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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아임풀 10화

10. 엇갈림

아임풀

by 여등

마냥 설움에 울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우석을 빨리 찾아야한다. 그것이 해결책일지 어떨지 아직 모르지만 어쨓든 만나서 물어야 한다. 치료시스템은 정기적으로 돌아가게 되어있고 계속 돌아가지 않으면 영트리에 보고 될 것이 틀림없다. 한숨을 쉬면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기사는 한 발짝 물러서 내가 온전히 진정할 때까지 기다리다 불쑥 말을 뱉었다.

“시험포기 사건을 거치면서 그 녀석 대충 어떤 놈인지 알겠더라. 만약 대열증 치료 방법을 알고 있다면 민지를 모른척하지는 않을 것 같다.”

기사를 보았다.

“우석이도 아는 치료방법 있다면, 왜 리시티는……”

“치료보다는 D블록으로 보내는 것이 전체의 질서를 위한 거니까.”

기사는 깔끔하게 대꾸했다.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리시티는 모든 것을 제공한다. 하지만 모두에게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유모로봇, 방, 올푸드자판기, 자동처리기, 치료시스템, 시민권, 등급 그리고 메탑! 이것은 전체의 트랙 안에 있는 자만이 받을 수 있는 것들이다.

“우석의 팔찌 말이야, 그거 나도 영트리에서 봤었다. 대단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영트리에서 팔찌를 차고 있는 것은 우석이 뿐이니까. 더구나 우석은 1등급이잖아. 1등급은 변수가 없다면 장차 리시티 리더가 될 실체야. 그래서 우석이만 특별히 갖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 거지.”

기사는 말을 하다 내 눈치를 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는 말에 인정한 건 아니었다. 우석과 너무도 잘 어울렸으니까.

“그런데 민지에게 환심을 살 만한 물건을 찾으러 난주중고마켓에 갔다가 은둔자를 본거야. 팔찌를 보고 한 눈에 은둔자가 우석인 줄 알았지. 우리 셋이 만났던 그 날”

“민지에게 환심을 사려고?”

나는 의심스럽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기사를 보았다.

“그, 그건 민지가 워낙 나를 무시하니까…… 상처를 주고 싶어서 좀 계획적으로……”

기사는 어물거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지금까지 상황으로 봐서 어떻게 된 것인지 이해되었다.

“은둔자는 타로와 팔찌를 팔고 있었어. 나중에 알았어. 그것들이 마블인지는. 그런데 마블은 주인을 스스로 선택한다나 뭐라나. 은둔자는 내가 물건을 만지는 것조차 거부했어. 순간적으로 아이템 따위에게도 선택받지 못한 분노가 폭발했던 거 같다. 다짜고짜 팔찌를 집어 들고 달아나다 너를 만난 거지.”

여기까지 말한 기사는 순진한 얼굴로 나를 보며 푸시시 웃음을 터트렸다. 뭔가 재미있는 장면을 떠올리고 있는 듯 했다. 왜 안 그렇겠는가. 그 순간 내가 나타났고 기사를 우석이라고 착각한 내가 은둔자의 팔에 매달렸으니…… 나조차 웃음이 나왔다. 은둔자는 또 얼마나 어리둥절했을까. 나도 모르게 큭큭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하지만 엇갈렸던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팔찌는 팔찌 주인에게, 우석은 은둔자로, 떠버리는 기사로, 나는 풀로. 검은고양이 검고는 민지로. 하지만 왠지 완전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것은 아닌 것 같다. 뭔가 조금씩 달라진 자리였다. 우리가 움직여 놓은 것들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우석은 우석대로. 민지는 민지대로. 떠버리는 떠버리대로 조금씩 달라진 자리에 서 있었다. 그래서 달라보였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서로 알게 된 것들이 늘어갈수록 주변에 보이는 것들이 더 커지고, 더 흐려지고, 더 아득해지고, 그럴수록 한없이 소중해져간다고 하면, 이것은 미덕에서 멀어지는 것일까.

