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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Feb 17. 2024

그들에게 진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추락의 해부>를 해부하며


<추락의 해부>는 블랙홀 같은 영화입니다. 별이 사멸하며 블랙홀로 변해 주변의 모든 빛과 물질을 흡수하듯 한 남자의 죽음이 한 가족을 끝 모를 어둠 속으로 빨아들이죠.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과정에서 이 가족의 삶은 갈기갈기 찢기고 맙니다. 진실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메스로 말이죠.


영화는 흔적을 남기지 않은 시체 대신 지워지지 않은 얼룩으로 가득한 과거를 해부하며 격렬한 파동과 균열의 메시지를 던집니다. 과연 그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1. 균형을 깨뜨린 공간 그르노블



부부인 산드라와 사뮈엘의 관계는 불균형으로 가득합니다. 살고 있는 환경, 아들에 대한 육아 비중, 직업적 성취, 정서적 교감 등 모든 게 어긋나 있죠. 주목할 점은 영화에서 두 사람의 불균형이 다소 수직적인 형태로 비춰진다는 겁니다. 단적으로 첫 장면을 보면 산드라는 1층에, 사뮈엘은 다락방에 자리하며 수직적으로 단절된 모습을 보여주죠.


부부가 살고 있는 그르노블의 외딴 산장도 균형과는 거리가 먼 공간입니다. 가파르고 위태로운 비탈길을 올라야 다다를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 그리고 사뮈엘에겐 고향이지만 산드라에겐 낯선 타지라는 점. 이런 특징들만 놓고 봐도 그르노블은 이 가족에게 안정감을 줄 수 없는 공간처럼 보입니다.


특히 이 부부가 선택한 공간의 궤적을 따라가보면 점점 균형에서 멀어진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전에 살았던 런던은 독일인 산드라와 프랑스인 사뮈엘 두 사람 모두에게 낯선 공간이었습니다. 덩달아 두 사람이 교수와 작가라는 명망 있는 직업을 택하며 살기에도 최적의 공간이었죠. 하지만 그르노블은 이 균형감을 지워버리는 공간입니다. 사뮈엘의 향수를 달래주면서 산드라의 외로움을 키우고, 사뮈엘의 이상과 산드라의 현실이 격렬히 부딪히게 만들기 때문이죠. 언뜻 보기엔 평화로운 공간이 결국 불화의 씨앗을 잉태하는 터전이었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2. 초반부 노래의 의미



법정에서 검사가 말하는 것처럼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노래는 미국의 전설적인 래퍼 50 cent의 ‘Pimp’라는 곡입니다. Pimp는 원래 매춘업에 종사하는 포주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속어로 접근해 해석하면 멋쟁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죠. 가사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재력을 과시하며 여자를 돈으로 취하는 남자의 허세로 가득합니다. 검사가 지적하듯 여성 비하로 해석될 여지가 다분한 내용들이죠.


영화는 이 곡을 사뮈엘이 즐겨 듣는 음악으로 설정하며 오묘한 괴리감을 자아냅니다. 사뮈엘의 일상은 노래 속 남자와는 정반대의 모습이기 때문이죠. 사뮈엘은 오히려 산드라에게 주도권을 뺏긴 채 살아가며 아들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의 능력에 대한 회의감에 휩싸인 인물로 그려집니다. 게다가 이 노래가 나오는 상황도 상당히 절묘합니다. 산드라가 자신을 인터뷰하는 학생 조에와 나누는 대화를 끊임없이 방해하는 장치이기 때문이죠. 법정에서 밝혀지듯 사실 산드라는 수차례 바람을 핀 전력이 있는 양성애자로 그려집니다. 조에가 법정에 증인으로 출두했을 때도 검사는 그날의 대화가 미묘한 감정을 전제로 한 것이었는지 확인하는 질문들을 수차례 던지죠.


이런 정황을 미뤄보면 이 노래는 사뮈엘이 아내에게 던지는 불만의 표시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부부의 신뢰를 저버리고 수많은 이성과 동성을 취했던 아내의 과거가 노래 속 남성의 노골적인 행보와 맞물리는 건 상당히 절묘하게 다가오죠.


3. 법정의 수사학



‘법정은 우리의 역사가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걸 말해주는 곳이다.’ 감독 쥐스틴 트리에가 생각하는 법정의 의미입니다. 그녀의 말처럼 법정에서 사뮈엘과 산드라의 지난 시간은 타자에 의해 재단되며 무수한 억측을 낳는 재료가 됩니다. 이 영화에서 명백한 진실은 바로 사뮈엘이 자신의 집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것밖에 없는데 말이죠. 


