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의 시선 Oct 12. 2024

강아지별

펩시를 떠나보내며 

이누가 사라진 지도 벌써 일 년이 넘었다. 2023년 9월 초에 시골에서 사라진 이누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아직까지 이누를 찾는 현수막들이 할머니 댁 동네 곳곳에 걸려있지만, 이누는 돌아오지 않았고 그가 돌아오리라는 믿음도 서서히 사라졌다. 


2024년 10월 11일. 펩시는 어제 죽었다. 펩시의 일대기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2014년 전주의 한 병원에서 아버지는 수술(어깨 수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을 마치고 퇴원하는 기념으로 강아지를 가정분양 받자고 하셨다.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 도착한 어느 시골집에서 아기 라브라도 리트리버로 태어난 강아지들. 아버지는 내게 한 명을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을 주었다. "누가 가장 건강해요?" 라고 나는 물었던 것 같다. 그중 가장 뽀얗고 몽글몽글하게 생긴 크림색 강아지를 가리키며, "애로 할게요!" 라고 했다. 물건을 가리키듯 말하긴 했지만, 그 순간 펩시는 내 동생이 되었고, 나는 널 정말 잘 보살펴 주겠다고 굳은 다짐을 했다. 열네 살이었던 윤은 그 시골마을이 어디인지 궁금하지 않았고, 강아지를 만날 생각에 들뜬 마음을 부여잡고 있을 뿐이었다. 당시 아버지가 어머니를 부르던 애칭은 '펩시'였다. 이유는 나도 모른다. 그래서 자연스레(?) 하얀 강아지의 이름은 펩시가 되었다. 

세상살이 한 달째 되는 강아지를 품에 안고 집에 왔다. 꼬물이 시절의 펩시는 한동안 울타리 안에서 생활하며 온 가족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바닥에는 주기적으로 똥을 싸고 그걸 밟고 뭉개어 기어코 하얀 털에 똥을 묻혔다. 똥 오줌을 치우는 일은 대개 나의 몫이었다. 바닥에 눌러붙은 똥을 박박 닦아내는 일도, 소독약품으로 한 겹 더하는 일도 모두. 누군가를 이렇게 돌보았던 적이 내 인생에는 별로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당시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열네 살이었다. 펩시에게 돌봄을 제공했던 것은 우리 가족 뿐이 아니었다. 나의 친구들은 펩시를 함께 돌보았다. 관련해서 기억에 남는 일화가 하나 있다. 원과 윤은 같은 아파트의 같은 동, 바로 옆 라인에 살았다. 그래서 원은 윤과 펩시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느 날, 윤은 펩시가 꽤 많이 커진 시점에 시원하게 목욕을 시켜주려고 펩시를 잠시 욕실에 묶어두었는데... 십 분도 채 안 되었을 것이다. 펩시는 욕실 타일에 똥을 싸고 그 똥을 밟고 뭉개고.. 한마디로 욕실 바닥 전체에 똥칠을 해놓은 것이다. 아기 때는 똥의 양이 많지 않아, 혼자 처리할 수 있었는데. 당시 눈 앞에 펼쳐진 똥의 양에 압도당해.. 너무 무서웠던 것이다. 나는 원에게 전화를 걸어서 똥 치우기를 도와달라고 했다. 원은 윤의 집 화장실에 와서 같이 똥을 치웠다. 십 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이 글을 빌려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원아 고마웠어. 원의 아버지는 보고 걔는 이상하다고 했다고 한다. 인정할 밖에 없다. 강아지가 똥을 쌌다고 친구를 부르다니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펩시를 한 손으로 들 수 있을 때까지 펩시는 윤의 어머니가 운영하시는 수학학원의 상주견이었다. 크기가 너무 작고, 하루 중 2/3 정도를 잠을 자는 아기 강아지라, 엄마는 수업 내내 펩시를 품에 안고 수업을 했다. 그러다 쉬는 시간에 잊지않고 젖병에 담긴 분유를 먹였다. 윤은 그런 엄마의 모습이 좋았다.  


펩시는 덩치도 좋고 눈치도 빠른 사람 좋아하는 리트리버의 특성을 고루 갖춘 강아지로 자랐다. 산책하다가 자신을 예뻐해주는 사람이 나타나면 발라당 몸을 뒤집어 배를 보인다. 긁어달라는 뜻이다. 성견이 된 펩시는 번의 출산을 했다. 아버지는 펩시를 교배시키러 간다고 했다. 당시 나는 교배가 무엇인지 알지 못해서 펩시가 남성 강아지를 만나러 간다고만 생각했다. 여자와 남자가 만나서 통하면(?) 아기가 생긴다고 생각했던 시절이다. 중학생 윤은 섹스에 대해 알지 못했던 것이다. 펩시에게 번이나 '교배'를 시키다니, 돌아갈 있다면 말렸을 것이다. 그렇게 동생 펩시는 임신을 했고 그낳은 강아지 명은 애림에게, 다른 명은 진명에게 입양을 갔다. 애림은 검정 강아지를 데려갔고, 그의 이름은 맥스다. 진명은 연갈색 강아지를 데려갔고, 그의 이름은 외모에 걸맞게 인절미로 지어졌다.


고등학생 시절의 윤은 3년동안 기숙사에 살았다. 그러면서 펩시는 차로 30분 거리 떨어진 할머니댁으로 보내졌고 주말에 종종 아버지와 함께 윤을 데리러 왔다. 토요일 오후에 한 주동안 사용한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기숙사 밖으로 나오면 우리 아버지 차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많은 경우 이누와 펩시 둘 중 한명이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차에 타기 전 한참을 반갑다고 인사를 하고 차에 타서도 쓰다듬고, 안고, 끊임없이 말을 거는 누나이고 언니였다. 


할머니 댁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펩시는 예쁨을 받았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이구동성으로 키우고 있는 강아지 중에 펩시가 제일 착하고 예쁘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시골에 사는 큰 강아지들은 묶여서 자란다. 나는 그게 너무 미안하고 슬펐고, 이것은 학대라고 아버지에게 여러 차례 말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할머니댁에 갈 때마다 이누나 잼잼이와 함께 펩시를 저 멀리 숲속까지 데리고 나갔다. 펩시는 어떻게 변함없이 살갑고 따뜻할까. 내가 너를 여기에 두어서 정말 미안해. 어떻게 열 살이 넘은 지금도 힘이 이렇게 세지? 나는 못 당해보겠다! 이런 생각들을 하며 걸었다. 그런데 이번 추석 연휴에는 서울행 버스 탑승 시간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할머니댁에 도착해서, 펩시와 산책나가는 루틴을 지키지 못했다. 그건 우리 사이 무언의 약속이었는데. 그래서 펩시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고는 급히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주변의 흙먼지가 날릴 만큼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앉아서 날 보던 펩시. 그게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펩시의 모습이다. 그 한 번의 산책을 하지 못한 것이 마음을 너무나 힘들게 한다.  


이 글을 적기로 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슬픔을 흘려보낼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가장 고전적인 글쓰기를 선택했다. 둘째는, 펩시와 있었던 기억이 무척 드문드문 기억이 나기 때문이다. 조금 있으면 이것들마저도 다 잊어버릴 것 같았다. 기억이 휘발되지 않고 추억으로 남을 수 있도록 적었다. 







작가의 이전글 안전하다는 감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