“우석은 나 때문에 시험을 포기할 처지였는데도 조사위원회에 나를 신고하지 않았어. 예상하지 못한 일이지. 내가 자수를 한 뒤에는 조사위원회를 만나서 내 변호까지 했고. 덕분에 졸업까지는 영트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 건 재수 없게 됐다. 자유로운 영혼 거거가 나에게는 맞는데 말이지.”

말은 투덜거리는 것 같지만 기사의 표정은 별로 나빠 보이지 않았다. 기사의 본래 심성은 독하지 않다는 것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애틋하게 울렸다.

“아참, 너에게 줄 것이 있어.”

말을 돌리면서 허공에 창고를 불러냈다. 창고 문을 클릭하자 세 개의 아바타가 나타났다. 스승이 만든 난주와 전사 풀, 그리고 내가 만든 새로운 기사 아바타였다. 기사의 눈이 커졌다.

“나에게 준다는 게 이거구나! 오, 오, 얼굴도 아머도 마음에 든다. 진짜 기사 같다!”

날렵한 은빛 아이언 아머를 입은 아바타 앞에서 놀랍다는 듯 기사는 너스레를 떨었다. 약간의 과장이 섞인 말투가 누가 봐도 떠버리였다. 그동안 팔찌 하나 때문에 기사를 우석이라고 착각한 것이 우스울 정도였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다. 난주와 전사 풀은 스승이 남겨주신 거야.”

“난주? 난주중고마켓과 관련 있어? 누구야?”

기사가 난주를 꼼꼼하게 살펴보며 물었다.

“스승이 사랑했던 여인. 난주중고마켓도 스승이 만든 곳이야. 난주를 기다리며.”

말하면서 다시 마음이 찌르르 아팠다. 난주가 나의 생물학적 엄마야. 유모로봇이 아니고 진짜 사람여자. 난주와 내가 함께 벚꽃이 휘날리는 12블록을 걸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아바타들이 돌아볼 것이다. 눈부신 무지갯빛 에너지가 너울을 일으킬지도 모르겠다고 잠시 그 장면을 상상하다 고개를 흔들었다. 곳곳이 난주를 생각나게 하는 지뢰밭이다. 입술을 꼭 다물었다. 죽음의 경계를 헤매는 민지에게 미안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느 새 나는 여자를 난주라는 이름으로 떠올리고 있었다. 난주.

“와, 이건 풀 너의 새로운 아바타구나. 굉장하다! 전사의 모습! 왜 이걸 사용하지 않아?”

“지금 나의 뇌파로는 움직일 수 없어. 능력치가 달라. 내가 전사와 하나가 될 날은 오지 않을 거 같다. 민지가 회복되면 민지에게 주려고……”

나는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무슨 소리야? 너의 아바타를 민지에게 준다는 것이.”

“어차피 나는 사용할 수 없으니까.”

“뇌파에 힘이 생기게 하는 운동 있잖아. 명상도 좀 하고. 뇌근력 운동도 좀 하고. 금방 힘이 생길 거야. 이건 너에게 어울리는 아바타야!”

기사의 말이 진심인 것을 나도 알 수 있다. 처음엔 나도 내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상상했으니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웃음을 보여주었다. 의연하고 밝게. 기사 아바타만 불러내고 창고를 닫았다.

“스승처럼 완벽하게 만들지는 못했지만 내 정성이니까 받아 줄래?”

기사는 내 얼굴을 빤히 보다 쑥스럽게 웃었다.

“이 아바타 원래 주인은 우석이 아냐? 기사를 우석이라고 생각하고 만든 거잖아.”

“원래부터 네 거였어. 너의 뒷모습을 보면서 만들고 싶어진 거니까.”

나는 기사 아바타를 뇌파 교환기에 넣었다. 기사도 기분 좋게 성큼 뇌파 교환기 안으로 들어섰다. 실수로 뇌파가 튕겨지거나 충격이 갈 수도 있지만 기사는 오히려 재미있어하는 표정이었다.

