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만, 박용후
이탈리아의 작가 이탈로 칼비노는 "성공이란 절묘한 언어 표현에 달려 있다. 그것은 종종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영감에서 나올 수도 있지만, 대개는 적확한 말, 그러니까 한 단어도 바꿀 수 없는 문장, 즉 소리와 개념의 가장 효과적인 결합으로 얻어진 (...) 간결하면서도 집중된, 잊을 수 없는 문장을 찾는 참을성 있는 탐구 끝에 얻어진다."라고 했다.
단순함은 치열함의 산물이고, 복잡함은 나태함이 만든다. 세상을 바꾼 디자인이 그렇듯이, 어떤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은 그 성공에 이른 길을 지극히 단순한 몇 가지 원리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말도 복잡하고, 일하는 방식도 복잡하다.
생각의 쓸모는 언어의 다름이 결정하고 언어의 다름은 사람의 다름을 결정한다. 내가 특정 단어를 모르면 그 단어가 품고 있는 세계도 당연히 모른다. 내가 그 단어를 모른다는 것은 곧 그 단어가 품고 있는 세계도 모른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
언어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저서 <논리-철학 논고>에서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The limits of my language are the limits of my worlds)."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언어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고, 단어 혹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차원적 생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보는 방법
사고의 정련은 언어의 갈고닦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그것도 고급언어를 오랫동안 사용하면서 익힌 언어사용 습관이 결정한다. 깊은 사고와 남을 배려하는 행동, 나아가 독창적인 생각과 경이로운 성취를 이뤄낸 비결은 언어를 디자인해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세우고 세상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데 있다.
1. 당신이 사용하는 언어가 곧 당신이다
언어는 언제나 삶과 맞물려 돌아간다. 언어의 비늘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한 슬픔이나 아픔의 얼룩으로, 즐거움과 기쁨의 무늬로 직조된다. 내리막과 오르막, 실패와 성공, 절망과 희망, 혼돈과 질서, 밑바닥과 정상, 걸림돌과 디딤돌, 배경과 전경, 어둠과 밝음처럼 삶은 음양의 이중주다.
용접공의 세계에 불시착한 고시언어
교육 분야 행정고시를 보려고 교육 관련 학과를 찾다가 만난 학과가 바로 교육공학과였다. 공돌이(?)의 언어가 고육공(工)학과의 '공'을 보는 순간, 말 없는 교감 혹은 포근한 연대를 생각한 듯하다. "때로는 잘못 탄 기차가 올바른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는 파울로 코엘료의 말이 생각났다.
언어는 생각의 옷이다
앎은 상처다. 몰랐던 의미를 깨닫는 순간, 기존의 앎에 생채기가 난다. 앎은 감각과 느낌으로 몸에 직접 전달되기도 하지만, 언어를 매개로 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전수되기도 한다.
2. 오해하지 않고 이해하는 법
사람은 자라온 환경과 하는 일에 따라서 주로 사용하는 언어적 틀이 결정된다.
자기 관점에서만 해석하려고 들면, 다른 세계를 다르게 볼 기회조차 얻을 수 없다. 우물 안 개구리가 바깥세상의 언어를 모르는 것과 같다. '언어를 주체적으로 해석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몸으로 경험하고 느낀 자신의 감각적 깨달음을 토대로 타인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뜻이다.
디지털 방해기술이 발전하면서 인간이 책을 읽고 사색하는 능력이, 저자의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깊이 사유하는 뇌의 기능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작가가 언어를 힘들게 찾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독자로서 우리는 그 언어를 각자의 사유체계에 녹여 넣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만의 언어로 자신만의 사유체계를 만들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주체적 해석으로 자기만의 언어적 집 짓기를 시작하는 출발점이다.
나만의 주체적인 언어가 있는가?
'그 사람다움'은 어디서 드러나는 것일까? 각자의 다름과 차이를 드러내는 방법 역시 여러 가지겠지만, 뭔가 다른 사람은 뭔가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 그는 바로 자기 생각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기만의 언어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자기 언어는 곧 정체성이다. 자기 언어를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듣거나 책을 읽고 나서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생각하고 재해석한다.
진부한 언어는 진부한 생각을 낳고, 언어가 틀에 박히면 사고도 틀에 박히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늘 만나는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집요하게 묻고 관찰해야 한다. 질문하고 관찰하지 않으면 다른 생각, 새로운 생각을 할 수가 없고, 결국 또다시 틀에 박힌 언어만 습관적으로 튀어나올 뿐이다.
정 교수는 "가르치는 사람이 하는 일은, 간접 목적어가 직접 목적어를 좋아하게 하는 일"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업의 정의를 자기만의 언어로 기발하게 내린 것이다.
자기 언어를 갖고 언제나 남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은 '관성'이 아니라 '관심'을 갖는다.
언제나 자신이 하는 일을 다르게 시도해 보려고 노력한다. 똑같은 일을 반복해도 그 일이 갖는 의미와 가치를 원점에서 물어보고 또 물어본다. 낡은 생각을 날조하기보다 익은 생각을 어떻게 하면 색다르게 창조할 수 있을지를 고뇌한다.
"모든 편견은 내장에서 나온다"
생태학적 언어와 철학이 없으면 다양한 생명체들이 생태계를 이루며 살아가는 역동적인 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 철학적 개념이 부족하면 복잡한 현실을 꿰뚫는 추상적 사유가 불가능하다. 인문학적 언어가 부족하면 사람의 아픔을 읽어낼 수 있는 감수성이나 공감능력이 떨어진다.
"모든 편견은 내장에서 나온다"는 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에 나오는 말이다. 편견과 내장을 연결시킨 신선한 생각이다. 편견은 편파적인 의견이다. 니체는 편견을 관념적으로 정의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앉아서 비슷한 생각을 끝없이 반복하느라 꼬인 내장에서 편견이 나온다고 생각한 것이다.
세상의 통념을 통렬하게 비틀거나 기대를 깨부수는 표현, 의외적이고 기발한 표현은 듣는 이에게 정수리에 대침 하나가 딱 꽂히는 듯한 짜릿함을 준다.
글도 마찬가지다. 나만의 언어로 써야만 나의 정체성이 잘 드러나는 나다운 글이 된다. 결국 '나다움'이란, 나의 체험을 나의 생각으로 해석하고, 나의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3. 깊이 읽어야 생각도 깊어진다
남의 책을 안 읽는 것도 문제지만, 남의 책만 읽는 것도 문제다. 우리가 책을 읽는 목적은 나와 다른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의 낯선 사유체계에 접속하기 위해서다. 때문에 책을 읽을 때는 의도적으로 시간을 내어 '깊이 읽어야' 한다. 깊이 읽기란, 개념을 곱씹고 문장의 의미를 해석하며 자기 나름의 생각과 주장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자신의 경험만 옳다고 믿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그러한 어리석음과 오만함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를 모르고 말이다. '내 생각은 이런데, 그것이 틀릴 수 있구나' 하는 자극을 받아야만 자신의 일천한 경험의 틀에서 빠져나올 수 있고, 그래야만 내 경험의 깊이와 너비를 능가하는 확장된 관점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그래서 책을 읽는다. 내가 직접 모든 걸 경험할 수 없으니 나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의 체험적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말이다.
책을 읽되 나의 지식과 경험에 비추어 다시 한번 그 의미를 해석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저자의 생각에 수동적으로 따라가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내 삶에 던져주는 의미와 시사점이 무엇인지를 계속 생각해야 한다.
