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의 쓸모

by 벼룩

어느 날부터 ‘평론가’라는 이름을 잘 믿지 못하게 됐다. 물론 모든 종류의 ‘평론’이 못 미더운 것은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평론가’는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닌 모든 것을 맘대로 평가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는 것처럼 이해되곤 한다(무엇보다도 그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평론’ 혹은 ‘평론가’가 자주 불쾌한 이유는 그것이 매우 일반적인 혹은 추상적인 층위에서, 거리를 둔 채 수행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대충 말하면 ‘사회평론가’는 사회 ‘일반’을, 음악평론가는 음악 ‘일반’을 평론할 자격이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이런 위치, 그러니까 OO ‘일반’에 대한 평론을 생산하는 사람은 스스로 ‘보편’을 자처하곤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OO 일반에 대한 평론, 나아가 그런 평론을 생산하는 이들을 신뢰하기 어려워진다. 그런 위치성 혹은 태도는 실제 현실과의 상당한 거리를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며, 자주 현실에 대한 문제 제기들을 ‘이상적’이라고 가볍게 재단하기 때문이다. 정작 자신이 ‘이상’이라고 쉽게 말한 그것을 현실에서 어떻게 해결할지 피 토하며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의 존재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으면서.


보편적 평론, 혹은 일반적 평론이 자주 무책임하고 불쾌한 이유는 그것이 아주 특수한 사례들, 혹은 아주 구체적인 사례들을 보편의 기준으로 대충 뚜들겨 납작하게 만들고, 복잡하게 얽힌 현실의 문제와 이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의 역사를 삭제함으로써 기존의 ‘보편’을 공고히 하기 때문이다. 그건 사실 무책임할 뿐 아니라 지극히 부정확한 글쓰기 방식이다.


당사자도 아니면서 떠올릴 수 있는 비판의 9할 이상에 대한 고민은 이미 현장에서 당사자들과 활동가들이 수없이 해오고 있다고 생각하면 정확하다.


공부를 하고 활동을 할 때마다 느끼는 건 내가 내린 판단이 부족할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만이 아니다. 내가 판단을 내리는 지금의 위치에 무엇이 전제되어 있는지, 나의 지식과 경험은 얼마나 상황지워진 것인지 돌아봐야만 더 정확하고 덜 폭력적인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 내가 공부와 활동 안에서 얻은 가장 큰 배움 중 하나다.


그리고 ‘일반적인’ 평론을 하는 사람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건 사실 자기가 그 무엇에 대해서도 전문가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일일 테다. 정확한 평론은 가장 밖에서가 아니라 가장 안에서부터만 생산될 수 있다. 지금처럼 복잡한 세상에서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 가장 밖에서의 비평은 아무나 할 수 있는 피상적인 이야기일 뿐인데.


평론으로 자신의 책임이 끝났으며, 그 이상으로 현실에 개입하는 건 자기 몫이 아니라고 여기는 평론가들의 태도야말로 평론의 무능함을 보여준다. 평론이 정말 유의미하려면 현실에 아주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방법을 고민해야만 한다. 그게 아니라면 평론은 팔짱 끼고 훈수두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주 구체적인, 안으로부터, 구석으로부터의 평론만이 현실에 닿을 수 있다. 그게 평론의 ‘쓸모’를 찾는 시작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