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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아임풀 08화

8. 네 개의 두려움

아임풀

by 여등

엉겁결에 나온 곳은 5블록이 아니었다. 마이크로칩을 터치하였다. 메탑 현 위치는 127블록이라고 떴다.

“127블록?”

“어째서 이곳에…… 나는 분명 5블록을 생각했는데 마블팔찌의 감지 오류인가?”

오히려 기사는 더 어리둥절했다. 길고 긴 오늘 하루가 127로 귀결되었다. 127블록으로 오게 된 것은 기사가 떠버리라는 결정적인 증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떠버리 말대로 열 번의 시험은 정해진 등급에 순응하는 절차일지 모른다. 일개미가 여왕개미가 되기를 꿈꾸지 않는 것처럼. 리시티를 상징하는 문양에도 개미가 있다. 그러나 유전자 설계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개미가 될 수 없다. 그건 확실하다. 마블팔찌는 떠버리의 뇌파 깊은 곳의 두려움을 감지하고 두려움이 지목하는 127블록으로 길을 열었을지도.

“127……”

기사는 어물거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메탑 127블록은 마을 가운데로 강이 흘렀다. 강을 중심으로 동쪽 마을은 웅장한 초현실적 건물이 즐비했으며, 건물의 주변으로 공중을 날고 있는 아바타들은 빵빵한 능력치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들의 실체도 빵빵한 등급인지는 알 수 없다. 우리가 서 있는 서쪽은 마을이라기보다는 볼품없는 나무들만 듬성듬성 서 있는 황량한 곳이었다. 풀 한 포기조차 없었다.

“야! 거기! 더듬이!”

나는 놀라 나무 위를 보았다. 설마 나? 기사도 동시에 올려보았다. 그리 높지 않은 곳에 머리만 남은 아바타가 걸려 있었다. 자세히 보니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었다. 가장 낮은 곳에 매달린 머리가 다시 소리쳤다.

“도와줘! 아니 살려줘!”

“왜 거기 있어?”

내가 물었다.

“솔라 좀 빌려줘. 열배로 갚을게.”

매달린 머리가 다짜고짜 재촉했다.

그들을 살펴보았다. 원래부터 머리만 있는 아바타가 아니었다. 머리만 남기고 모두 해체시킨 것이 분명했다. 기상천외하였다.

“클클 머리 말고는 모두 팔았어. 머리도 팔고 싶지만 그러면 메탑에 접속이 되지 않잖아. 클클 거기 기사! 설마 127등급은 아니지? 솔라 좀 있어? 백배로 돌려줄게.”

별로 우습지 않은 말인데도 머리들이 요란스럽게 웃어댔다. 기사는 뚜벅뚜벅 나무로 다가섰다. 그리고 다짜고짜 주먹을 날렸다. 나무에 매달렸던 머리의 턱이 덜컥 빠졌다. 허접한 아바타였다.

“원한다면 머리도 부셔서 조각조각 팔아주지.”

기사가 나무를 걷어차며 말했다.

“라벨도 없는 아바타들이야. 그냥 둬. 빨리 5블록으로 가자.”

나는 약해진 민지의 뇌파를 확인하며 말했다.

“이봐 풀! 위에서는 더듬이만 보이더니, 좀 내려오니까 이름이 보이네.”

턱 빠진 머리가 나불거렸다.

“관심 꺼!”

기사는 자신의 주먹을 만지며 눈에 힘을 주었다. 자꾸 싸우는 건 별로 고맙지 않은 상황이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 민지에게 무엇인가 먹이는 것이 급했다. 그 뒤 정말 대열증인지 살펴봐야 한다.

여자가 민지에게 하려고 했던 행동…… 나의 불안의 출발이 샬레에서부터였다면, 민지의 예민함도 거기부터일 가능성이 있다. 나는 민지를 살려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풀, 솔라 좀 적선해 줘. 10솔라만 나무에 넣어주면 내려갈 수 있어. 지금은 로그아웃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어. 이제는 좀 쉬고 싶어.”

머리는 아까와는 다르게 처량하고 공손하게 말했다. 보통 구걸하는 아바타들에게 10솔라 정도는 던져준다. 그것은 메탑의 미덕이다. 난처했다. 아까 솔라를 허공에 뿌리는 바람에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기사는 머리를 노려보다가 주먹으로 한방 더 날렸다. 동시에 묶여있던 전자파동이 해체되어 머리가 바닥으로 쿵 떨어졌다.