그러려면 책에 몰입하되 읽으면서 수시로 빠져나와야 한다. 저자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무엇을 주장하려는 것인지 멀리서 다시 한번 조명해야 한다. 그렇게 줌인, 줌아웃을 반복하지 않으면 나는 타인의 생각 속으로 그저 빨려 들어가기만 할 뿐 주체적인 사고를 할 수 없다.
지성의 폐활량
'거리의 사상가'로 불리는 일본 철학자 우치다 타츠루의 <우치다 선생이 읽는 법>이라는 책에 보면 '지성의 폐활량'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한다. 저자가 말하는 '지성의 폐활량'이란 복잡한 문제를 만나면 단순화시켜 빠르게 해결방안을 제시하려는 촉급한 욕망을 거둬들이고, 복잡한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꼬인 실타래를 풀듯이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단련되는 '지적 인내심'이다.
'복잡한 문제라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날 것으로 이해해 보려는' 지적 인내심을 발휘해야 한다. 너무 쉽게 단정하고 해석했다가 위험한 생각과 행동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문제는 새로운 언어로 해결된다
주어진 문제나 현상의 본질을 적확한 언어로 기술하고, 설명하며, 이해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주체적으로 해석한다'의 의미이다.
뇌에 '지성적 읽기 회로'를 만드는 법
지능을 넘어서는 지성은, 본능적 습관에서 벗어나 낯설고 불편한 상황과 마주쳐야만 생각난다. 대충 훑어보는 식으로 책을 읽으면, 저자가 어떤 고민과 문제의식을 가졌는지, 왜 이런 문장과 단어를 썼는지 등 활자 뒤에 숨은 의도와 목적을 읽어낼 수가 없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이면의 세계로 파고들어 다각적으로 질문하면서 저자가 숨겨 놓은 의미의 동굴로 들어갈 때, 비로소 '지성'이 생긴다.
우리 뇌는 스스로 신경 회로를 바꾸는 능력이 있는데, 이를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이라고 부른다. 성장과 재조직, 외부환경의 양상에 따라 뇌가 스스로 구조와 기능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덕분에 '깊이 읽기'를 자주 하면 기존의 미약했던 읽기 시냅스가 활성화된다.
현대인은 복잡한 정보를 선별하고 단순화시켜 더 많은 정보를 더 빨리 처리하는 데는 유능해졌지만, 삶에 대해 깊이 사색하고 통찰하는 중요한 능력은 잃은 듯하다. 또 긴 문장을 참고 견디면서 읽어내는 지적 인내심도 현격하게 떨어졌다.
연결시켜 생각하는 '깊이 읽기'
밑줄 치고, 메모하고, 다시 그걸 엮어서 나만의 방식으로 정리하는 훈련을 반복해야만 뇌는 읽기 근육을 만든다. 예를 들어, 고전을 유튜브 강의로 본 사람과 직접 통독한 다음 자기만의 방식으로 정리한 사람이 있다면, 두 사람의 사고력이 같을까? 천양지차로 다르다. 후자는 책 내용 전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구조화시키고 도해로 그려보았기 때문이다.
'깊이 읽기'란 결국 지금 읽고 있는 책의 핵심개념과 원리, 저자의 주장에 대해 비슷하거나 상반되는 개념들을 연결해 보며 읽는 것이다. 알고 있는 지식을 저자의 지식과 연결해 보고, 그걸 통해 내가 새롭게 깨닫거나 느낀 점을 찾아본다. 그러한 사유의 확장 과정에서 '내 삶을 이렇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생각해 보는 것. 이것이 바로 깊이 읽기의 핵심이다.
한마디로 깊이 읽기는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개념에 자신의 생각을 반영해 또 다른 개념으로 재창조하는 활동이다. 그러한 활동을 할 때 독서는 지식을 창조하는 적극적 행위로 거듭난다.
읽기는 결국 쓰기로 완성된다
"저자의 지혜가 끝나는 곳에서 우리의 깨달음이 시작된다. 그것이 독서다."라고 장 그르니에는 말하지 않았던가. 책을 읽기 전에 저자의 문제의식이나 책을 쓰게 된 사연과 배경을 먼저 읽어보면, 저자가 왜 이런 주장으로 이 책의 핵심 메시지를 끌고 가는지 알 수 있다.
질문을 던지고 역지사지 자세로 생각해 본 다음, 저자의 주장에 공감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가려내고,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탐문형 독서가 결국은 깊이 읽기의 전형인 셈이다.
세 번째 방식은 타이핑하며 읽기다. 특별히 공감되는 문장, 내 생각과 배치되는 주장에 밑줄을 친 다음 책을 다 읽고 나서 그 문장을 모조리 순서대로 타이핑한다. 이어서 타이핑한 문장을 중심으로 책을 다 읽고 느낀 점을 추가하면서 독후감을 쓴다.
독서는 읽기만 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쓰기까지 이어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책을 다 읽고 난 다음 자신이 느낀 점을 바탕으로 독서일기나 에세이를 써보는 것이다.
눈으로 읽고, 머리로 생각하며, 가슴으로 느낀 것이 있다면 그냥 흘러가게 놔두어서는 안 된다. 잊어버리기 전에 붙잡아 메모해 두고, 마음에 드는 한 문장은 손글씨로 베껴 써보는 것도 좋다.
독서의 완성은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가 아니다. 책을 읽고 느낀 점을 토대로 리뷰를 써보고, 저자의 메시지를 주체적으로 재해석해 실제 내 삶에 적용할 때다. 그래서 진짜 독서는 몸으로 읽는 체독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독자는 자기가 읽은 책의 저자"라고 했던 알랭 드 보통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쓰기를 목적으로 책을 읽는 사람과 그냥 읽는 사람은 출발부터 다르다.
쓰기라는 목적을 가진 사람은, 한 문장도 허투루 보지 않는다. 낯선 개념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나에게 익숙한 개념을 저자는 어떻게 다르게 사용하는지 비교해 보고, 혹여 다른 저자의 다른 주장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근거로 펼쳐지는지 확인한다.
박용후의 퍼스펙티브 - 언어는 인생입니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다가 의미가 모호한 단어를 만나면 꼭 사전을 찾아봅니다. 익숙한 단어도 가끔 낯설게 느껴질 때면 사전을 찾아 다시 확인합니다. 몇 분 뒤 흔들렸던 생각이 명쾌하게 머릿속에 정리되곤 합니다.
우리는 개념의 최소단위인 단어를 조사로 연결시켜 말과 글의 의미를 완성합니다. 부사를 통해 느낌의 강도를, 형용사를 통해 감정을 드러내고, 접속사를 통해 말의 흐름을 만들어냅니다.
'사람'과 '인간'은 같은 것을 말하지만 담긴 뜻은 다릅니다. '사람'에는 '산다', '살아간다'는 뜻이 담겼다고도 하고, '살아가는 것을 안다(앎)'는 뜻이 담겼다고도 해석합니다.
한편 '인간'이라는 단어는 '인생세간'에서 어원을 찾습니다. 그러나 저는 인간이라는 글자를 보고 다르게 해석합니다. 인간이라는 글자를 잘 살펴보면 인간이 어찌 살아야 하는지가 보입니다. 글자 그대로 풀면 '사람 사이'란 뜻이죠. 사람 사이의 관계에 따라 내 삶의 의미가 만들어집니다.
