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게 달린 나에게, 은퇴가 준 느린 하루

느린 속도의 행복

by 제드 Jed

빠르게 달렸다.

마치 잠시라도 멈추면 세상에서 뒤처질 것처럼,

매일 시계를 쫓았다.


회의 시간, 마감 시간, 약속 시간…

내 하루는 온통 ‘시간’이라는 경주로 채워져 있었다.
그렇게 숨 가쁘게 달리다 보니,

내가 왜 달리는 지도 모르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러다 은퇴가 왔다.
누군가에게는 종착역이지만,

내겐 처음으로 기차에서 내려

숨을 고를 수 있는 역이었다.


시계 초침이 아닌,

창밖의 햇살과 바람이 나의 하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은퇴를 앞둔 사람들에게 종종 물어본다.
“퇴직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게 뭐예요?”

놀랍게도 답은 거창하지 않다.


아침에 알람 없이 일어나기,

아내와 동네 산책하기,

책 한 권 하루 종일 읽기.


어쩌면 평생 할 수 있었지만,

늘 ‘나중에’로 미뤄온 일들이다.


나 역시 그랬다.
회사 다니는 동안, ‘하고 싶은 일’ 목록은

늘어만 갔다.


영화제에서 하루 종일 영화 보기,

한 달간 그림 수업 듣기,

남도 여행 다녀오기.


메모장에 차곡차곡 쌓아두었지만,

현실은 회의와 보고서, 야근과 출장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그 목록은 결국, ‘은퇴 후’라는

서랍 속 깊은 곳에 들어갔다.


그 서랍을 다시 열다


은퇴 후 맞이한 월요일 아침,

눈을 떴을 때 낯선 기분이 들었다.


휴대폰 시계에는 8시 10분.
예전 같으면 이미 지하철 안에서 출근 전

메일을 확인하고 있었을 시간이었다.


그날 나는 서랍 속 목록을 꺼냈다.
먼지가 내려앉은 메모장 속 첫 번째 문장은

‘천천히 걷기’.


그동안 늘 목적지가 있어야만 걷던 발걸음이,

처음으로 아무 이유 없이 거리를 걸었다.


햇살이 따뜻했고,

바람은 가볍게 볼을 스쳤다.


책가방을 든 학생들,

꽃집 앞에 선 아주머니,

고양이 한 마리까지…
모든 게 여유롭게 보였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느리게 걷는 법’을 배운 건,

은퇴가 준 가장 큰 선물 중 하나였다.


시간의 속도를 되찾다


직장 생활을 하던 때는 하루가 너무 짧았다.
회의에 쫓기고, 마감에 쫓기고,

퇴근 후에도 메신저 알림에 마음이 쫓겼다.


시간이 나를 끌고 다녔다면,

이제는 내가 시간을 이끌고 있었다.


아침에 커피를 내리고,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


점심 무렵,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았던

동네 식당에서 느긋하게 식사하는 시간.


오후에는 도서관에 들러

한 권의 책을 골라 앉아 읽는 시간.


예전에는 상상조차 못 했던

‘사치스러운 하루’가 가능해졌다.


이렇게 하루의 속도를 되찾으니,

예전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거리의 계절 변화,

이웃의 안부,

내가 미뤄왔던 꿈의 흔적까지.


미뤄둔 꿈과 다시 마주하다


그동안의 나는 늘

‘해야 하는 일’에 묶여 살았다.
하지만 은퇴 후의 나는

‘하고 싶은 일’을 먼저 고를 수 있었다.


마침내 시작한 그림 수업에서,

나는 서툰 붓질을 하며 웃었다.


예전 같으면 그림이 삐뚤게 그려질까

걱정했겠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즐거웠다.


남도 여행을 떠나 한적한 마을에서

바다를 보며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써보고 싶었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글로 옮기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건,

나이가 주는 ‘속도의 힘’ 덕분이었다.

빨리 가야 할 이유가 없으니,

느리게 즐길 수 있었다.


마무리하며


은퇴는 끝이 아니라, 목록을 다시 펼칠 기회다.
그리고 그 목록 속에는 어쩌면 아주 사소하지만,

나를 미소 짓게 하는 일들이 가득하다.


빠르게 달려오느라 놓쳤던 것들, 미뤄뒀던 순간들,

그 모든 걸 천천히 다시 주워 담는 시간.
그것이 은퇴의 진짜 의미다.


오늘도 나는 서랍 속 목록을 한 장씩 꺼낸다.
그리고 그 위에 이렇게 적는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나를 채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