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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세스페코 Dec 18. 2019

가로세로병

오랫동안 '가로세로병'을 앓고 있는 나는, 눈에 보이는 대상물의 가로 행과 세로 열이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을 때 심리적 편안함을 느낀다. 일종의 디자이너 직업병 같은 이 병에 걸리면 안타깝게도 죽을 때까지 회복은 불가능하다. 일종의 불치병인 것이다.


디자인대학에 입학하게 되면 기본적으로 레이아웃에 관한 실습을 우선한다. 대게 '화면 또는 공간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가 실습의 최종 목표지만, 반복되는 레이아웃 실습은 결국 배치에 기본이 되는 '보는 능력'과 '정리 능력'을 향상하는데 도움을 준다. 가구를 배치하고, 옷장을 정리하고, 테이블 위를 꾸미는 등 사소하지만 일상적인 집안에서의 생활이 레이아웃과 결이 맞닿아 있어, 간결하고 단정한 살림을 유지하는데 '가로세로병'만 한 것도 없겠다 싶은 요즘이다.


어쩜 정리를 그렇게 잘하세요!
집이 너~무 깨끗해요!


인스타그램을 통해 집 생활을 공개한 지 1년 6개월 남짓이 흘렀다. 내 인스타그램 피드는 '정리와 깨끗함'에 관한 아낌없는 칭찬 댓글로 나날이 성장 중이다. 보통의 살림을 사는 내가 온라인 상에서 '정리의 달인', '청소의 달인'으로 공개적인 칭찬 세례를 받자니 신이 나서 어깨가 저절로 으쓱거려지지만, 진정한 살림 고수는 저편에 존재함을 잘 알고 있고, 때문에 나는 언제나처럼 이편에 서서 보통의 살림을 살아가는 중이다.


사실 정리는 '시각적 질서'에 관한 것이고 깨끗함은 '위생적 청결'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정리와 깨끗함은 전혀 다른 얘기임에도 이 둘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크다. 정리가 잘 된 집을 보면 (청소상태가 어떻든) 깨끗하고 단정한 집이라 평가하고 그 반대의 경우라면 (청소가 잘되어 있어도) 지저분하고 정신없는 집이라 평가하는 것이 보통이다. 눈에 보이는 '시각적 질서' 상태로 살림 전체 질에 대한 절대평가가 이루어짐이 새삼 놀랍다. 물론 청소 입장에서 보면 불공평한 잣대임이 분명하지만,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그렇게 보고, 또 그렇게 판단한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자기중심적 명제는, 결국 뇌 활동의 70%가 시감각에 의존한다는 과학적 사실이 밝혀지면서 기정 사실화되었다. 그만큼 시각은 강력하고 절대적이다.



K-팝의 성공요인을 다룰 때 '칼군무'를 빼놓지 않는 것은, '시각적 질서'가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감히 K-팝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미미하게나마 우리 집이 다른 이들에게 공감을 살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아마 내 살림에도 약간의 '시각적 질서'가 담겨있기 때문이었으리라 믿는다.


'가로세로병'이란 재미있는 병명처럼, 나는 본능적으로 가로선과 세로선에 맞춰 물건들을 정리하려 애쓴다. 수건을 접을 때, 선반에 물건을 올려놓을 때, 서랍을 정리할 때, 책을 꽂을 때, 그 어떤 순간에라도 말이다. 레이아웃의 가장 기본이 되는 '선의 정렬'. 이것이 바로 내가 사는 단정한 살림의 비밀 키다. 오랜 병증인 '가로세로병'이 나만의 살림 치트 키가 되는 순간, 가로세로에 대한 강박은 생활습관이 되어 내가 사는 보통의 살림을 조금 특별해 보이게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모두가 나처럼 가로세로에 대한 강박이 있지는 않을 터. 분명한 것은 강박 없이도, 살림은 언제든 단정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대명제에 따라, 살림을 정리하는데 '시각적 질서'를 맞춰줄 수 있다면 단정한 집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우리의 '눈'이 정돈됨을 느낄 수 있을 정도까지만 가로 행과 세로 열의 선을 맞춰주면 그만이다. 음식의 깊은 맛을 내는 데는 오랜 숙련이 필요하지만, 물건의 선을 맞추는 것은 지금 바로 시작할 수 있다.


행여 사진 속 우리 집처럼 깔끔하게 정돈된 살림을 살고 싶은 이들이 있다면, 집이라는 3차원 공간 속에서 우선 한 장소만을 선택해 가로선과 세로선을 맞추는 '선의 정렬'을 시작해보자. 양말을 가지런히 개어 색깔별로 나누어 양말 통에 넣어보고, 수건의 모서리를 직각으로 반듯하게 개어보고, 모니터와 키보드의 위치를 정 가운데에 맞춰 배치해보고, 테이블 위의 컵과 주전자를 옆으로 나란히 올려놓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다. 장소에 따라 한번 찾은 최적의 배열은 이후 쭉~ 단정한 살림을 사는 공식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포함한 수많은 집 생활자들은 매일 다른 모습의 살림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매일의 기분과 날씨에 따라 집안의 모습을 바꾸고, 어제보다 편리한 생활에 대해 고민한다. 나만 만족하는 집이 아닌 가족 모두가 만족하는 집이 될 수 있도록, 오늘의 살림을 계획하고 그것을 실행한다. 우리는 인스타그램 피드에 띄워져 있는 멈춰있는 순간의 모습을 사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찰나의 순간이 아닌, 그저 찰나의 순간을 스쳐가는 연속된 시공간 속에서 가족 모두가 만족하는 살림을 매일 살아내야 한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눈'에게 약간의 '시각적 질서'를 보여줘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눈'은 질서 있는 살림을 단정한 살림이라 믿으며 만족해할 테니 말이다.  


-end-




@mrs.pec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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