"생각이나 사상, 관념은 스스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한다. 언어의 외피를 입을 때 비로소 존재 안으로 들어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수사학, 즉 '레토릭(rhetoric)'을 설명한 말이죠. 이 말을 통해 '언어의 쓰임새'의 핵심을 제대로 알아챌 수 있습니다. 생각에 말이라는 옷을 입혀 세상에 내놓는 것, 그것을 통해 사람 사이의 생각이 이어지고 관계가 만들어집니다. 그만큼 말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언어에 대한 앎이 곧 사람에 대한 앎입니다. 또 언어에 대한 앎이 지식에 대한 앎, 삶에 대한 앎입니다. 그래서 언어는 곧 인생입니다.
4. 대충 보니까 대충 생각할 수밖에
사색의 종말
30년간 뇌의 정보처리와 사고방식에 대해 연구한 호주의 교육심리학자 존 스웰러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뇌는 장기 기억력과 단기 기억력이라는 2가지 기억력에 의존하는데, 인터넷으로 읽을 때는 단기 기억력에 폭발적인 정보가 들어가면서 병목현상이 일어나고 집중력이 떨어지며 산만해진다. 반면 책을 읽는 사람의 뇌는 고차원적인 이해와 사고력을 담당하는 장기 기억장치가 활성화된다."
미래학자 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 나오는 말처럼 "구글은 산만함을 업으로 삼는 기업"인지도 모르겠다. 한 페이지에 오래 머물수록 구글은 손해고, 독자가 빨리 보고 넘어갈수록 광고수입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대충 보면 대충 생각한다. 생각을 방해하는 가장 무서운 해충이 바로 '대충'이다.
SNS에 떠다니는 정보나 지식에 의존할수록 내면에 축적되는 지식은 줄어든다.
상상력은 존재하는 현상과 존재하지 않는 이상을 연결할 때 폭발한다. 하지만 외부의 정보를 해석해 낼 내 안의 사유체계가 없다면, 아무리 좋은 정보가 들어와도 기존 정보와 새로운 정보를 연결시킬 수 없다. 미지의 세계를 상상할 기반이 없기 때문이다.
띄엄띄엄 읽거나 훑어보면 사고가 얕아지고 단절된다. 사유의 쪼가리들이 여기저기 날아다니기만 할 뿐 어딘가에 정착하지 못한다. 뿌리를 내리지 못하니 새로운 생각이 자라날 수 없다. 늘 뭔가를 보고 있지만 깊이 생각하며 읽는 게 아니라 대충 볼뿐이다. 그러니 뭔가 읽기는 읽어도 남는 것이 없고 머릿속은 백지상태다.
5. 책의 길이, 사유의 길이
전자책을 본 사람은 알겠지만, 킨들이나 태블릿PC, 스마트폰으로 책을 읽으면 얼마나 읽었는지, 얼마나 남았는지를 직관적으로 알 수 없다. 노르웨이 스타밴거 대학의 앤 망겐 교수는 종이책의 촉감, 두께 같은 '물성'이 읽기에 큰 영향을 준다고 분석했다. 종이책을 읽을 때는 내가 지금 500쪽짜리 소설책을 읽는지, 150쪽짜리 시집을 읽는지 감각으로 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종이의 질감도 느낀다. 이런 감각들이 책을 읽고 나서 이야기를 재구성할 때 기억과 연동되는데, 전자책은 그런 연결고리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게다가 종이가 아닌 화면으로 훑어볼 때는 빠르게 다음으로 넘어가려는 심리적 욕망이 앞선다.
앞서 소개한 철학자 우치다 타츠루의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에 따르면, "독서는 '지금 읽고 있는 나'와 '벌써 다 읽어버린 나'의 공동 작업"이라고 말한다. 두껍고 어려운 책이지만, 그래도 끝까지 읽을 수 있는 원동력은, 책을 다 읽고 나서 느끼는 깨달음의 희열에서 나온다.
괴테의 <파우스트>나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을 직접 읽지 않고 그들의 깊은 사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동영상 강의만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그들이 남긴 텍스트를 열고 하나하나 읽어내는 수고를 투입해야 비로소 사유의 문이 열린다. 깊이 읽은 책의 길이가 내 사유의 깊이와 길이다.
복잡한 문제일수록 지적 인내심이 필요하다. 다양한 해결방안을 대입해서 다각적으로 모색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소 깊이 읽기를 멀리한 사람들은 복잡한 문제도 무조건 빨리 해결하려고 달려든다. 불확실한 상황, 예측불허의 문제일수록 한 분야의 전문성만으로 쉽게 해결되지 않는데도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은근과 끈기뿐이다.
회백질이 줄어든 팝콘 브레인
기술혁명을 이끄는 원동력은 사고혁명이고, 사고혁명의 근원은 사고력을 촉진하는 독서다. 그런데 사고혁명은 독서혁명에서 시작되었고, 독서혁명이 일어나려면 문해력이 필수다. 문해력은 문자의 의미를 해독하는 것을 넘어 문맥 안에서 문장이 의미하는 바를 해석하는 능력이다.
현대인은 3초마다 딴짓을 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15분 이상을 몰입하지 못하는 것을 뜻하는 '쿼터리즘(quarterism)'이라는 단어도 옛말이 되었다. 이제 15분은 너무 길다. 15분은커녕 15초도 깊이 생각하기 어려우니 말이다. 이처럼 시도 때도 없이 입력되는 정보에 시달리는 뇌를 '팝콘 브레인(Popcorn Brain)'이라고 부른다.
다시 강조하지만, 깊이 읽기란 자신이 터득한 삶의 지혜와 책 속 저자의 생각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기존 지식과 새 지식을 연결해 나만의 생각과 관점을 꽃피워 나다움을 만드는 작업이다. 그래서 깊이 읽는 사람은 쉽게 타자의 입장이 되어 간접적으로나마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한다. 그 과정에서 공감능력도 커진다. 공감능력은 한 컷의 '짤'을 보고 일방적으로 판단하거나 순간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다. 콘텍스트 속 텍스트의 의미를 여러 관점에서 해석해 보는 부단한 훈련의 결과다.
검색능력과 사색능력의 반비례
우리의 뇌는 자료와 정보가 입력되면 그것을 지식으로 전환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떠도는 자료나 정보를 지식으로 숙성시키는 사색과 침묵의 시간이다.
검색능력과 사색능력은 반비례인지, 검색속도가 빨라질수록 지식을 창조하는 강도 높은 사색은 뒷전이다. 당신은 어떤가? 어떤 정보를 새롭게 접할 때, 그 정보가 가진 사연과 배경, 문제의식과 핵심 메시지가 무엇인지 생각하는가? 그것을 온전히 스스로 깊이 사색하고 정리하는가? 그런 힘들고 수고로운 과정을 거쳐야만 내 공부의 결과물이 된다.
6. 피가 부족하면 빈혈, 언어가 부족하면 빈어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비트겐슈타인
마찬가지로 두 사람이 주고받는 단어를 한쪽이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 빈곤' 현상이 있다. 빈어 혹은 빈어증이라고 한다. 빈혈을 방치하면 면역력은 물론 집중력도 떨어져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워지듯이, 빈어증을 방치하면 간단한 텍스트도 몰입해서 읽지 못하니 포기하고 만다. 당연히 깊은 사유와 사고가 불가능하다.
특정한 주제로 짧은 글을 써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내가 쓴 단어나 개념의 수준을 보면 내가 얼마나 개념이 없는지도 한눈에 보인다.
