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 "악에 대하여"를 읽으며

by 오현지

인간이 고독의 고통에서 해방되어 세상과 잘 어우러지고 일체가 되는 조화를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 p.104
인간은 분리감을 이겨내고 결합감, 일체감, 소속감을 획득할 수 있어야 한다. -p104


사람은 누군가에게 공감받고, 본인만의 구별되는 생각이라도 타인이 쉽게 이해하길 원한다.

뚜렷한 특성과 타인에게 수용될 보편성을 함께 갈망한다.

그리고 특성과 보편성 사이를 끝없이 저울질할 것이다.

'나는 ~하길 원한다.' 'A를 말하고 싶다.' vs '이 생각/행동이 과연 수용될 것인가?' '칭찬/비난을 받을 것인가?'


사회로 들어갈수록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회피적인 기질도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작은 찌꺼기들이 유리창의 물때처럼 남아 있었다.

내가 이 생각을 꺼내는 것은 고유한 생각(특성)을 말하는 목적도 있지만

내 지인/친구들이 모르는 장소에서 수용되고 싶은 생각도 있다.

지난번에 인스타그램에 이런 생각을 올렸다가,

지인이 걱정 어린 연락을 했을 때 느낀, 민망함은 피하고 싶었다.


난 교회를 다니지만, 공동체엔 일정한 거리를 두며 조심스러움을 유지한다.

재밌어서 참여하지만, 얽매이고 싶지 않다.

월급을 받지 않는 이상, 내 에너지와 시간을 소비하고 싶지 않다.

이 생각은 책임감이 깊은 사람에겐 수용되지 않고, 개인생활이 좋은 사람에겐 수용될 것이다.

공동체를 중요시해야 한다는 설교 영상을 보다, 그날은 듣기 싫어서 유튜브를 껐다.

나도 사람을 사랑하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확장하고 싶은 사람이지만,

이들이 날 수용하지 못하는 순간이 올까 두려움이 있었다.

활발한 모습일 땐 수용받다가 우울함을 느낄 때 거리가 생기는 그 느낌이 싫다.

대학을 다닐 때, 교회보다 학교가 더 좋았다.

교회는 예배 시간, 팀 모임이 끝나면 땡이지만 학교는 그저 우연히 함께 있는 시간에

서로 간식을 나누고 긴 얘기를 나누며, 진정한 공감이 이루어진 장소였다.


그래서 공동체의 회전에 온 신경을 기울이는 곳보다,

옆 사람이 힘들 때 "무슨 일 있어?"라고 물어보는 곳이 좋다.

지금까지 느낀 교회는, 한 사람이 꾹 자리를 지키다가 도망갈 때, 뒤늦게 신경 쓰는 곳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교회는 개인에게 사랑을 쏟으며 시작됐다.

다행히 지금 다니는 교회는 가족 같고, 힘든 소식을 나누고

그 한 명의 '현재'를 위로하고 사랑하는 곳이다. (장로회)

'영어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오히려 문화와 언어가 다양한 곳이라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고

한국 교회에서 답답함을 느낀 사람도 도망온 곳이라

내가 느낀 고립감이 혼자만의 느낌이 아니어서 위안을 얻었다.


사람과 오래 있으면 온탕/냉탕을 오간다는 말이 좋았다.

온기와 냉기가 번갈아 느껴진다는 말은

사람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두려움을 내려놓고, 다면적으로 볼 수 있게 한다.

내가 지금 이 사람이 좋아도 나중에 안 좋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는데

나중에 안 좋아도 또 좋아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다.

이렇게 서로를 다면적으로 알아가는 관계는 깊고 적당한 온도로 찰랑거리겠지.


<악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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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은 성장증후군(전진단계)과 쇠퇴증후군(퇴행단계)으로 나누었다.

성장과 퇴행은 한 개인이 '나를 초월해 이웃을 사랑하는지'와 '삶과 죽음 중 무엇을 사랑하는지',

'가족으로부터 독립된 애착, 사고방식을 지녔는지'로 판단한다.

나는 정상으로부터 조금 성장, 조금 쇠퇴를 왔다 갔다 하는 것 같다.

사람에게 온정을 품을 때와 온정을 거두는 때가 번갈아 오기 때문인데,

주변에 따뜻한 사람, 성숙한 사람들도 조금씩 늘어나고

나 자신도 성찰하며 성장을 향한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옆 사람에게 다가 가고, 더 알아가는 과정을 두려워하지 않고

행복과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