유력한 용의자로 몰린 산드라를 추궁하는 검사의 주장과 논리. 이에 결백을 주장하며 자신을 방어하는 산드라. 이 치열한 말싸움 앞에서 관객들은 진실의 존재와 지위가 한없이 추락하는 걸 느끼게 됩니다. 그리곤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생각해보게 되죠. 추락한 사뮈엘의 시신이 남긴 건 오직 타살 정황 하나. 산드라의 DNA나 목격자도 존재하지 않죠. 이렇게 정황만 두고 시작한 논리 공방에 진실이 설 자리가 없는 건 어쩌면 당연합니다.


원하는 답을 도출하기 위한 질문.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한 답변. 이는 영화에서 진실 찾기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걸 말해줍니다. 사뮈엘과 산드라의 역사는 사뮈엘의 죽음으로 인해 오직 산드라의 기억과 회고로 그려질 뿐이고, 그것이 법정이란 자리에서 유죄와 무죄를 판가름하는 잣대가 됐을 땐 그 객관성을 더더욱 담보할 수 없기 때문이죠. 


게다가 무수한 제3자들이 증언을 하는 장면은 모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아마도’나 ‘거의’ 같이 불분명한 어휘로 추론을 결론처럼 말하는 제3자들은 법정 싸움이 결국 진실이 아닌 명분을 찾기 위한 자리라는 걸 방증하죠. 산드라가 범인인 이유가 아니라 산드라가 범인이어야 하는 이유. 매서운 칼날 앞에서 모든 진실을 토해낼 피고인은 없듯이, 산드라 역시 진실과 거짓 그 사이에 서서 모호한 말들로 회피할 수밖에 없습니다.


법정에서 해부되는 한 사람의 역사엔 진실이 없다는 것. 그렇게 영화는 무한하게 열린 가능성을 가운데에 둔 채 관객들로 하여금 한 인물을 이중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들며 가늠할 수 없는 오리무중에 빠지게 만드는 매력을 선사합니다.


4. 다니엘의 마지막 증언



사고로 인해 시신경을 다친 다니엘은 영화의 향배를 결정하는 키이자 이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입니다. 사뮈엘과 산드라의 역사를 함께 한 유일한 구성원이자, 법정에서 밝혀지는 내밀한 서사를 무기력하게 마주해야 하는 인물이기 때문이죠. 어머니의 외도와 표절 의혹, 아버지의 우울증과 자살 시도와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다니엘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자신이 알던 부모님이 다른 존재처럼 느껴지며 누굴 믿어야 할지 확신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죠. 


부모에게 정서적으로 동화됐던 존재가 불완전한 진실 앞에서 유리되는 과정은 일종의 성장통처럼 비춰지기도 합니다. 이때 법원에서 파견된 직원 마르쥬가 던지는 말은 이 영화의 핵심을 관통하죠. 하나를 믿어야 하는데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을 땐 하나를 결정해야만 한다. 진실을 파헤치는 게 불가능하다면 오직 선택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몫이라는 걸 말하는 것처럼 다가오죠. 


고심 끝에 다니엘이 던지는 마지막 증언은 마치 잘 짜인 소설의 한 대목처럼 탄탄하게 느껴집니다. 아스피린과 그로 인해 뱉어낸 토사물. 그리고 끝내 마주하게 된 죽음의 고비. 이렇게 강아지 스눕과 사뮈엘의 공통 서사를 공교롭게 배치시키며 삶의 마지막을 역설하는 장면은 끝내 산드라의 손을 들어줍니다. 아버지가 자살을 택할 만한 명분을 과거의 대화에서 취사선택하며 어머니의 무죄를 돕기로 결정한 것이죠. 