“잘못 될 수도 있어.”

나는 긴장을 풀기 위해 나비더듬이를 까딱거렸다. 노움은 내가 아바타 설계를 할 때마다. “DNA는 속일 수 없지.”라며 중얼거렸었다. 이제야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난주의 딸이었으니까.

“오케이. 내 목숨을 너의 손에 기꺼이 맡긴다.”

기사가 싱겁게 웃었다. 뇌파 연결이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유난히 긴장이 되었다. 뇌파 체인지 프로그램을 돌렸다. 현재 기사의 뇌파 상태가 최상이여서인지 잘 연결되었다. 잠시 후, 기사는 날렵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뇌파 교환기에서 나왔다. 나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았다. 내가 만들었지만 잘 만든 것 같았다. 노움은 또 “DNA는 속일 수 없지.”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기사는 나오자마자 휘청거리더니 혓바닥을 길게 내빼물고 머리를 심하게 흔들었다.

“기사!”

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풋, 기사가 멀쩡하게 고개를 흔들더니 웃었다.

“나 같지 않아서 실험해 본거야.”

나는 기사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정말 화가 났었다. “그렇게 감정적이면 미덕이 아니지.” 기사는 기분 좋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어댔다. 모습은 바뀌어도 버릇은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기사의 그런 모습을 보며 안도했다. 그것이 기사다운 것이니까. 뇌파가 잘 교환된 것이니까.

“이건 어떻게 하지? 중고마켓에서 샀던 아바타인데…… 삭제할까?”

뇌파가 끊긴 낡은 아바타를 가리키며 기사가 물었다. 뇌파가 끊긴 아바타는 라벨이 사라진다. 라벨이 사라진 건 정식으로 팔수는 없다. 그리고 이미 존재하는 기사라는 라벨은 다시 쓸 수 없다.

“중고마켓에서 다시 팔아도 될 것 같아. 누군가는 필요할 수도 있잖아. 어차피 은둔자가 있는지 난주중고마켓에 가보려고 했어. 나가자.”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말 않고 낡은 아바타를 옆구리에 끼고 뚜벅뚜벅 로드숍을 나섰다. 무척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12블록 봄날 햇살이 기사의 어깨에 단정하게 내려앉았다. 우수에 찬 머리카락 위로 벚꽃이 스치며 날렸다. 마치 우석의 뒷모습을 보는 것 같아 깜짝 놀랐다. 갑자기 가슴이 뭉클했다. 우석을 생각하며 아바타를 만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떠버리의 뇌파인데 어째서 이토록 다른 느낌을 주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이, 풀! 날마다 솔라!”

대장장이가 뒤에서 했던 새해 인사를 다시 했다. 못 말려! 못들은 척 기사에게 바짝 따라 붙었다. 기사가 대신 돌아서 기분 좋게 대꾸했다.

“어이! 대장장이! 날마다 솔솔솔솔라라라라!”

나는 옆에서 큭큭 웃었다. 상점가를 돌아 자작나무 숲으로 들어서자 허름한 통나무집, 난주중고마켓이 보였다.

[난주를 기다립니다. -로드숍 풀-]

기사는 팻말 앞에 우뚝 섰다.

“노움 아바타는 삭제되었는데, 아직도 난주를 기다리는 중?”

“아니, 얼마 전에 만났어. 그냥 그 분은 메탑 접속을 하지 않겠대.”

짧게 말하고 팻말을 뽑아 삭제 코드를 눌렀다. 순식간에 팻말이 사라졌다. 난주를 만나고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고 말았다.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찾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기사가 내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기사는 다짜고짜 마켓 안으로 나를 떠밀었다. 무대 한가운데로 불쑥 떠밀려 나오게 된 느낌이 들었다. 마켓 안은 평소보다 두 배는 많은 아바타들로 북적이는 것 같았다. 기사와 나는 은둔자가 서 있던 곳으로 빠르게 걸었다. 발걸음에 맞춰 심장이 두근두근 북을 쳤다. 기사는 표정이 굳은 채 앞만 보고 걸었다. 결국은 1층과 2층을 다 뒤졌지만 은둔자는 보이지 않았다. 은둔자가 서 있던 곳에는 험상궂게 생긴 선장이 초록 앵무새를 팔고 있었다.