“1솔라도 아깝다. 됐지?”

“응, 고마워. 솔라로 해결하면 더 좋았을 텐데……”

머리는 덜거덕거리며 굴러가기 시작했다. 세상에…… 나는 눈짓으로 뭐하는 거냐고 물었다.

“여기는 도박하는 아바타들이 모이는 곳 같아.”

“도박?”

“강 저편을 꿈꾸며 몸부림치는 거지.”

기사는 상황이 파악되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분노가 치미는지 주먹을 쥐고 강 건너를 바라보았다.

“이해 할 수 없어. 리시티에서는 생활에 필요한 것은 모두 공급되고 있어. 심지어 메탑 쿠폰까지.”

“올푸드자판기, 의복제조기, 치료시스템, 거기다 메탑에 접속할 수 있는 방까지. 완벽하지. 그런데 그것들을 가지고 127등급이 무얼 할 수 있겠어.”

기사는 다소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털었다.

“메탑이 있잖아. 메탑은 자유와 평등의 세계야. 누구도 성별과 등급을 구분하지 않아. 자기가 원하는 걸 할 수 있어. 그런데 왜 여기까지 와서 자신을 저렇게 망가뜨려야하는지 모르겠어.”

“자유와 평등의 세계? 실체를 시체처럼 눕혀놓고 말이지?”

“뇌파도 나라고 할 수 있어. 실체와 분리되어도 나는 나야!”

“그렇군. 나는 나라고 할 수 있겠군. 127등급 실체들 직업이 무엇인지 알아?”

물론 모른다. 구체적인 직업과 일에 관한 건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리시티의 미덕이다. 각자는 배당 받은 일을 할 뿐이다. 모든 것은 철저하게 분업화 되어 있어서 바로 옆자리에서 하는 일도 알지 못한다고 들었다.

“예정 사망자들을 D블록으로 연결시키는 일. 그 뒤 남아있는 실체를 처리하는 일.”

“D블록?”

“예정 사망자들 대부분은 127등급에서 나와. 인구수는 맞춰야 하잖아.”

“뭐라고? 주, 죽음은 원하는 사람들에 한해서 추천으로 한다고 알았는데……”

“127등급이 아니면 누가 죽음을 원하겠어? 상식적인 이야기 아니야? 뇌파는 실체에서 나오는 거야. 그런 일을 하는 실체들의 뇌파는 무엇을 꿈 꿀 것이라고 생각해?”

떠버리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자는? 여자도 예정 사망자가 되려고 신청한 것은 아닐까? 나에게 물고기 난주를 맡기고 싶다고 했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노움의 실체를 처리했던 사람이 여자였다면. 그래서 노움이 그렇게 기다리던 여자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라면…… 추측만으로도 매캐한 슬픔이 귀까지 쓰리게 했다.

“그런데 그거 알아? 거거들 말이야. 진짜 거거들은 절대 죽음을 선택하지 않는다고 하더라. 거거로 살망정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살고 있다고 믿고 있거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 부분에서 기사의 표정이 묘하게 밝아졌다.

“루저들”

듣고만 있던 민지가 머리를 들며 말했다.

“네가 누군 줄 이제 알겠다. 영트리 최고 밑바닥 더벌 963. 떠버리! 감히 네가 나를”

민지는 분에 못 이겨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풋, 역시 등급이 높으면 눈치도 빠르군. 메탑에서 실체 이름을 말하는 건 미덕이 아니지.”

기사는 빈정거렸다.

“미덕 좋아하시네. 나를 금지 블록으로 끌어들여서 대열증이라도 걸리게 하려고 했어? 내가 없어지면 네 등급이 조금이라도 오를 것 같았어? 꿈 깨. 난 너 같은 루저와는 달라.”

민지는 같은 말이라도 재수 없게 하는 재주가 있다. 지금은 차원터널을 만들어 줄 기사가 필요한 상황인데도 말이다. 기사의 주먹이 날아올까 봐 나는 민지를 꼭 안았다.

“참아, 민지 원래 말이 그런 거 알잖아. 민지 지금 아파.”

기사는 나를 힐긋 보더니 낮은 소리로 민지 귀에 대고 말했다.

