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불러주기
하나
지금 그대의 ‘나’ 때문에
그대가 괴로워하는 건 부질없다.
누군가의 타인이었던 그대가 먼 훗날,
그대의 과거를 돌아보며,
‘그게 나냐?’
되바라진 태도로 즐겁게 웃을 수 있으면
인생은 충분하지 않을까.
사람살이에서 ‘나’는
타인이 보는 ‘나’로서 충분하고,
그대가 아무리 ‘나’라 해도
타인이 보는 ‘나’ 일뿐이다.
마침내 죽음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삶과 죽음 사이를 구별하는 것도 그대가 아니다.
타인이다. 누군가가 그대의 사망진단서를 쓴다.
타인이 보는 ‘내’가 죽을 뿐이다.
그대는 ‘나’를 죽었다고 말할 수 없다.
‘나’를 생각하면서 사는 건,
그래서 미친 짓이다.
우리는 그렇게 살게 되어 있다.
그다음은 죽은 뒤에 생각하자.
둘
살펴보면, 작가 개인의 인생,
혹은 살아가는 모습과 그의 글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을수록 작품이 재미있다.
그런 차이가 예술로 불릴 수 있는
조건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의 글은 작가의 그것보다
자신의 삶과의 괴리가 훨씬 작다.
예술이 되기엔 우리의 글이 너무 솔직하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글로 쓰지만,
작가는 자신의 글과 동거하지 않는다.
대개 독자의 정확한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을 늘어놓는 게 우리라면,
작가는 설명을 없애려고 한다.
독자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잘못 오해를 할까 두려워할 때, 오히려
작가는 나머지를 독자에게 맡겨둔다.
그 능력이 작가의 예술적 기량이 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자신의 글에서
자신을 드러내려 할 때,
작가는 될 수 있으면 감추려고 한다.
누군가는 ‘드러내는 것’이
예술 입네 하고 있지만,
사실 작가는 무엇을 감출까 고민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예술은
감추지 않은 것처럼 꾸며진,
감출 것은 모두 감춘 것이다.
감추는 기술이 예술, 혹은 픽션이며,
감추지 않는 것, 혹은 감출 수 없는 것을
우리는 자연, 혹은 논픽션이라고 한다.
'예술이 그럴듯한 사기'라는 말은
백남준이 토로한 것이다.
언젠가 자신이 쓴 글을 오직
소설로만 보아달라던 이문열의 애원은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독자들은 그를 작가로 알고 있었고,
그가 그의 글에서 거의 그의 속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그 결과 독자는 그를 비난했는데,
그의 글을 예술, 혹은 문학으로 보지 않았다.
독자는 그의 글이 문학을 빙자했다고 여겼다.
우리가 이 우주의 일부이듯이
‘나’라는 인간의 허우대 저 안쪽을
그대로 드러낸 것은 예술이 아니라 자연이다.
예술이나 문학에는‘내’가 필요 없다.
나는 팔리지 않거나, 읽히지 않는다.
팔리거나 읽히기에는
‘나’는 너무 따분하며 고상하지도 않다.
끊임없이 숨을 쉬며,
먹어야 하며, 싸야 하는 '나'의 일상은
예술로서는 전혀 가치가 없다.
‘그대로의 나’를 편집해서
‘그럴듯한 나’로 포장해야 한다.
그것이 예술이다.
그래서 현실보다 예술이 재미있고,
그래서 사랑을 해보지 못한 작가가 쓴
사랑 이야기가 재미있고,
행복한 작가가 쓴
불행한 이야기가 대체로 재미있는데,
그 재미라는 것은 작가의 능력이 아니라,
누군가의 말을 빌리면 ‘신의 뜻’이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썼느냐 하는 질문에는
그것을 읽고 받아들인 사람이 답을 한다.
내가 말하고자 한 것을
독자가 그대로 이해한다면
그 글은 잘 쓴 글이다. 다만
그런 글은 논문이나 철학에 소용될 것이다.
예술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잘 쓴 글은 없다.
잘못 쓴 글도 없고, 그냥, 잘 읽히는 글이 있다.
우리가 인정하는 걸작은 대개 그런 작품이다.
그대가 작가이든 아니든
그대는 그대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독자는 작가의 글을 읽는 것과
그대의 글을 읽는 방법을 다르게 하고 있다.
그대가 작가라면 '그대의 글'을 읽고,
그대가 같은 일반인이라면
‘그대’를 읽으려고 한다.
그대는 그대를 쓰면 그만이다.
그들의 ‘그대’는 그대와는 무관하다.
독자에게도 독자의 예의가 있다.
셋
물론 그때, 그대는
그들이 받아들인 그대이다.
아무리 그들 안에서 그대를 찾아도
그대는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받아들인 그대뿐이다.
아무도 그대의 ‘나’에 대해서는
모르며 알 수도 없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다음 역시 죽은 뒤에 생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