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간의 완전 채식 실험은 끝났지만, 계속해서 채식을 유지하려면 나만의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도 계속 완전 채식을 유지할 것인지, 그렇다면 회사 동료들과의 식사 자리는 어떻게 해야할 지에 관한 것들 말이다.
일단 식단에 관해서라면 나는 늘 완전 채식을 지향할 것이다. 나에게 선택지가 있다면 완전 채식 식단을 선택하겠다는 뜻이다. 이건 나 혼자 집에서 먹거나 내게 메뉴 선택권이 있을때에 가능한 방법이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어떻게 할까? 내가 분명하게 앞으로도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밝힌다면 무얼 먹을지 대안을 내놓거나 그냥 어디든 간 다음에 아무것도 먹지 않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대안은 대개의 경우 존재하지 않고, 그렇다고 아무데나 가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을 자신도 없다. 물론 실제로 많은 채식인들이 이렇게 행동하기도 한다. 그들의 채식에 대한 의지는 존경하지만 꼭 이 방법밖에 없는 것일까?
최근 해외의 식품기업이나 외식업계의 경향을 보면 '비건(Vegan)'이라는 표현보다는 '식물성 기반(Plant-based)'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고 한다. 그 이유는 비건이라는 표현은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어 비채식인들이 다가가기 어려운 인상을 주는 반면 식물성 기반이라고 하면 훨씬 열려있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채식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추기 위해 '식물성 기반'이라는 표현을 선호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나는 평소 채식주의자의 세계가 다소 닫혀있는 느낌이 들어 늘 아쉽게 느껴졌다. 채식이 별게 아닌데도 말이다. 나는 채식을 하려는 것이지 비건이 되려는 것은 분명 아니다. 내가 채식을 하려던 목적을 잊고 비건이라는 단어와 철학에만 집착한다면 오히려 채식의 대중화라는 관점에서 해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건 비건의 본래 의도에서도 벗어나는 일이다.
따라서 회사 동료들과 식사자리에서는 엄격한 채식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들이 먹는 만큼은 먹지 않겠지만 적어도 나도 함께 식사에 참여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해야 채식을 조금 더 드러낼 수 있을지 고민할 것이다. 내가 느슨하게 채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누구나 채식에 다가갈 수 있다는 인상을 줄 것이다.
비채식인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그저 고기를 먹기 위해서 합리화 하는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일단 화가 나지만 나는 진심으로 이게 올바른 태도라고 생각한다. 일부러 육식을 함으로써 채식에 대한 순결을 스스로 깨버리는 것이다. 비건이라는 관념에 몰두하는 대신에 채식의 본질을 실천으로써 유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를 타협이 아닌 상대의 입장에 서는 것으로 보면 어떨까. 상대의 입장에 서서 상대의 언어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대개 사람들은 듣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했을 때 이건 사실 최선의 전략이다. 내가 채식을 하는 목적이 단지 죄책감의 개인적인 해소가 아닌 채식의 대중화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면 말이다.
비채식인들과 함께 식당에 간다면 가급적 육류를 덜 담은 메뉴를 선택한다. 고깃집에 가서 고기를 먹지만 적게 먹도록 노력한다. 하지만 남기지는 않는다. 채식을 사람들의 머리에 인지시킬 수 있는 기회를 찾는다. 그러나 여의치 않다면 그것도 그만둔다. 사실 그런 직접 대면에서 사람을 바꾸려 하기보다는 간접적으로 그들이 채식을 느끼도록 하는게 더 효과적일 때도 있다. 따라서 채식인들의 커뮤니티를 만들고 변화를 위한 활동에 참여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건 스스로 죄책감에 매몰되지 않는 일이다. 그러므로 채식의 대중화라는 큰 관점에서 스스로 할 수 있는 만큼만 한다. 뜻대로 잘 되지 않더라도 그건 이미 경직되어진 세상에서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한다. 이렇게 마냥 고기를 먹어도 될까? 이런식으로 너무 헤이해진다면 결국 채식을 안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실제 그랬던 경험도 있기에 더 그렇다. 이런 마음이 든다면 한가지 조건을 만들 수도 있다. 주 1회와 같이 횟수를 정해놓고 식단에 자유를 허락하는 식이다. 필요하다면 1회 정도는 자유롭게 식사를 하고, 그 이상은 먹지 않도록 한다. 이는 우리가 탄소세라는 개념을 만들고 탄소 배출권을 거래하는 것과도 비슷하게 생각할 수 있다.
내가 아끼는 한 친구는 최근 '플렉시테리언'이라는 용어를 처음 접하고 너무나 반가웠다고 한다. '플렉시테리언'은 비건과 같이 채식주의의 한 종류로서, 가급적 육류를 멀리하되 상황에 따라 먹기도 하는 그룹을 말한다. 그로써는 채식의 방향에는 공감하지만 실천하기에는 너무나 먼 존재였기에 이런 개념으로 부담없이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던 것이다. 채식을 좀 더 포용적으로 접근한다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을 채식으로 끌어들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미국의 사회운동가이자 오바마의 정신적 멘토로도 알려진 사울 알린스키는 그의 저서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의사소통은 청중의 경험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타인의 가치관을 온전히 존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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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익숙한 경험이 주는 안전으로부터 갑작스럽게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의 경험에서부터 새로운 방식으로 나아가기 위한 다리를 필요로 한다.
…
또 행동이란 주어진 시간과 상황 안에서 시작해야지 절대로 낭만적인 기대나 이상적인 그림을 그리고 시작해서는 안 된다.
플랙시테리언이라는 개념이나 비건 대신 채식을 강조하는 것은 비채식인이 채식으로 넘어가기 위한 다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채식의 순결이라는 낭만적인 이상을 드러내기 보다는 사람들이 익숙한 언어로 이야기하고 그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변화하게끔 설득해야 한다.
흔히 개인적인 신념의 구현을 위해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사례를 목격하곤 한다. 그런 식의 접근은 원래의 목표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는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어디서든 마찬가지이다. 쉽게 변화하지 않는 세상이 다소 답답하더라도 조금씩 움직이는 것이 스스로에게도 지치지 않고 오랫동안 지속하는 힘이 되어주지 않을까. 결국 우리는 함께 사는 것이고 각자는 사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
행동은 집단의 구원을 위한 것이지 한 사람의 개인적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개인적 양심을 위하여 집단의 이득을 희생시키는 사람은 '개인적 구원'에 대한 남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 사울 알린스키,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