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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립스틱 짙게 바르고 Nov 03. 2024

90. 부딪히는 게 문제

- 피해 가고 타협하는 게 솔루션이면 안 되는데


휴일 낮 시간, 가만히 정신을 가다듬어 본다.

일을 많이 하던 때가 있었지.

그렇다고 지금의 나, 놀고 있는 건 아니다.. 마는


무엇이 손을 떼게 만들었더란 말인가.

부지런히 잰걸음을 놓다가

이 같은 시간을 일부러 만드는 건

나도 나를 다 알지 못해서는

삶을 잘 살아갈 수가 없겠기 때문이다.



같은 직급, 다른 느낌



OO이라고 다 같은 OO이 아니다.

다 같을 것이라 기대해서도, 요구해서도 안 된다.

넘쳐 나는 ‘권리’의 소유자들, 그 속에

보석 같은 몇몇이 묵묵히 일하고 있다.


발언권, 참여권, 이의 제기권 그리고 저항권까지.

그 어떤 권리에도 문제될 것은 없다. 보장된다.

하지만 그 모든 권리가 ‘반대’와 ‘태클’을 위해서

연쇄적으로 사용된다면

견뎌 낼 수가 없다.


사람의 마음은 ‘(너와 내가) 똑같다.’라는 생각에서

비교 후 쳐내기를 반복하길 여러 번 하면,

결국엔 하향 평준화된 표준에

풍부해지는 안도감으로 자족하고 끝나는 경향이 크다.


그래서 모두가 일에 대한 관점, 서로의 목표와 지향점, 세부적 일정, 계획을 공유할 것이 요구된다.

하지만 업무 이해도, 업무 능숙도, 그리고 각자 투입할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가 다 다르다.

그래서 ‘주도권’이 생기고

그것을 가진 자가 리드하는 일이 생긴다.


여기서 자기 자신이 잘 관리되어 있고 행복도가 높은 사람은 특별한 고민 없이 개인 생활과 직장 생활을

조화롭게 운용할 수 있다.

그런데 ‘컴플렉스’가 있다면,

그것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다른 장점이나 시선 변화로 극복되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고 고착되어 있다라면

굉장히 힘들어진다. 정확히는 ‘꼬인다.’


나는 그래서 단 한번 이라도 자신이 높다고 생각했던

 목표치를 채워 보는 ‘성공 경험’이 아주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일 저런 일이 안 풀리는 사람으로서

그저 불평 불만에 가득차

보기만 하면 물어뜯으려고 하고

말만 꺼내면 꼬투리를 잡는 인간상에

다년간 시달려 보고

내린 결론이 그랬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대리’였던 나에게

스스로가 모니터링했던 부분이었다.

결코 일하는 사람의 ‘발목’을 잡아선 안 된다,

찌질해서는 안 된다, 라고 하는, 늘 같은 지점이었다.


똑똑한 사람들은 그럴 시간이 없다.



지금 ‘혼자’인 이유



나는 사람이 사람을 가로막고 있는 구조를 반대한다.

같은 시험에 다섯 번 떨어져 보면

문득 정신이 들 때가 있다.

‘아, 이게 아닌가?’


내가 굳이 시험을 준비하느라 인간 관계를 멈추고

나이 어린 학생들이 들어 차 있는

스카(스터디카페)에서 날을 새우고

내가 굳이 같이 사는 가족끼리

차근히 식사를 만들어 먹는 시간마저 소거해 가면서

내가 굳이 하려고 했던 일이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내 안의 어떤 명예욕이 크게 자리잡았길래

어느날 나타나서 “나 시험에 합격해서 다음 달에 근무지를 바꿀 예정이야.(놀라도 돼.)”라고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상상에

그렇게 반복해서 홀딱 반했을까?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오래된 습관을

나는 그후로도 현재까지 계속 추적 중이다.



어떤 깨달음이 나를 불러 오기를



두근거리는 일들이 너무 많다.

가슴이 두근거리게 하는,

이제껏 몰랐던 세계의 논리에 눈 뜨는 일로 하루를

채워 간다.


하루는 누구나에게 스물 네 시간이지만

나는 최고조가 되었을 때,

내 마음이 간절하게 무엇에 다다르고자 했을 때

시간이 멈추고 그럼으로써

어느 날이 25시간 쯤 내 것이었음을 몇 번을 겪어서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간다.

“오로지 간절하기만 할 것!”


나는 혼자다. 왕따당했을 때 혼자가 되었고

그 이후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다가오지 않았고

나 역시 아직 많이 주저가 된다.


내가 혼자 나의 업무를 처리할 때에 비해

뭔가 사무실 내 의기투합이 필요해져서 그 안에 있을 때는

나의 ‘내적 고요’ 지수가 급등락한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쉴 때,

나의 주방에서 나 자신을 위한 음식을 끓일 때의

지수에는 어떤 것도 미치지 못한다.


‘나의 아저씨’라고 할 수 있는 원장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삼 년은 지나가야” 내가 나을 텐데

아직 채 일 년이 경과하지 않았으니 그럴 만도.


따돌림은 그렇게 사람의 뇌리에

궤적을 남긴다.


충돌’을 피할 수가 없었지만

아무 일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오랫동안,


‘부딪혀도 감당 가능하다고’ 자신이 있었지만

다수가 집단이 되어 모두가 나를 외면해 버리자

나의 어떤 방패도 무력해졌음을 그만큼이나 오랫동안


건강을 잃자 모든 것이 소용 없지 않았냐고

하면서 자책해 왔다.

‘부딪힌 게 문제’였다고 자조도 컸다.


하여간 피하기만 하는 모습으로,

그들이 몰려’ 올 때 도망치고 없어지는 나로

살지 않았다.

나는 한 두 단계를 앞서 가고 있었고

지금도 창의적인 자아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낄 때

참으로 살아 있구나.’라고 생각하는 과(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등을 피하지 않고 부딪혔던 내가

결코 물러서지 않았던 그런 내가

개인적 삶에서 만족을 추구하고만 살아가는 이유는


타협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하나의 타협은 또 다른 타협을 불러들여서

결국 죽도 밥도 아니게 될 일을 붙잡지 말자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월이 가면 내게

‘이렇게 되기 위해’ 그 시절을 겪었음을

시간이 알려 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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