예를 들면 여러분은 글을 쓸 때 반성과 성찰, 백미와 압권, 변동, 변화, 변천, 비난, 비판, 비평의 차이를 구분해서 쓰는가? 모두가 미묘한 차이를 지닌 유사어다. 가령 개인 차원의 일회적인 반성과, 다른 것과의 관계성 속에서 지속성을 띠는 성찰은 다르다. 뛰어난 작품에는 백미와 압권을 함께 쓸 수 있으나 뛰어난 사람에게는 압권을 쓸 수 없다. 변동이 일정 기간에 일어나는 변화를 의미한다면, 변화와 변천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추이를 강조한다. 다만 변천은 사물의 상태나 성질을 나타내는 경우, 예를 들면 맛이나 표정의 변화에 변천을 쓸 수 없다. 비난은 주로 잘못된 점을 잡아서 나쁘게 말하는 것이고, 비판은 옳고 그름을 따져 말하되 주로 부정적으로 언급할 때 사용한다. 이에 반해 비평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가리지 않고 상대의 작품에 대해 논하는 것을 말한다.
'한자' 모르면 어휘력도 한심
은유법은 복잡한 생각이나 현상을 알기 쉽게 표현하면서도 각각의 현상이나 대상이 지닌 의미의 핵심을 꿰뚫어 전달한다. 하지만 은유법으로 의사소통하려면 은유에 동원되는 어휘의 뜻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독서는 피클이다'라는 표현을 살펴보자.
이것은 독서가 '비가역적 변화'임을 암시하는 비유다. 즉 책을 읽고 나면 이전의 상태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은유는 서로 관계없는 둘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점을 찾아 연결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서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익숙한 어휘를 얼마나 많이 동원해서 절묘하게 연결하느냐가 관건이다.
이렇게 쓸 수 있는 모든 단어를 한자로 써보니, 한국어 단어의 뜻이 더 명료해졌다.
7. 왜 언어를 디자인해야 하는가?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은,
그 문제들이 발생할 때 사용했던 사고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아인슈타인
김경후 시인은 '문자'라는 시에서 "다음 생애에 나는 너의 문자 너의 모국어로 태어날 것이다."라고 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적확한 단어가 없으면 자기 입장에서 쉽게 단정해버린다. 앞서 말했듯이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는 동원할 수 있는 언어의 차이다. 아마추어는 언어가 빈약하다. 언어가 빈약하니 생각도 미천하고, 생각이 미천하니 남다르게 행동할 가능성의 폭도 좁다.
뭔가 다른 사람은 사용하는 언어부터 남다르다
'뭔가 다른 사람'은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생각을 하고, 그것을 창의적인 언어에 담아 표현한다. 누구도 사용하지 않은 개념을 새롭게 창조하거나, 기존 개념을 전혀 다르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재개념화 혹은 재정의한다. 이들은 거기에서 큰 재미와 의미를 느낀다.
소위 '성공하는 사람'들은 편안한 삶에서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안전한 삶의 경계를 벗어나 낯선 곳으로 탈주하는 과정을 즐긴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낯선 부딪힘을 즐기고, 그런 경험을 또 새로운 언어로 표현하길 즐긴다. 이들은 틀에 박힌 언어가 아닌 새로운 통찰을 주는 깨달음의 언어를 원한다.
비슷한 성취를 거두어도 이들이 전혀 다르게 보이는 이유는, 결과를 드러내는 언어 사용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철판을 용접하며 회색빛 청춘을 보냈기에, '지식융합' 대신 '지식용접(knowledge welding)'이라는 개념을 창안했다. 이질적 지식을 용접해서 새로운 지식을 만드는 '지식의 연금술'을 생각한 결과다. 기존의 개념에 머무르기보다 나만의 열정과 철학을 가미한 새로운 개념을 창조할 때 모범생의 길이 시작된다.
모범생은 지금까지 배운 언어로 주어진 현상을 설명하고 이해한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쓰던 방식대로 기존의 언어를 쓰니 삶의 변화가 없다. 반면 모험생은 어제와 다른 방식으로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언어의 쓸모를 바꿔 본인의 쓸모를 업그레이드하면 세상을 위한 쓰임도 달라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언어만큼 내 세계가 열린다
세상이 틀에 박힌 게 아니라 내 관점과 언어가 타성에 젖었을 뿐이다. 작년에 사용했던 언어와 올해의 언어가 수준이 비슷하다면 나는 1년 동안 갇혀 산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배운 언어만큼 세상은 어제와 다르게 열린다. 새로운 언어를 입력하지 않으면 내 삶의 출력은 바뀌지 않는다.
상품으로써의 책은 점차 가치가 떨어지는 소모품이지만, 작품으로써의 책은 보면 볼수록 가치가 올라가는 소장품이다.
어떤 언어를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생각이 바뀌고, 우리는 실제로 그 생각대로 행동한다.
나는 내가 사용하는 언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표현한 하이데거의 말처럼, 언어는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자세이자 태도이고, 그러므로 시선의 높이와 관점을 결정한다. 그뿐 아니라 사유하는 방식까지 결정한다. 언어를 잘 디자인하고 언어력을 갈고 다듬어야 하는 이유다.
언어적 관성에서 벗어나기
타성에 젖은 언어로는 이전과 다른 사유체계를 만들어낼 수 없다. 다양한 언어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문제에 직면했을 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사고법을 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문제해결(problem solution)'과 문제해소(problem resolution)'는 비슷한 개념처럼 보이지만 의미는 전혀 다르다. 문제해결은, 문제가 완벽하게 규명될 수 있고 해결될 수 있다는 과학적 신념을 반영한 개념이다. 이에 반해 문제해소는 좀 복잡하다. 문제해소는, 상황에 따라 문제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항상 이해관계자의 갈등이 내재해 있음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절대로 완벽하게 해명할 수 없고 해결할 수도 없는, '심리적 합의'의 이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언어는 습관이자 관성이다. 습관적인 단어만 사용하면 사고도 거기서 단절된다.
언어는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그릇의 크기가 곧 생각의 크기이고, 그릇이 바뀌면 거기에 담는 생각도 달라진다.
나는 단순히 대학교수가 아니라 지식생태학자나 지식산부인과 의사로 살아갈 때 이전과 다른 상상력과 창의력이 발휘된다. 전복적인 언어는 기존의 구태의연한 사고까지도 전복시켜 준다. 창조적 파괴를 일으키는 혁명의 촉진제인 셈이다.
8. 개념 없이 살면 안 되는 이유
"필름은 그릇이야.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이미지를 다 담을 수 있으니까."
'이미지를 담는 그릇'이라고 재정의한 순간, 필름은 화학물질의 반응 같은 난해한 기술이 아니라 꿈, 희망, 기적을 담는 컨셉을 입었다. 잠깐의 고뇌로 자신만의 언어적 사유가 탄생했다.
삶은 결국 언어를 매개로 재탄생한다. 예술적인 언어를 가진 사람의 삶은 예술작품이 되고, 평범한 언어를 가진 사람의 삶은 평범한 것이 된다. 아무리 독특한 경험과 나다움이 있어도 나만의 언어를 못 만나면 나만의 스토리도 없다.
스토리(story)가 축적되면 역사(history)가 되고, 역사는 결국 남과 비교할 수 없는 나의 길(way)을 만든다. 나의 길에는 나만의 문제의식과 사유가 존재한다. 언어를 공부하고 개념을 습득해 독창적인 방식으로 나다움을 드러낼 때, 나는 나만의 길, 나다운 길을 걸어갈 수 있다.
