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 사니까 외국인을 만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프랑스로 유학을 온 내가 이탈리아 사람을, 그것도 이탈리아 땅끝의 지중해 사람을 만날 줄은 몰랐다. 이탈리아 남부는 서울에서 약 8860km 떨어져 있다. 말 그대로 지구 반대편.
기다리는 걸 무척 싫어하는 나를, 첫 만남에 무려 40분이나 기다리게 만든 사람.
시간 개념도 없고 외모도 성격도 딱히 내 스타일이 아니어서, 절대 이 사람과 사귈 일은 없겠구나 했던 사람.
그 사람과 나는 이제 죽고 못 사는 사이로 지내고 있다.
도대체 왜?!
영화이론 중에 쿨레쇼프 효과라는 게 있다. 똑같은 샷이라도 그 앞뒤 샷의 맥락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는 것이다. 모든 건 상대적이다. 한국에서 나름 진보, 개방, 또라이 등의 소리를 듣던 내가, 유럽에 와보니 개뿔, 그 누구보다 K보수유교걸이었다. 유럽이라는 환경은 내 안에 숨어있던 보수성을 낱낱이 드러냈다.
한국에서 항상 무교인 집에 태어나서 천만다행이라 하곤 했다. 원죄의식이 없는 자유인으로 살 수 있으니까, 죄가 아닌 것에 죄책감 갖지 않고 살 수 있으니까. 그런데 웬걸, 유럽에 와보니 한국에서 나고 자란 것 자체가 종교의 원죄의식 못지않게 내 자유를 갉아먹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걱정이나 죄책감의 근원을 파고 들어가 보면 효, 눈치, 체면치레 등 유럽인들은 이해하기도 힘들 K사상인 경우가 파다하다.
반면, 그는 자유인이다. 직업만 보면 예술가인 내가 더 자유인 같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그는 '뭣이 중헌지' 아는 사람이고, 그래서 '웬만하면' 행복한 사람이다. 나는 그 사람에게서 진정한 자유인이란 어떤 모습인지를 어렴풋이 본다. 지중해 햇빛을 받고 자란 그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연상시키곤 한다. 조르바에 카잔차키스의 먹물을 더하고 미소지니는 뺀 느낌이랄까. (쓰고 보니 엄청난 과찬인데...)
이것이 '도대체 왜?'에 대한 답이다. 그에게서 자유와 행복을 어렴풋이 배우고 있기 때문에. 행복할 줄 아는 사람의 옆에 있다는 건 엄청난 행운이다.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 '행복할 줄 아는' 사람인 건, 그것이 주어진 환경(수동적 이유)보다는 선택(적극적 의지)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GOD, grant me the serenity to accept the things I cannot change,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I can, and the wisdom to know the difference.
주여, 나에게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과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 그리고 이 두 가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 The Serenity Prayer>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1892~1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