“잘 생각해 봐. 거거 블록에 가보고싶다고 조른 건 너였어. 거거들이 궁금하다고 하지 않았어? 아, 물론 너에게 접근한 것은 나였지. 그건 맞아. 우쭐거리는 꼴이 민지 너인지 단번에 알겠더라. 저기 강 건너에서 괜히 우쭐거리며 날고 있는 재들 말이야. 이쪽을 바라보며 거들먹거리는 것이 우스꽝스럽지 않아? 하긴 거들먹거리는 것들도 두려워서 그런 거야. 도박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언제 잃을지 모르는 거지. 너도 마찬가지야. 너도 네 스스로 이루어 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 거야. 태어날 때부터 편집된 것이 무슨 자랑이라고. 허깨비 같지 않아? 누군가를 조롱하면서 너도 두려움에서 도망치고 싶은 거겠지.”

영트리에서 늘 엉거주춤 말끝을 맺지 못하고 기가 죽어있던 떠버리가 아니었다. 민지 앞에서 큰소리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불쑥 마블타로 마법사가 생각났다. 만약 마법사 카드에 나타난 실체가 정말 기사, 아니, 떠버리였다면? 우우, 말도 안 돼는 상상에 발까지 구르며 머리를 흔들어 댔다. 타로를 볼 때 기사를 생각했던 건 우석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떠버리는 진짜 아니다. 0.1초도 안 되는 순간이지만 우석에게 미안해 졌다. 기사는 이상한 행동을 하는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민지는 발톱에 힘을 주고 일어서려고 하였지만 다시 축 늘어졌다.

“맘대로 생각해. 떠벌 떠벌 떠버라.”

민지는 귀찮은 표정으로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너무 먹지 않아서 뇌파가 약해진 거야. 잘잘못은 나중에 따지고 일단 여기서 나가자.”

나는 목에 힘을 주고 말했다. 갑자기 기사는 몹시 지쳐보였다. 팔을 들기조차 힘들어보였다. 전자파동을 해치하면서 힘을 써서 그런가? 기사는 억지로 팔찌가 있는 팔을 올렸다. 그러다 우욱 소리를 내며 머리를 잡고 무릎을 꿇었다.

“왜 그래?”

“오늘 너무 많이 팔찌를 사용했어. 아직 완전히 내 것이 아니라 거부반응이 일어나는 것 같은데……”

“뭐?”

기사는 엉금엉금 기어 머리들이 매달려 있는 나무로 가서 기대었다.

“기사! 내 머리도 한 대 패고 솔라 좀 줘!”

눈치 없는 또 다른 머리가 소리쳤다.

“시끄러!”

기사는 쓰러질 듯 말했다. 그러자 달려있던 머리들이 요란스럽게 머리를 흔들어 댔다. 솔라 좀 줘. 열배로 갚을게. 백배. 천배. 여기저기서 소리와 웃음이 범벅이 되었다. 그래도 힘없이 앉아있는 기사가 걱정되었다. 기사는 나를 보며 억지로 웃음을 흘렸다. 그저 착할 것만 같았던 떠버리 웃음이었다.

“여기는 비밀 구역이라 이들만이 사용하는 차원터널이 어디 있는지 몰라.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다시 터널이 만들어 질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한 무리의 아바타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우리를 발견하고 곧장 달려왔다. 맙소사.

“핸, 핸섬!”

기사는 엉거주춤 일어섰다.

“기사 이 녀석 그냥 두지 않겠다. 네 녀석 덕분에 우리 숍은 모두 뭉그러지고 지워지고 난리도 아니야. 거기다 메탈폴까지 들이 닫쳤어. 망할 놈. 우리만 겨우 도망쳐 왔다고. 이 배은망덕한 놈!”

“뭐? 그게 어째서 내 탓이야!”

기사는 나와 민지를 뒤로 밀치며 나섰다.

“네 놈이 훔친 마블로 차원터널을 마구 만드는 통에 생긴 오류 아냐?”

“그러게 순순히 보내주면 되는 거였잖아.”

“잡아!”

핸섬은 다짜고짜 달려들어 기사의 머리를 내려쳤다. 오합지졸 아바타들이 몰려들었다.

“왜 이래! 메타폴에 신고하겠어!”

나는 손목의 마이크로칩을 누를 태세로 소리쳤다.

“그래? 그럼 어디 한 번 해봐. 네가 출입증도 없이 거거 블록에 들락거린 것이 밝혀지길 원한다면.”