개념이라는 렌즈를 바꿔야 내가 보는 세상이 바뀐다
언어라는 다리를 건너야 생각이 밖으로 나올 수 있는데, 그 언어가 부실하거나 조악하면 다리가 없거나 끊어진 것이다. 새로운 언어는 사고혁명을 일으키는 원동력이자 새로운 창이다. 이전에 볼 수 없는 세계를 열어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어렴풋하던 관념이 나의 이지와 집념을 만나면 서서히 신념으로 전환되는데, 가슴속에 품은 신념을 표현하는 데도 개념이 필요하다.
1년 전에 썼던 개념을 지금도 똑같이 반복해서 쓰고 있다면, 나는 1년간 개념 없이 산 것이다. 개념 없이 살았다는 것은, 생각의 변화 없이 1년을 살았다는 뜻이다. 어제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려면 어제와 다른 개념을 가져야 한다.
해상도 높은 언어를 가졌는가?
어휘력이 풍부하다는 이야기는, 내가 어떤 감정을 느낄 때 그것을 다양하게 표현할 선택지가 많다는 의미다. 예를 들면 뭔가를 볼 때, 보는 위치나 자세, 태도에 따라서 보는 방식도 달라진다.
어휘력이 풍부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표현력에 드러난다. 어휘력이 풍부한 사람은 같은 현상이나 사물을 보고도 감정을 '미적분'하듯 구체적으로 묘사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같은 언어를 반복할 뿐이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소설 <안녕 시모키타자와>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을 누군가 언어로 분명하게 말해주면 이렇듯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처럼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순간과 장면, 전경과 배경, 풍경과 광경에 대해 글을 쓰려고 할 때 생각만큼 쉽게 글로 옮겨지지 않는 것 역시 내가 가진 언어의 한계 때문이다.
다양한 경험을 해도 그 경험을 포착할 만한 적절한 개념이 없다면 그냥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다. 훗날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결국 색다른 경험이 계속 축적되어도 그 경험이 내포한 의미를 포착할 수 없다.
언어의 속뜻을 공유할 때 공동의 집도 굳건해진다
모호한 개념으로 상대방을 이해시키려는 노력이 아닌, 짧지만 강력한 비트의 말로 마음을 움직이는 대화가 이루어질 때, 공동체는 튼실한 신뢰와 연대를 구축할 수 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동행의 언어보다 동원의 언어만 남으면서' 공동체 내에서의 인간관계도 무너지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동행의 언어'는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주고받는 언어다. 반면 '동원의 언어'는 상대보다 나를 내세우고, 상대의 치명적인 약점을 건드려 상처를 내려는 언어다. 동원의 언어는 같은 공동체 사람들이 쉽게, 즉흥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극적인 언어다. 하지만 동행의 언어는 타자를 따뜻하게 품기 위한 정감의 언어다. 문제는 동행의 언어보다 동원의 언어가 자주 구사되면서 공동체는 붕괴되고 인간관계는 피폐해진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빈약한 언어는 필연적으로 불통을 낳는다. 상대가 사용하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니 원활한 소통이 안 되고 오해가 쌓인다. 같은 언어도 다르게 해석한다. 그렇게 되면 언어를 매개로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구축하기 어렵다.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를 쓴 사회학자 엄기호 소장은 "언어는 세계를 짓는 도구다. 우리는 (...) 말을 통해 의미 있는 관계를 맺으면서 그 안에 (...) 머무른다. 이것을 공동의 집, 세계라고 한다."라고 했다. 공동의 집에서 의미심장한 대화가 자주 오가려면, 언어에 담긴 사회적, 역사적 의미도 공유해야 한다.
개념이 부족한데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아무리 많은 모험을 해도 그걸 표현할 언어가 부족하면 모험은 가치를 잃는다. 그래서 언어가 부족하면 좋은 어른이 될 수 없다. 언어의 품격이 나의 품격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는 "개념은 인격"이라고 했다. 내가 사용하는 개념의 격이 곧 나의 인격이고, 내가 사용하는 개념의 한계가 곧 내 세계의 한계라는 뜻이다.
아이와 어른의 차이는 사용하는 개념의 차이이고, 어른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개념의 성숙'이다. 물론 나이와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어른이 개념적으로 성숙한 것도 아니고, 나이가 많다고 해서 개념과 인격이 저절로 갖춰지는 것도 아니다. 어른은 어른 나름이다.
살다 보면 수많은 개념이 우리에게 다가와 우연히 꽂힌다. 그 개념들은 성숙과 숙성을 거쳐야만 신념이 된다. 내가 의도적으로 포착해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떠도는 관념은 그저 떠도는 관념에 그친다는 뜻이다. 어제와 다른 개념을 만나지 않으면, 오늘을 살고 미래를 지향해도 여전히 나의 세계는 과거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소설과 배우아가 <당나귀들>에서 사용한 표현을 빌리면 '언어의 틈새'를 메우려는 노력이 부단히 전개될 때 언어의 격이 한층 더 높아진다.
자신만의 성숙한 사고체계를 격이 다른 언어로 표현할 때, 우리는 그가 어른답다고 느낀다. 당연히 그가 미치는 영향력도 다르다. 세상에 육체적 어른은 많아도 정신적 어른이 드문 이유는, 그들이 구사하는 언어력의 차이 때문이다.
9. "이 사전 하나가 세상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언어의 격은 부단히 갈고닦아야 높아진다. 이미 알고 있는 언어를 새로운 언어로 바꾸고, 이전과 다른 개념으로 재정의하는 다각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언격'을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나만의 개념사전을 만드는 것이다.
다른 언어를 갖는 게 중요하다
처음 만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면 그가 사용하는 언어를 살펴보면 된다. 한 사람의 언어는 삶 속에서 숙성된 사고를 반영한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내가 쓰는 언어 이상으로 타인에 대해 생각할 수도, 세계를 다르게 보거나 느낄 수도 없다. 또 언어가 없으면 타인과의 연결도, 세상과의 연결도 없다. 언어를 풍부하게 구사하는 사람은, 그만큼 다양한 다리로 세상과 연결된다.
그저 약속한 기호에 불과한 것처럼 보여도, 언어는 우리의 삶을 꽉 쥐고 있다. 그래서 특히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를 어떻게 다시 정의할 것인가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단어의 정의가 바뀌면 삶을 바라보는 프레임이 바뀌고, 프레임이 바뀌면 비로소 생각의 혁명도 시작된다.
책도 시간이 지나면 개정판을 내듯이, 사전(辭典)도 사전(死典)이 되지 않으려면 주기적으로 개정하고 증보해야 한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고 세상을 바라보는 일은 결국 언어를 매개로 한 사고활동이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를 반추해 보고 나의 체험적 느낌과 깨달음으로 재정의해보는 노력은 사고혁명의 중요한 시발점이다.
한 단어, 한 단어 쌓아 한 권의 책을 만드는 일
세상의 통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의심해 본 적 있는가? 질문해 본 적 있는가? 나의 신념을 담아 재해석해본 적 있는가? 개념정의가 바뀌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바뀐다. 관점을 바꾸려면 먼저 언어 사용방식을 바꿔야 한다. 관점은 특정 단어와 단어가 연결되는 방식, 즉 연상에 따라서 바뀌기도 하니까 말이다. 알다시피 제임스 다이슨은 선풍기에는 반드시 날개가 있어야 한다는 통념에 "왜 꼭 그래야 해?" 하고 질문했고, 그에 대한 자신만의 대답으로 날개 없는 선풍기를 만들었다.
