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미안해지는 오늘이라 느끼지 마세요.
열다섯 시간 비행 끝에 인천 공항에 들어섰다. 가볍지만은 않은 걸음이었다. 이 년 만에 만난 시어머니는 고단했던 인생처럼 복잡하게 구불거리며 불거져 나온 짙은 혈관과 앙상한 뼈마디가 도드라진 두 팔로 나를 안아 주셨다. 꾸미지 못한 채 흩어진 회색머리가 민망하신지 ‘내 머리가 이렇다’ 하시며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신다. 더 이상 예의 날카로운 눈매는 없다. 무언가 깊은 곳에 침잠해 버린 듯 무거우면서도 묘하게 가벼워진 듯한 눈빛이었다. 시간에 맞춰 식사를 하고, 종류별로 다른 약을 먹고, 몇 걸음이라도 옮기는 힘겨운 운동을 하는 매일의 과제는 오늘을 사는 힘이면서도 그 무엇보다 어려운 도전이 되어 버린 구십 두 해의 인생. 희미한 빛을 내는 작은 전구처럼 어머님의 눈동자는 애처로웠다. 시계를 뚫어지게 보며 주어진 과제의 순서를 이어가는 어머님의 하루는 규칙적으로 깜빡이는 눈꺼풀의 속도만큼이나 지루하고 느리게 흘러갔다.
구십 세가 되셨어도 두 사람 분의 세끼 식사를 손수 챙기시고, 오목을 둘 때면 스물이 채 되지 않은 손녀에게도 지지 않으시려 애를 쓰셨던 어머님은 이제 너무도 가벼워진 몸을 조용히 소파에 기댄 채 미동도 없이 시계의 초침처럼 눈만 깜빡이신다. 인지가 느려진 것이 느껴지는 탓에 복잡한 것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어진 시간들. 옛이야기를 소상히 몇 번이고 들려주시곤 하던 2년 전의 만남과는 달리 어머님의 기억은 머리에서 서서히 지워지고 있었다. 며느리가 기억하는 이야기에 의지해 소멸해 가는 자신의 기억을 겨우 불러들여 오신다. 삶이란 무엇일까. 한 때 내 것이었으나 결국 그조차 확신할 수 없는, 길고 긴 삶의 끝자락에 들어선 분의 인생에 내 것을 겹쳐볼 때, 어찌해 볼 수 없는 삶의 길이 앞에 숙연해진다. 그리고, 암담해진다.
오래전 토론토 인근의 도시에 사는 캐나다 최고령 할머니의 인터뷰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흩뿌려진 작은 점들의 합이 만들어낸 그의 사진은 셀 수 없이 수많은 에피소드들의 모음으로 이뤄진 그의 길고 긴 인생을 보여주는 메타포처럼 느껴졌다. 아름다움은 다 걷혔지만, 다행스럽게도 인생의 선물처럼 남은 평화로운 웃음을 띤 할머니는 자신의 배우자, 자녀, 친구 모두를 앞서 보냈고, 이제 증손주를 동반한 손주들이 한 달에 한 번 방문해 기쁘다는 이야기를 남겼다. 서른 중반이었던 내게 그 감사는 아이러니하게도 길고도 긴 삶이 형벌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매우 구체적인 사례가 되었다.
어머님은 자신의 하루하루를 미안해하는 듯했다. 한 사람의 하루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수고가 드는지를 아는 이상, 그것을 인지할 능력과 자존심이 있는 한, ‘오늘’은 그저 타인을 향한 미안함의 시간이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길 바라는 마음과는 달리 또 하루가 시작되었을 때, 나를 위한 수고의 총합에 반응해야 하는 딜레마가 생긴다. 떨리는 손으로 수저를 들고, 힘겹게 음식을 입으로 옮기며, 몇 번이고 되씹고, 물을 마시고, 약을 삼키며 그토록 마치고 싶은 생을 잇는 행위들을 이어간다. 그렇게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을 또 살아낸다. 해가 지고 밤이 오면 과연 내일은 또 올 것인가 무엇을 꿈꾸는지조차 모를 잠을 청한다. 그렇게 미안한 하루를 마치고, 눈을 떴을 때, 또 미안한 하루가 시작된다. 미안함에 지루함을 더한 형벌을 살아내듯.
귀가 어두워지면서 희미하게 멀어져 가는 세상의 소리처럼 세상 저편으로 천천히 들어가고 계신 어머님과 이어지지 않는 이야기들을 띄엄띄엄 나눈다. 오늘의 어느 조각이 그렇게 채워진다. 황망히 보낸 시아버님이 요새는 많이 그립다 하시는 어머님의 목소리에 슬픔이 내려앉았다. 어머님은 기대하지도 않았을 또 다른 ‘오늘’에 나는 진심을 들고 걸어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