“이거 사지 않겠어? 여행 길잡이 앵무새야.”

앵무새도 아바타인지 살펴보았다. 하지만 앵무새는 뇌파가 없는 아이템에 불과했다.

“아니, 앵무새는 필요 없어. 그런데 여기서 혹시 은둔자 보지 못했어?”

기사가 선장에게 물었다.

“봤지.”

“봤어? 어디로 갔어?”

“몰라. 앵무새 사지 않을래? 싸게 줄게. 쓸모가 많아.”

선장은 다시 앵무새를 툭툭 치며 말했다. 그때 앵무새가 말했다.

“백운계곡!”

“뭐?”

나와 기사가 동시에 소리쳤다.

“네가 어떻게 알아?”

앵무새에게 물었다.

“아, 이 녀석은 여행 길잡이라, 여행하는 아바타들의 생각을 아주 잠깐 읽을 줄 알아. 아주 잠깐 동안만.”

선장은 얼버무렸다. 기사는 앵무새를 뚫어지게 보았다. 앵무새는 딴청을 피웠다.

“좋아, 앵무새와 아바타를 서로 교환하자. 라벨도 없고 낡았어도 아바타야. 아이템보다는 훨씬 더 비싸게 팔릴 거야.”

기사가 낡은 아바타를 탁자에 내려놓고 말했다. 선장은 아바타를 이리저리 뒤적였다. 그리고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계약 성사! 물리기 없기야.”

선장이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앵무새야말로 별다른 문제점은 없지?”

기사는 앵무새를 어깨에 올려놓으며 물었다.

“없어. 조금 수다스러운 것 말고는. 아무튼 물리기 없기야.”

선장은 서둘러 기사 아바타를 챙겨 자리를 떠났다. 너무 빨리 사라져서 조금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사기꾼! 나쁜 놈!”

앵무새는 사라지는 선장을 향해 소리쳤다. 우리는 앵무새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뭐야? 왜 이렇게 말이 험해!”

나는 놀라서 앵무새를 바라보았다. 앵무새는 기사 어깨에서 통통 튀었다.

“풋, 어쩐지 선장이 꽁무니 빠지게 도망가더라. 앞으로 좀 골치 아프겠다.”

기사가 싱글싱글 웃었다.

“일단 나가서 의논하자. 민지가 잠이든지 한 시간 정도 지났어. 깨어나면 불안해 할 거야. 의자에 앉아 로그인 하긴 했지만. 일어나면 뭐라도 먹여야 해서……”

나는 시끌시끌한 중고마켓 안에 더 있고 싶지 않았다. 엇갈림처럼 허망하고 슬픈 일이 또 있을까. 뒤쫓아 가면 우석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자작나무 산책길 어디쯤에서 뒷모습으로 기다릴 것만 같았다. 로드숍으로 오면 될 텐데…… 로드숍 간판에는 내 마이크로칩 번호도 있는데…… 너무해. 기사와 나는 자작나무 숲 산책길로 들어섰다. 희고 우아한 나무마다 연두 잎이 음표처럼 달려서 산들바람에 흔들렸다. 기사는 묵묵히 앞만 보고 걸었다. 생각이 많은 얼굴이었다.

“로드숍 간판, 너무해.”

갑자기 앵무새가 지껄였다.

“뭐? 지금 내 생각을 읽은 거야?”

내가 물었다.

“로드숍 풀. 난주?”

앵무새는 알 수 없는 말을 또 지껄였다.

“그건 누구 생각이야?”

기사가 물었다.

“은둔자. 팻말.”

앵무새는 퍼득퍼득 기사의 어깨에서 날갯짓을 했다.