검색중독증 환자들이 넘쳐나는 세상에 땀과 정성으로 얼룩진 종이사전을 만드는 일은, 그 자체로 이미 엄청난 시대적 반항이 아닌가?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사건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이 계속해서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만의 개념사전은 갈고닦은 만큼 눈부시게 빛날 수 있다.
세상은 누가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두 사전은 어떻게 다를까? <신메이카이 국어사전>은 주관적이면서 도발적인 의미를 비교적 구체적으로, 길게 풀이한다. 반면 <산세이도 국어사전>은 지극히 객관적이고 현대적인 의미를 비교적 단문으로, 단정적으로 정의한다. 전자는 국어사전에 대한 고정관념을 파괴하고 개념의 의미를 파격적으로 제시한다. 후자는 예상대로 국어사전다운 개념 정의를 내린다.
예를 들어 후자는 범인이라는 단어를 보통 사람, 하찮은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전자는 "스스로를 향상시키려는 노력을 게을리하거나 공명심을 갖고 있지 않거나 해서 다른 것에 대한 영향력이 전무한 채 일생을 마치는 사람 또는 가정 제일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는 대다수 서민이라는 뜻"으로 정의한다. 전자의 의미로 살아가는 사람과 후자의 의미로 사는 사람은 전혀 다르다. 실제 사전에서도 누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뜻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
10. 신념을 구체적으로 담아라: 신념사전
강한 신념이야말로 거짓보다 더 위험한 진리의 적이다
니체
살아오면서 만난 개념을 자신의 관점으로 재정의해보면, 그동안 간과했던 삶의 의미를 반추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교육'은, 야생에서 자라는 잡초처럼 시련과 역경 속에서 스스로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아가는 경험이자 과정이다. 나는 이런 식으로 '교육'이라는 개념을 재개념화 했다.
하루의 3개씩 나만의 정의를 써보자
용기: 씩씩하고 굳센 기운. 또는 사물을 겁내지 아니하는 기개
▶ 내가 살아가는 삶을 어제와 다르게 바꿔 나가는 작은 발걸음
한계: 사물이나 능력, 책임 따위가 실제 작용할 수 있는 범위
▶ 한계는 한 게 없는 사람의 핑계
열정: 어떤 일에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열중하는 마음
▶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의 믿음 위에 피는 불꽃같은 의지
독서: 책을 읽음
▶ 메시지로 어루만져주는 애무나 책과 사랑에 빠지는 연애
언어를 경작하는 개념의 텃밭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개념은 단순한 단어나 어휘가 아니라 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 고뇌한 사유의 흔적이자 사고의 결정체다.
철학자 리처드 로티가 저서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에서 소개한 '마지막 단어(Final Vocabulary)'라는 개념이다. '마지막 단어'란 개인 혹은 집단이 최후까지 의지하는 신념어이자 평소에는 의식 아래에 있다가 삶이 흔들릴 때 표면 위로 솟아올라 죽음과도 맞바꿀 수 있는 결연한 한 단어다.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에서 새로운 전문가의 모습을 제시한다. 그가 제시하는 전문가는 '브리꼴레르'다. '브리꼴레르'는 자신이 가진 도구와 지식으로 다양한 실험과 모색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역발상의 귀재이자 문제해결사의 전형이다. 브리꼴레르는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반드시 계획을 세워서 행동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깬다. 임기응변으로 주어진 상황에서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데 초점을 맞춘다. 체계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주어진 여건을 수용하면서 상황에 따라 움직인다.
새로운 개념은 호기심이 많은 사람, 문제의식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만 포착된다.
202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심사평을 쓴 문정희, 정호승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삶의 내용이 내포되지 않는 시의 언어는 그 의미를 잃는다. 의미를 잃고 형식만 남음으로써 소통이 불가능한 시가 많다는 것은 분명 한국 시의 위기다." 이 글을 읽고 나는 시와 언어와 삶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삶을 반영하는 언어가 없으면 그 글은 공허한 글이 되겠구나 하는 배움을 얻었다.
여름밤에 '바람이 들어오게 창문을 열라'는 아버지와 '모기 들어오니 창문 닫아라' 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어쩔 줄 모르던 아이가 선택한 전략은 방충망을 설치하는 것이다. 이런 전략을 양자택일(either-or)이 아니라 양자병합(both and)이라고 한다. 한쪽만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양쪽의 모순을 끌어안고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는 것이다.
특히 우리말에는 유난히 양극단을 끌어안는 언어가 많다. 전 세계 어느 나라 언어에도 없는 묘한 말들이다. 들락날락, 오르락내리락, 보일락말락, 시원섭섭 같은 말이 그렇다. 양쪽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고 둘 다 끌어안는 양단불락의 언어로, 소위 '임도 보고 뽕도 따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같은 속담과도 일맥상통한다.
11. 세상에 없는 나만의 관점을 가져라: 관점사전
똑같은 현상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생각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가령 '버스가 서는 곳'은 '버스를 타는 곳'으로, '지급해야 할 이자'가 아니라 '고객이 받을 이자'라고 관점을 바꿔보는 것이다.
관점을 바꾸려면 먼저 언어를 바꿔야 한다. 언어에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의지와 의도가 담긴다. 쓰는 언어를 보면 그가 어떤 행동을 할지도 알 수 있다. 언어를 바꾸면 생각은 물론 행동도 바뀌는데, 관점의 전환 역시 언어의 전환에서 시작된다. 보통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개념에 다른 의미를 덧붙이거나 그것을 새롭게 재정의하는 순간, 관점의 전환이 일어난다.
당연함을 부정하고 새로운 질문을 던지면 생각이 바뀐다. 이 책의 공저자인 대한민국 유일의 관점 디자이너 박용후는 관점사전을 "같은 것을 다르게 보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러면서 "본질을 다르게 풀어내지만 결국 본질은 같다."라고 덧붙인다.
먼저 나는 누구인가를 재정의하라
어쩌면 세상의 모든 혁신적인 상품은 고객의 불편, 불안, 불만을 측은지심으로 바라본 데서 태어난 게 아닐까? 고객의 불편, 불안, 불만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었기에 새로운 혁신과 가능성의 문을 열 수 있었다.
커뮤니케이션은 '서로의 의도를 읽는 것'이다.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타인의 관점에서 새롭게 정의해 보는 노력이 중요하다. '누가,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단어를 정의하는가?' 바로 거기에 기회가 숨어 있다. 관점을 바꿔 재정의하고 재해석하면, 이제까지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단어는 욕망을 나르는 매개체
세상은 내가 정의하지 않으면 남이 내린 정의에 갇혀 살 수밖에 없다. 내가 내린 나의 정의는 내 사고의 핵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나의 정의를 보면 내가 세상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는지 알 수 있다. 단어는 아무 목적의식 없이 표류하지 않는다. 반드시 그 단어를 창조한 사람 혹은 사용하는 사람의 문제의식과 목적의식이 포함된다. 그래서 단어는 사람의 생각을 담고 욕망을 실어 나르는 매개체다.
흐름을 바꾸는 사람들의 공통점
기존의 흐름과 반대되는 관점 혹은 다른 각도의 관점을 갖도록 나 자신을 깨우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늘 깨어 있어야만 휩쓸려가지 않고 흐름을 주도한다.