핸섬이 음흉하게 웃었다.

“안 돼! 풀은 그냥 보내 줘!”

기사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얼씨구, 네 애인이라도 된다는 거야? 그렇다면 더 잘 됐어. 값을 더 톡톡히 치르게 해 주지.”

“소, 솔라는 얼마든지 줄 수 있어. 계약서라도 쓸 수 있어. 우릴 보내 줘!”

내가 사정하는 말투로 말했다.

“저거 보이지?”

핸섬이 나무에 매달려 있는 머리들을 가리켰다.

“저것들 왜 저렇게 매달려 있는 줄 알아? 약속을 지키지 않았거든. 메타폴이 왔을 땐 이것들은 이미 D블록행이야. 실체는 분해기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테고.”

핸섬은 과장되게 손짓을 했다.

“네가 풀려나는 건 기사가 얼마를 만들어 오느냐에 달렸어. 매달아!”

핸섬이 오합지졸에게 명령했다. 나는 순식간에 잡혀 손목에 있는 마이크로칩을 제압당했다. 털썩 주저앉았다.

“아아 비싼 거니까 조심히 다뤄!”

핸섬이 소리쳤다. 민지는 털을 세우고 핸섬에게 달려들었지만, 얼굴 한번 할퀴어보지 못하고 그대로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기사, 검고를 데리고 먼저 가!”

내가 소리쳤다. 기사는 민지의 꼬리를 잡아 올리는 척하며 팔찌를 풀어 바닥에 두고 발로 밟았다. 다행히 민지는 얌전히 있었다. 오합지졸은 발부덩치는 나를 나무에 매달기 위해 꽤나 시끄러웠다. 마블팔찌가 바닥에 버려진 것을 알면 그쪽으로 몰려갔을 것이다. 바닥에 버려진 아이템은 줍는 자가 임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사는 그럴 계획이 아닌 것 같았다. 잠시 기사와 눈이 잠시 마주쳤지만, 무슨 꿍꿍인지 알 수 없었다.

“나무에 달려보니까 어때? 이건 생각보다 재미있어.”

가장 위쪽에 있던 머리가 히죽거렸다. 대꾸할 가치가 없었다.

“기사, 민지 절대 놓치지 마! 민지! 너 기사 말 듣지 않으면 나중에 쿠폰은 국물도 없어!”

나는 소리소리 질렀다.

“시끄러워! 아무튼 이번에는 1000솔라는 좀 넘어야 할 거야. 노움의 로드숍을 털어보는 건 어때? 쓸 만한 아바타들이 꽤 있을 것 같은데.”

다행히 핸섬은 스승 노움이 사라진 것도, 지금은 내가 로드숍의 주인인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흙바람이 불었다. 모두 눈을 가늘게 뜨고 긴장하였다.

“핸섬, 또 메타폴이 등장한 것 같아. 일단 도, 도망가자.”

오합지졸 중에 하나가 말했다.

“기다려, 걷는 바람이 아닌 걸 보면 메타폴은 아니야.”

핸섬은 기사를 힐긋 보았다. 차원터널을 만드는 중인가 확인하는 듯 했다. 하지만 기사는 민지를 안고 얌전히 서 있었다. 차원터널 때문에 부는 흙바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은둔자가 그들 중간에 나타났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은둔자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하필이면 지금?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꼴을 은둔자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은둔자는 기사 앞으로 곧장 걸어갔다.

“넌 뭐야?”

핸섬이 뒤에서 소리쳤다. 은둔자는 돌아보지 않았다. 기사는 한쪽 발을 들어 우석의 팔찌를 보여주었다. 은둔자는 지팡이를 깊게 잡고 기사를 똑바로 보았다. 기사는 한손으로 민지의 꼬리를 잡고 한손으로 머리를 털었다.

“뭐, 이제 쓸모가 없어져서. 가져가.”

기사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은둔자는 지팡이로 팔찌를 들어 올려 손목에 찼다. 팔찌가 우우웅 울음소리를 냈다. 기사가 턱으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나를 가리켰다. 은둔자는 그제야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헤벌쭉 웃었다. 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뭐야, 어디서 온 개폼이야?”

