 향상 방법에 대한 연구가 많다. 대부분 재활의학이나 스포츠의학 분야의 논문이다. 발레를 했던 경험을 살려 그 분야로 진출할 계획도 있다.



ㅣ 덴 매거진 2023년 10월호

에디터 김보미(jany6993@mcircle.biz) 

사진 김태윤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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