작가들의 통찰과 광고 카피의 재치를 훔쳐라
고깃집 간판의 글귀 "사는 건 어차피 고기서 고기다.", 생맥줏집 간판의 "그 자식 씹고 싶을 때 노가리"는 인생사 희로애락과 어렵고 힘든 일을 같이 풀어보자는 위로가 담겨 있다. '망각을 줄이고 추억을 늘리는 방법'을 카피로 한 수첩광고, '마흔은 두 번째 스무 살'이라는 백화점 광고에도 독특한 관점이 엿보인다.
"한 잔의 커피는 한 번의 여행입니다."는 맥심 커피 광고다. 커피를 여행이라고 은유했다. "손에서는 안 녹고 입안에서만 녹아요." M&M 초콜릿 광고는 운율을 잘 살렸다. 이처럼 우리의 일상은 언어를 요리해서 사고력을 향상시키려는 사람에게 배움의 천국이다.
단어 뒤집기는 생각의 물구나무서기
역경을 뒤집으면 경력이다. 한글을 뒤집어 보면 한자의 의미는 다르지만 색다른 깨달음을 준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경력은 견디기 힘든 역경을 이겨낸 사람들이 가진 경쟁력이다. 남다른 경력을 가지려면 남다른 역경을 뚫고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남다른 경력은 견디기 어려운 역경이 낳은 자식인 셈이다.
'성실'하지 않으면 '실성'하고, '지금' 하지 않으면 '금지'되며,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으면 '상실'의 아픔을 겪는다. '체육'으로 몸을 단련하지 않으면 '육체'를 잃고, '관습'을 타파하지 않으면 나쁜 '습관'에 얽매여 산다. '작가' 기질을 보여주지 않으면 '가작'도 탄생할 수 없고, '일생'을 목숨 걸고 살지 않으면 '생일'조차 맞이할 수 없다.
박용후의 퍼스펙티브 - '같은 것을 다르게' 보는 능력, 어떻게 기를까?
세상에는 세상의 흐름이 만들어낸 관성대로 살아가는 사람과 성공을 위한 자신만의 관성을 만드는 사람으로 나뉜다. 세상의 관성대로 흘러가는 사람과 나만의 관성을 만들어 새로운 흐름을 만드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세상이 바뀌고 난 다음에 변화를 아는 사람과 바뀌는 과정에서 그것을 감각적으로 느끼는 사람의 차이다. 흐름을 느끼지 못한 채 그 흐름에 그냥 휩쓸려갈 것인가, 멈추어 서서 흐름을 만들어내 성공할 것인가?
콜링은 우리말로 '소명'이다. 자신의 존재이유를 깨닫고 신성한 목적이 이끄는 대로 나를 다시 포지셔닝할 때 '소명'은 다시 '사명'으로 불타오른다.
12. 창의는 연결이다: 연상사전
스티브 잡스는 "창의성은 사물과 사물을 연결하는 것이다(Creativity is just connecting things)."라고 정의했다. 창의성은 결국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모든 것을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연결하는 상상력이다. 그러니 창의성이 발휘되려면 우선 재료가 될 2가지 이상의 무언가를 내면에 축적해야 한다. 내면의 데이터베이스에 재료가 풍부하게 쌓여 있는 사람은 그만큼 다양한 연결이 가능하다.
모든 상상은 발상이 아니라 연상이다. 창의성은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의 말처럼 낯설고 새로운 것들을 이렇게 이어 붙이고 저렇게 연결해 보는 힘이 바로 창의성이다.
철판과 보름달
체험의 깊이와 너비가 연상의 수준과 스펙트럼이다. 연상의 수준은 곧 체험적 상상으로 결정된다. 그러니 체험적 상상은 공상도 허상도, 망상도 몽상도 아니다. 어느 순간 구체적으로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돌파력 혹은 불굴의 의지로 작동한다. 체험적 상상을 이렇게 붙이고 저렇게 합치는 순간, 내면에서 위대한 창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언어와 체험이 만나면 색다른 개념적 사유와 상상이 촉발된다.
'시간의 점'은 체험의 총량
한 사람의 생각은 그가 살아오면서 보고 느끼고 경험하면서 깨달은 체험적 지혜의 역사적 산물이다. 그래서 바꾸기가 쉽지 않다. 생각은 삶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생각을 바꾸는 것은 삶을 바꾸는 것이다.
세상에 쓸데없는 생각이란 없다.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생각만 있을 뿐이다. 모든 생각은 제때를 만났을 때 각자의 문제의식과 사연으로 빛난다.
여러분도 그런 장면이 있는가?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 사연, 시행착오 등, 소위 '산전수전'이라 부르는 체험 말이다. 그러한 체험적 고뇌가 녹아 있는 책을 읽다 보면, 내 몸에 생긴 시간의 점이 선을 만들고 그 선이 다시 면을 만든다.
어쩌면 그런 선들이 모여 만든 면이 바로 그 사람의 면모 아닐까? 한 사람의 면모는 그가 지금까지 만난 수많은 점과 점이 연결되어 만든 선들의 합작품이다. 결국 그 면모와 깊이와 너비가 사상의 밀도와 강도다.
세상에 없는 나만의 작품을 팜
먼저 상대에게 나의 뭔가를 팔려면 나만의 차별화된 콘텐츠가 피어야 한다. 독창적인 향기와 색깔을 지닌 콘텐츠라는 꽃이 피어야 사람들에게 호소할 수 있다. 그래야 고객을 감동시킬 수도 있다. 나다워지면 색달라지고, 색달라지면 남달라 진다. 그러한 나다움이 반영된 작품은 요란하게 홍보하거나 마케팅하지 않아도 그 이름 자체가 브랜드가 된다.
내가 본 것까지만 내 세상이다
겨우내 움츠렸던 가슴을 펴고 마음으로 삼라만상을 보면 안 보던 게 보인다. 다른 게 보이지 않는 이유는, 늘 보던 관점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늘 거기 있었지만 건성으로 봤기 때문에 안 보였다. 원래 그런 것, 당연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영어로 비전은 비주얼라이제이션의 약자다. 비전은 비전이 달성된 모습을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시각화하고 상상하는 것이다.
13. 머리가 아닌 몸이 느낀 마음: 감성사전
마음에는 이성이 전혀 알 수 없는 이유가 있다
파스칼
나만의 한(狠)국어 사전
<슬픔의 위안>이라는 아름다운 에세이가 있다. 거기에 "슬픔은 결코의 무게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슬픔(grief)이라는 단어는 '무겁다'는 뜻의 중세영어 'gref'에서 왔다고 한다. 슬픔은 저마다의 무게로 슬픔에 처한 사람을 무겁게 짓누른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들은, '슬퍼한다는 것은 저마다 처한 슬픔에 대해 '결코'를 말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나에게 그런 슬픔이 '결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슬픔이 와도 '결코' 울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지만, 막상 내가 맞닥뜨린 슬픔의 무게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무겁다는 뜻이다.
'일생에 단 한 번만 오는 감정'은 어떻게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아무리 폭발할 것 같은 감정도, 말이나 글이 되는 순간 싸늘히 식어버린다. 껍질만 남은 언어일지라도, 그럼에도 우리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수많은 단어에 나의 주관적인 표정을 담아 기록해두어야 한다.
앎과 삶이 일치되는 정서사전
사람이 머리는 속일 수 있어도, 몸이 느끼는 감정은 속일 수 없다. 밖으로 드러난 표정은 위장할 수 있지만, 표정을 조종하는 내면의 감정은 위장할 수 없다.
특히 시인들은 감각의 경련이 수시로 찾아들 때마다 감성을 흔들어 깨운다. 그때마다 새로운 언어로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쓴다.