영화에서 다니엘의 증언이 매력적인 건 증언 속 이야기가 진짜인지 알 수 없다는 모호함 때문입니다. 녹취록을 들어보면 사뮈엘은 그 누구보다 다니엘에게 살가웠던 아버지로 그려집니다. 그런 사뮈엘이 다니엘에게 반쪽과도 같은 스눕과의 이별을 염두에 두라며 냉정하게 대하는 건 평소와 다소 괴리가 있는 태도처럼 느껴지죠. 어쩌면 다니엘은 이 이야기를 법정에서 알게 된 아버지의 생각과 감정을 스눕에게 투영시켜 자신과 있었던 일화인 것처럼 그려낸 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다니엘이 작가의 기질을 물려받은 아들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 역시 가능한 추측처럼 다가오죠.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이 마지막 증언이 어린 소년으로 하여금 아버지와 어머니 중 한 쪽을 선택하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평생 봉합될 수 없는 가족의 균열을 스스로 선택하게 만든 것이죠. 영화는 그렇게 다니엘의 손에 피를 묻히며 상처 가득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잔인한 시작점을 찍어줍니다. 


5. 사뮈엘의 실존 욕구과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앞서 언급했듯 사뮈엘과 산드라의 근본적인 차이는 바로 삶의 지향점입니다. 우선 산드라는 현실적인 성취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물입니다. 자신의 욕구를 부정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충족시키며 눈에 보이는 결과를 쟁취하고자 노력하죠. 반면 사뮈엘은 이상적인 성취를 지향합니다. 살아있는 글을 쓰고 싶어하며, 가족에서나 사회에서나 쓸모 있는 존재가 되길 원하죠. 녹취록을 통해 밝혀지듯 사뮈엘은 자신의 강렬한 감정을 격렬하게 토해냅니다. 그런 면에서 사뮈엘은 산드라보다 실존 욕구가 강한 인물로 비춰지죠.


이런 사뮈엘의 모습은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 속 주인공 뫼르소와 비교해보면 더욱 선명하게 보입니다. 뫼르소는 사뮈엘과 달리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무덤덤할 정도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인물입니다. 사람을 죽이고도 오직 진실만을 말하겠다며 죽음을 불사하는 면모도 있죠.


이렇듯 다른 두 사람에겐 미묘한 공통점이 존재합니다. 바로 개인의 욕구와 세상의 이치가 상충하는 것에서 거대한 부조리를 느낀다는 것이죠. 사뮈엘은 글로 자아를 표출하며 육아도 균형감 있게 배분된 세상에서 살고 싶지만 현실은 정반대의 모습으로 체현될 뿐입니다. 뫼르소 역시 생존을 위해 진실이 호도되는 세상에서 줄곧 진실만을 추구하다 생을 마감하는 인물이죠.


삶이란 본질적으로 부조리하다는 사실이 두 사람을 죽음의 문턱으로 인도한다는 사실도 비슷합니다. 부조리한 일상 속에서 우울증을 겪은 사뮈엘은 아스피린을 과다 복용해 자살을 시도하고, 뫼르소도 부조리한 현실에 동화되지 못하며 죽음을 향해 나아가죠. 산드라에게 뭐든지 공평해야 한다고 절규하는 사뮈엘. 오직 진실만이 옳다고 굳게 믿는 뫼르소. 그런 이들에게 현실은 냉혹한 결말을 선사하며 이 세상엔 이상적인 삶이 설 자리가 없다는 걸 말해줍니다. 


영화는 개인의 실존 욕구가 가족과 사회적 성공이라는 현실을 마주할 때 얼마나 많은 모순을 자아내는지 보여주며, 사뮈엘의 이상에 강력한 제동을 걸어버립니다. 사뮈엘에 대한 산드라의 반박에 일부분은 공감할 수밖에 없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불가능한 것을 끝까지 좇을 때 옆에서 지켜보는 이들도 얼마나 큰 상처와 피로감을 안게 되는지 알게 되니까요.


아들의 사고로 바뀌어버린 일상에 적응하는 자와 적응하지 못하는 자의 갈등. 영화는 이걸 텍스트에 숨겨진 콘텍스트로 해부하며 관객들에게 실존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치며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진실은 산 자의 몫이지만, 영화 <추락의 해부>는 그 어디에도 결백의 실마리를 숨겨놓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살아남기로 결심한 존재들이 법정을 벗어나 어두운 집안에서 끌어안는 순간, 영화는 무너진 한 가족의 잔해만을 조용하게 조명하죠. 과연 죽음은 육신의 사멸로만 정의될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살아있다는 건 단지 숨을 쉬는 것만으로 온전한 것인가. 영화는 조용히 소파에 누운 산드라와 스눕의 마지막 모습을 통해 이런 질문들을 던지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P.S. 유튜브에 영상으로도 올려놨으니 영상 설명과 함께 보실 분들은 아래 링크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https://youtu.be/WMnU1sjKjBw?si=GIC2ChsCTw_Whc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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