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편의점
알다시피, 우리가 예쁨을
이야기하게 되는 때는, 대개
또 다른 시작으로 보는 봄인데,
여기 다가오는 이 계절에
당신의 예쁨을
새삼 즐기려고 합니다
여기저기 뒤적이며 읽은 것이라
제대로 읽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가 보는 아름다움은
조화, 절제, 관능, 매혹을 가진
아프로디테, 비너스로 그려지는데,
그들은 신화 속에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신화 속
인간의 세대가 대를 넘어가며
수명이 점차 짧아지는데도 불구하고
아름다웠던 인간들, 나르키소스,
아도니스 그리고 프시케,
트로이전쟁을 촉발한 헬레네 같은
이들을 모두 젊을 때 죽였습니다
왜 그렇게, 그러지 않아도
머지않아 죽을 인간들을
서둘러 죽여야 했을까요?
비뚤어진 내 시선으로 보면, 그것이
시사하는 것이 보이는데, 그들이
젊어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신이 가진 절대미는 영원하지만,
일과성 존재인 인간들이 가진 상대미는
시간의 희롱으로 하염없이
스러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해야 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나아가, 우리 자신이 본태적으로
아름다움이 시드는 것을
무서워하거나 회피한다는 걸
가르치려는 건가 싶기도 하지요
왜 이런 해석이 가능하냐면,
신화를 이야기하고, 써내려 온 것이
인간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신화는, 아름다움을 뽐낼 만한
화양연화 시기의 인간을
대개 젊을 때 죽도록 꾸며서
우리가 그들, 인간의 노추를
볼 수 없도록 만들고 있으니까요
(대체로 그렇다는 것이고,
예외가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을 감춰야 할
어쩔 수 없는 또다른 문제는,
신화에서 아름다움이라고 평가한
비너스나 아프로디테조차
갖춰야 할 아름다움의 요소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을 정도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쓴 신화에서 읽히는
아름다움은, 위에 썼듯이
범접할 수 없게 하는 신성성,
말하자면 우아함과 관능
그리고 정돈된 비율 등을
요구하고 있으니까요
그 모든 조건을 충족한 아름다움은
신조차 흉내내기 어려운,
철없는 안간의 비현실적 욕심이라고
반성한 건 아닐까 싶습니다
조화, 절제, 관능, 매혹 등
모든 요소가 정돈된 것을
우리는 아름다움이라 하고
어느 한 요소가 아름다운 것을
기꺼이 예쁘다고 합니다
그래서이겠지요,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에게는 아름다워지려는 이보다
예뻐지려는 이가 흔합니다
아마도 아름다워지기는 어렵지만
예뻐지기는 쉬운 탓일까 싶습니다
그런데도, "이 세상에 예쁜 이가
이렇게 많은데, 나는
왜 예쁘지 않은 거냐"는
당신의 자책은 쓸데없습니다
예쁨을 지키려는 당신을 보면,
당신의 예쁨에 가장 큰 적이
당신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예쁨의 예쁨으로 보입니다
모두가 예쁘다 해도, 당신은
자신의 눈꼬리에 자꾸 걸리는
부조화의 꼬투리를 찾아냅니다
당신이 예쁘고 싶은 대상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자신의
'자기 예쁨'이라는 것이지요
집을 나서기 전 거울 앞에 선 당신이
자신을 살피며 시간을 까먹다가,
거리의 거울에 비치는 자신에서도
가장 그럴듯한 포즈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몸을 뒤틀며, 같은 포즈를
반복하지만, 시간에 쫓겨 체념하고 마는,
"이 정도면 됐어, ' 쉽게 말하면,
자족을 찾아야 직성이 풀리는 겁니다
"나는 왜 나인가?"
당신이 생각하는 예쁨에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겁니다
마침내, 자신의 그 마음을
예쁨으로 받아들일 때까지
갖고 있는 모든 예쁨을
잃게 되는 이도 있습니다
흔한 말로, 이 세상 사람들이
제 잘난 맛에 사는 걸
익히 알면서도 무시하고,
타인이 삼삼하게 즐길 수 있었던
원래 가졌던 당신의
예쁨마저 부술 수도 있습니다
신의 몸을 갖지 못한
나르키소스처럼 말이지요
삶의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예쁨도 마음의 그림씨인 만큼
심미적 착각에 가까우며,
곧 스러진다는 걸 알아도
세월의 도전에도 견딜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나르키소스는
연못물에 빠져 죽기 전
가장 아름다웠던 때의 그입니다
그가 자신의 미모를 갖고
세월에 저항한 흔적 없이
'그 후로 오래도록 잘 살았다'는 건
어디에도 있지 않습니다
내가 당신이 예쁘지 않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 데도,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동물의 성정체성에 대해서
아무런 이의가 없는 나로서
키이라 나이틀리나,
크리스틴 스튜어트, 그리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예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당신이
예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 삶이 우연으로
- 그게 운명이라 해도
운명인지를 알 수 없으므로 -
이뤄진다는 걸 상기하면
좋지 않을까 싶은데,
당신뿐 아니라 앞서 나열한
이들이 예쁠 수 있는 까닭은
눈에 띈 한 순간의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예쁜 게 아니거나,
예쁘지 않을 수 있는데도,
'내'가 그들을 예쁘게 보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본 당신의 예쁨은
당신이 찾은 당신의 예쁨보다
더 예쁠 수 있다는 걸 모르는 당신은
진정 예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예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당신 자신은 시나브로
당신 자신뿐 아니라 누구에게든
예쁘지 않게 될 겁니다
솔직히, 당신 자신이 예쁘다고
생각하기를 바라는지는
나 자신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예쁘지 않다는 건
아직 당신이 내게 당신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는 투정이
틀림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 사랑이 부족한가,
당신 예쁘다는 걸 어떻게
항구적으로 증명하겠나,
나는 늘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 예쁨을 찾는 게 내 즐거움이고
당신이 즐겨야 할 나의 의미인데,
이기적인 고백이지만, 나는
당신의 예쁨을 사랑하기보다는
내게 예쁜 당신을 사랑하지요
이런 나를 비난한다 해도,
나는 또다시 반성만 할 뿐,
그 비난이 내게서 당신의 예쁨을
앗지 못할 거라는 걸 알기에
비난이 무슨 소용이겠나 싶습니다
단 하나, 예쁨은 상대적이라는 것,
나르키소스가 인간으로서
미모를 영원히 가질 수 있는 방법은
연못에 뛰어들 것이 아니라,
당신이 내게 하듯이,
그를 사랑하는 이에게 각인시키는 것,
그래서 여든둘의 초라한 그에게서도
열여섯의 그를 보도록 하는 거였습니다
*"왜 남성의 예쁨을 어색하게 여기는가? 왜 여성의 예쁨만 당연한가?" 싶은 나는 이 쪽지의 제목을 붙이는 데에 마음을 제법 끓이다가, 남녀의 성을 떠나 개체로서 예뻐 보일 때, 도대체 뭐라 해야 하는 거야 싶어, 그냥 쓰기로 합니다. 그리고 '예쁘다'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는,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우길지 모르지만, 내겐 자가당착적입니다, 특히 여성을 차별하는.
늘 하는 말이지만, 우리말은 성(Sex)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예쁘다>
(네이버,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생긴 모양이 아름다워 눈으로 보기에 좋다.
▪︎행동이나 동작이 보기에 사랑스럽거나 귀엽다.
▪︎아이가 말을 잘 듣거나 행동이 발라서 흐뭇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