핸섬이 거들먹거렸다. 은둔자는 핸섬을 무시한 채 곧장 나에게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리고 지팡이를 올려 전자파동을 해체하고 나를 내렸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휘청거리는 바람에 은둔자 품에 안길 뻔 했다. 은둔자는 나를 손으로 밀어 바로 서도록 도와주었다. 두 번은 당하지 않겠다는 뜻일 것이다. 고맙지 않게도.

“어, 어떻게 왔어?”

나비더듬이가 뱅글거릴 정도로 흔들렸다. 당황할 때 나오는 버릇이다. 은둔자는 팔을 들어 팔찌를 보여주었다. 팔찌의 별이 더욱 반짝였다.

“주인을 부르는 팔찌야. 기사가 팔찌를 땅에 내려놨었거든.”

기사를 보았다. 기사는 민지를 어깨에 올리고 꼬리는 단단히 잡은 채, 강 건너 동쪽마을을 멍하게 보고 있었다. 기사의 좁았던 어깨가 어쩐지 넓게 보였다. 강 건너에 햇살이 쏟아져 초현실적 건물들이 타오르는 듯, 높고 화려했다.

“잡아!”

핸섬이 소리쳤다. 동시에 은둔자가 마블지팡이를 높이 들었다. 이번에 나는 은둔자의 팔에 매달리지 않았다. 핸섬은 마블지팡이를 알아보고 돌아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오합지졸들도 강변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멀어지자 은둔자는 지팡이를 조심스럽게 내렸다. 나는 기사에게 다가갔다. 기사는 말없이 민지를 나에게 건네 줬다.

“꼬리 심하게 잡지 마. 힘들어.”

민지가 신음소리를 냈다.

“같이 가자.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나는 기사의 어개를 툭 치며 말했다.

“됐고, 영트리 잘나신 분들이나 가시지. 난 여기서 할 일이 있어.”

기사는 강 건너 동쪽을 향해 걸었다. 기사복이 덜거덕거렸다.

“거기 서!”

은둔자가 기사를 향해 소리쳤다. 12블록 로드숍 앞에서 마주쳤을 때 우렁찼던 그 음성이었다. 기사가 돌아보았다.

“왜? 메타폴에 신고라도 하게? 절도범이라고?”

기사가 히죽 웃었다.

“5분전이다.”

“5분전?”

나는 은둔자의 말을 듣고 마이크로칩 시간을 보았다. 새해가 되기 5분전이었다.


은둔자는 차원터널 만들었다. 우물은 산들바람처럼 부드럽게 만들어져 다소곳하게 기다렸다. 은둔자가 눈짓을 했다. 나는 민지를 안고 우물 속으로 들어가서 5블록 광장으로 나왔다. 공지가 있었던 것처럼 5블록은 깜깜한 밤이 되어있었고, 21세기 방식으로 폭죽이 터지고 있었다. 이어서 은둔자가 기사의 덜거덕거리는 기사복을 움켜쥐고 나타났다. 기사는 질질 끌려 나오면서 두 팔을 허우적였다. 폭죽을 바라보며 모두 카운트다운을 외치고 있었다. 어색하게 세 사람도 나란히 섰다. 기진맥진한 민지도 함께. 서로 얼굴을 마주보지 않은 채, 그렇게 열일곱이 되었다.

“기사, 조사위원회에 가서 쓸데없는 말을 했더군. 난 시험을 포기해도 그만이었어. 어차피 나의 길은 다른 곳에 있으니까.”

은둔자가 말했다.

“재수 없게 잘난 척은. ‘나의 길’이라는 건 리시티에 반역인 거 몰라? 반역은 나 같은 등급이 하는 거야. 넌 1등급이니까 1등급으로 살아. 그리고 너 좋으라고 자수한 거 아니야. 내 운명을 받아드리기로 한 것뿐이니까. 어차피 127등급이나 거거나. 그게 그거야. 앞으로 나도 폼 나게 살 생각이다. 폼 나는 거거로.”

“미안하지만 영트리 졸업까지는 폼 나게 살긴 힘들 거다. 나도 벌써 조사위원회에 너에 대한 증언을 마쳤으니까.”

“누구 맘대로……”

은둔자와 기사가 낮은 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왠지 이빨은 서로 보이지 않았지만 으르렁거리는 것만 같았다. 한 가지는 분명했다. 우석이 시험포기 사건은 잘 해결 될 것이라는 것.

은둔자가 생각난 듯 불쑥 내 손에 마블타로를 쥐어 주었다.