“멍청한 자식.”

앵무새가 또 지껄였다. 기사의 입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기사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앵무새는 몹시 기분이 좋아보였다. 기사가 멋쩍게 웃었다.

“아우, 이건 범죄야. 당장 해체하지 않으면 누군가 신고할 거야.”

내가 소리쳤다.

“중요한 건 은둔자가 로드숍에 들렸었어. 그런데 들어오지 않고 바로 갔어. 왜 그랬지?”

기사는 내 말에 대꾸하지 않고 먼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우리는 자작나무 산책길을 지나 낮은 언덕위로 올랐다. 하늘 멀리 흰 구름 조각이 보였다. 구름 아래 벚나무 사이사이 상점들이 양옆으로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고, 마지막 외진 곳에 로드숍이 보였다. 로드숍을 벗어나면 12블록 둘레길로 이어지고 뜨문뜨문 순례자들이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혹시나 은둔자는 아닐까 나는 어렴풋한 그들의 뒷모습을 하나하나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혹시 너하고 내가 있는 것을 본 건가?”

“그게 뭐……”

“생각보다 은둔자 소심하군. 풋”

기사의 입에서 쓸쓸함이 감도는 떠버리의 웃음이 새어나왔다.

“무슨 소리야?”

“뭐 아무튼, 은둔자는 너와 내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자리를 피한 것 같다. 이제 당분간 여기 나타나지 않을 텐데…… 우리가 찾아가는 수밖에.”

기사는 머리를 털어댔다.

“폼생폼사 잘난 척은!”

앵무새가 기사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기사의 생각을 또 쫑알거렸다. 기사는 난처한 듯 머리를 털어댔다.

“시끄러!”

나는 앵무새의 깃털을 모조리 뽑아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기사를 노려보았다. 기사와 앵무새가 한 덩어리로 킬킬거리며 웃었다.

“너무 화내지 마, 우석이 폼생폼사 맞잖아. 큭큭 아무튼 이 놈은 백운계곡으로 찾아갈 때 유용하게 쓰일 것 같아. 우석이 진짜 생각도 들어볼 수 있고. 사실 우석이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이 없다는 건 맞잖아. 그래서 앵무새가 어디까지 뇌파를 읽는지 실험해 본 거야.”

기사는 노숙해 보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놀랐다. 기사가 거기까지 생각하는 줄은…… 그러나 옳은 방법은 아니다. 난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마음을 해킹할 수는 없어. 마음만은 리시티가 주지 않은 유일한 것이니까…… 마음은 내 것이니까 지키고 싶어. 우석이 마음도.”

나는 언덕 아래를 내려 보며 말했다. 맞는 말인지 알 수 없다. 마음이 내 것이라는 것은 말하면서 깨달았다. 난주가 했던 말이다. 난주는 내 마음을 지키라고 했다. 마음만은 오로지 너의 것이라고. 말없이 돌아선 우석의 뒷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우석과 각자 다른 방향으로 걷고 있다는 것이 이유가 뭐든 마음이 뭐든 속상하고 안타까웠다.

“기사 미안한데, 난 로그아웃해야 할 것 같아. 먼저 백운계곡에 대해 알아봐 줄 수 있겠어? 민지를 생각하면 한시가 급한 것 같아. 다시 만나자.”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일단 로그아웃해야 할 것 같다. 시간 오버다. 어쩌면 은둔자도 영트리에 있을지 모르지. 은둔자를 발견하면 문자 줄게.”

기사는 나무에 기대어 한동안 나를 빤히 보았다. 노숙해진 그 눈빛으로.

“내 마음은……”

기사는 머리를 털며 중얼거렸다. 햇살이 은빛 아이언 아머에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나는 미처 다음 말을 듣지 못하고 먼저 로그아웃을 했다. 모든 장면이 겹쳐지면서 하얗게 빛을 발했다. 그리고 파랗던 하늘이 사라졌다.

민지는 일어나 침대에 앉아있었다. 나는 놀라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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