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에도 유효기간이 있을까? 사람만이 아니라 물건과 일과 장소도 만나서 함께 하고 헤어진다. 얼마 전까지도 사람과 헤어지거나 물건을 버리면 큰 일나는 줄 알았다. 하던 일을 못하게 되면 실패라고 생각했다. 이사를 가거나 해외로 가는 것도 살던 집과 나라를 버리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럼에도 나는 친구와 헤어졌고, 학교를 졸업했고, 직장을 옮겼고, 인도네시아로 이주했다. 과학자를 꿈꾸던 시간도 있었지만, 지금은 인도네시아에 관한 뉴스를 만드는 일을 한다.
‘인연의 유효기간’이라는 말을 처음 떠올린 계기는 마르코(마가) 복음에 나오는 ‘들것에 실린 중풍병자’ 이야기를 읽고 나서다. 중풍병자 한 사람이 들것에 실려서 예수님께 와서 병을 고쳐 달라고 청했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라고 말씀하시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는 이야기다. 그가 아플 때는 움직이기 위해 들것이 필요했지만 건강해진 후에는 들고 가야 할 짐이 됐다. 그의 상황이 바뀌면서 필요한 물건이 달라진 것, 즉 그와 들것의 유효기간이 다 된 것이다.
그즈음 나는 이사를 위해 짐정리를 하고 있었는데, 그 물건을 살 때 마음과 그 물건에 담긴 기억들 때문에 꺼냈다가 넣기를 반복하고 있었던 중이었다. 안 쓰는 그릇과 탁자, 운동한다고 사서 서너번 쓰다가 놓아둔 테니스 라켓, 잘못 산 물건, 누군가의 선물이어서 차마 못 버리는 물건 등 나와 인연이 끝난 물건들이었다.
사람과의 인연도 유효기간이 있을까? 학교를 졸업하면 학교 친구들과 물리적으로 만날 기회가 줄어든다. 매일 같이 밥을 먹고 차를 마시던 동료들도 프로젝트가 끝나거나 직장을 옮기면 다시 만나기 어렵다. 가족모임을 수시로 하던 이웃도 이사를 하면 만남이 드물어지고, 모임을 그만두면 함께 하던 이들과 관심사가 달라진다.
결혼을 하고 자카르타로 이주하면서 서울이라는 공간과 멀어졌다. 시간이 흘러 어느 순간 서울을 자주 오가게 됐고 머무는 기간도 길어졌다. 이제는 자카르타와 인연이 느슨해지고 있다.
나이에 따라 학생, 직장인, 가정주부, 기자 등 과거의 일과 헤어지고 새로운 일과 만났다. 내가 성장하고 하는 일과 생각이 달라지면서 보이게 보이지 않게 많은 것들과 인연을 만들고 인연을 끝냈다. 사람이든 일이든 장소이든 헤어짐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내려놓아야 하는 순간이 있다. 쥐고 싶어도 놓아야 하는 순간도 있고 거부하고 싶어도 새로운 인연을 잡아야 하는 순간도 온다. 지금 인연이 소중한 것은 그 인연에 유효기간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