“뭐야?”

“말했잖아 마블타로가 너를 선택했다고.”

“좋아, 선택을 허락할게.”

나는 마블타로를 받아 메신저 가방에 넣었다. 가방에서 잠깐 빛이 나왔다. 마블이 자기의 자리임을 인정하는 빛이었다. 기사는 못 본 척 머리를 털어댔다. 메탑의 아바타들이 모두 5블록으로 밀려들어온 것처럼 북적됐다. 기사는 아바타 사이로 조금씩 밀려났다.

“로드숍에 올 거지? 너에게 줄 것도 있잖아. 기사! 올 거지?”

나는 기사를 향해 소리쳤다. 기사는 돌아보지 않은 채 손을 흔들었다. 온다는 말인지 안 온다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은둔자는 멀어지는 기사를 물끄러미 보았다.

“나도 그럼”

은둔자도 돌아섰다.

“고마워. 두 번이나…… 그런데 저기, 그게……”

나는 어물어물 말을 잇지 못했다. 민지가 있어서 뭐라 말하기가 곤란했다. 그런데 역시 눈치 빠른 민지였다.

“흥, 은둔자가 우석이었어. 시험 포기자. 환영해. 루저들과 합류한걸.”

민지는 모든 게 귀찮은 듯 중얼거렸다. 나는 민지의 꼬리를 꼬집었다. 민지는 캭 소리를 냈지만 이내 맥없이 입을 다물었다.

“미, 미안해. 애가 원래 말이 좀……”

은둔자는 별 표정이 없었다.

“괜찮아. 그런데 무슨 말이 하고 싶었어?”

“저기……마블타로 볼 때, 그러니까 본인만이 실체의 얼굴을 볼 수 있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마법사의 얼굴이…… 음 그러니까 그때…… 난 기사가 너 인줄 알고…… 기사가 네 팔찌를 갖고 있어서……”

은둔자가 웃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장난기 어린 웃음이었다.

“풀, 나에게도 실체는 보이지 않았어.”

“정말? 어떻게 그런 일이. 나는 너를……”

“기억나? 마법사의 네 개의 속성. 흙 불 물 바람. 그것을 찾아가는 여정은 너의 선택이다. 마침내 너의 참모습을 만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그래, 그랬었어. 하지만 아직도 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이해가 잘 안 돼.”

나는 수줍어 목소리마저 작아졌다.

“참모습은 자기 존재의 이유를 아는 것이라고 해석된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듯”

“애벌레에서 나비……”

스승은 유품으로 새로운 나의 아바타를 남겼다. 성별이 없는 전사로 크고 화려한 날개가 있는 모습이었다. 지금의 나는 그 아바타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치가 안 된다. 언젠가 날개를 단 전사가 되어 우석을 마주한다면……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등급을 받을 수 없는 운명이다. 리시티 시민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시민이 되지 못하면 나를 위한 한 칸의 방은 주어지지 않는다. 물론 올푸드자판기도. 하마터면 눈물이 고일 뻔 했다. 괜히 민지의 검은 털에 코를 비볐다.

“그 날이 오면, 마법사의 실체가 나이기를 바란다.”

은둔자는 나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무뚝뚝한 말투지만 고백이 분명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당연히 너지.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없어. 나는 왠지 성숙하지 못할 것 같아. 나비가 되지 못할 것 같아. 사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인간이 바로 나의 참 모습이거든. 나에게 존재의 이유 따위는 없었어. 차마 이 말은 할 수 없었다. 죽음의 타로가 왜 함께 나왔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제부터 나는 두렵고 힘든 시간을 보낼 것 같다. 기다림을 선택했으니까.”

은둔자는 내 마음도 모른 채 말을 했다. 내 생각이 북을 치고 있었다. 아니 뇌파가. 아니 심장이. 민지가 신음소리를 내며 꼼지락거리는 바람에 은둔자는 또 보자는 말을 남기고 북적거리는 아바타 사이를 헤집고 멀어졌다.

“뭐야? 똥폼과 개폼. 재들 번갈아 웃긴다.”

민지는 금새 말짱한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나는 멍하니 은둔자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나 죽게 할 참이야?”

민지 말에 정신이 돌아왔다. 서둘러 민지도 나도 로그아웃을 했다. 민지부터 살려야 한다. 나 대신 죽을 뻔 했던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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