역지사지+측은지심=시
김승희 시인의 시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에서, 시인은 '그래도'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이라고 말한다. 자주 쓰는 '그래도'라는 말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는 섬'으로 표현했다.
똑같은 현상이나 사물도 시인의 눈으로 본다. 그러면 다르게 보이고, 다른 것이 보인다. 시인들은 역지사지의 달인들이고, 또 세상의 모든 시적 상상력은 측은지심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아픈 사람이다. 가슴으로 느끼는 세상의 아픔과 슬픔을 시로 승화시키기 때문이다. 시인은 체험적 느낌을 절제된 시어로 압축하고, 국어사전에 나온 수많은 어휘를 가슴으로 재정의한다. 그 과정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간과하는 고정관념이나 타성을 가슴의 언어로 재조율해 세상에 내놓는다.
애틋한 사연은 막연한 상상을 뛰어넘는다. 거기서 비롯된 감수성은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창조적 상상력의 밑거름이 된다.
가슴으로 느끼는 사람은 머리로 생각하지 못한 것을 본다. 심장은 특별한 감지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심장은 거짓말하지 못한다. 다만 가슴으로 느낀 깨달음이 머리로 올라가면서 희석되고 탈색되기 때문에 거짓말이 시작된다. 어떤 대상에 대한 가장 정직한 느낌은, 머리가 이해하기 전에 가슴으로 먼저 온다. 감(感)은 언제나 앎을 앞선다. 체험하지 않은 것은, 머리로 알 수 있어도 가슴으로 느낄 수는 없다.
14. 본질을 파고드는 사유: 은유사전
관계없는 두 단어 연결하기
역시 새로운 깨달음은 예고 없이 갑자기 찾아온다. 우연한 마주침이 색다른 깨우침을 주고, 깨우침은 스스로를 깨뜨려야 깨달음이 된다.
그러한 깨우침과 환기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반성할 수 있다. '내 글이 독자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는 않았을까?' '내 글을 읽고 밤잠을 설친 사람도 있었을까?'
강민혁 작가는 <자기 배려의 책 읽기>에서 읽기를 '정신의 관절'에 비유한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뼈와 뼈를 잇는 관절이 튼튼해진다는 것이다. 정신의 관절은 독자의 정신세계와 저자의 정신세계를 이어준다. 이것이 바로 메타포(metaphor), 즉 은유의 위력이다. 메타포는 사유의 가능성을 무한대로 확장시킨다. 겉으로 보기에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들의 공통점을 찾아 관계가 있는 것으로 연결하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둘의 공통점을 찾는 것은 그야말로 '전두엽을 때리는' 놀라운 깨달음이자, 산만한 앎에 내리치는 번개나 천둥에 비견할 만한 각성이다. 오랫동안 고민했지만 적절한 표현이나 실마리를 찾지 못한 단념들이 마침내 적절한 표현을 만나면 뇌에 불이 켜진 듯하고 심장이 두근거린다. 이성복 시인은 어느 시에서 '스스로 비유를 만들 수 있는 것만이 자신의 앎'이라고 했다. '남이 만든 비유를 차용하는 것은, 남의 집에 세 들어 사는 것과 같다'고도 했다.
메타포는 배움의 대포
나는 '사랑은 양초'라고 하고, 너는 '사랑은 빗물'이라고 한다. 그러면 나와 너는 사랑에 대한 생각과 행동이 다르다. 이처럼 어떤 은유를 하느냐에 따라 생각과 행동이 결정된다.
15. 단어의 뿌리는 찾아가는 여행: 어원사전
어원을 공부한다는 것은, 단어가 태어난 배경을 파고드는 것이다. 어떤 이유로, 어떤 배경에서 탄생했는지를 알면 그 단어가 좀 더 특별해진다.
단어가 품고 있는 본질적 의미를 알면 대화의 깊이, 즉 질적 수준이 달라진다. 어원을 아는 사람은 같은 단어도 더 적절하게, 더 정확하게 사용한다. 그 단어가 오랜 시간 간직해 온 속뜻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단어는 홀로 존재하는 글자 모음이 아니라 한 시대의 사회적, 역사적 배경과 문제의식을 품은 문화적 소산이 된다.
이처럼 돌고 도는 선순환적 흐름, 영원히 끝나지 않는 비선형적 흐름으로 자연은 유지된다. 생명체도 이렇게 끝없이 흐르며 유지된다. 결국 삶도 흐름이다. 구불구불 흐르는 데 삶의 본질이 담겨 있다.
파자한 한자 속에 인생의 의미가
한자의 자획을 나누어서 그 의미를 추적하는 과정을 '파자'라고 한다. 예를 들어 인생의 생(生) 자를 파자하면 소(牛)가 외나무다리(一) 위를 건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위험을 무릅쓰고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것이 인생이고 일생이다.
똑같은 것을 보아도 '견(見)'은 눈앞에 보이는 것만 보고 '시(視)'는 여러 각도로 두루두루 보며, '관(觀)'은 전체를 꿰뚫어 보면서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본다. 한양대학교 정민 교수에 따르면 '견(見)'은 수동적으로 보는 것이고, '시(視)'는 능동적으로 보는 것이며, '간(看)'은 스쳐 지나가면서 보는 것이고, '관(觀)'은 개념적으로 가장 깊이 보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습관과 타성에 젖어 상식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자신의 육안으로 본 것이 전부라고 착각하고 오해한다. 자신이 보지 못한 것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는 것을 인정해 주고, 그것도 세상을 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미래나 먼 곳을 바라보는 망원경, 현재나 가까운 곳만 세밀히 보는 현미경, 안에만 들여다보는 내시경이 안경 역할을 해준다. 이런 것들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면, 역지사지로 관점을 바꾸어보고, 시제도 달리해서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점에서 봐야 한다. 입장과 각도를 달리해보는 시도도 필요하다.
'리더(leader)'는 리스너(listener)'이다. 리더일수록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는 경청의 달인이 되어야지 입담의 달인이 되면 곤란하다.
리더는 보는 것도 달라야 한다. 다르게 보는 것도 리더의 능력이지만 더 중요한 능력은 아예 다른 것을 보는 능력이다. 스티브 잡스가 주장하는 "Think different." 역시 '다르게 생각하기'보다는 '다른 것을 생각하기'에 가깝다.
최고의 역사, 문화, 교양 단련법
삶은 지나간 문제를 풀고 다가올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얼룩과 무늬를 씨줄과 날줄로 직조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사람이 바꿀 수 있는 것은 과거의 문제도, 미래의 프로젝트도 아니다. 오로지 현재뿐이다.
성공하는 사람은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열정적으로 자기 일에 몰입한다. 그 과정에서 도움 받은 모든 사람을 은인으로 생각한다. 또 난관을 돌파하고 역경을 뒤집어 경력으로 만든다. 성공의 어원에도 이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success'는 '뚫고 나오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수케데레(succedere)'에서 파생되었다. 중간 부분인 '케데(cede)'는 '씨앗(seed)'의 어원이다. 씨앗이 비옥한 땅을 뚫고 햇빛 속으로 나오는 것, 그게 바로 성공이다. 난관을 뚫고 나오면 성공의 길이 보이는 이유다.
또 성공하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언제나 자세를 낮추고 상대방을 높여주는 겸손이다. 겸손을 의미하는 'humility'는 '흙'을 의미하는 라틴어 '후무스(humus)'에서 유래되었는데 그냥 흙이 아니고 아주 비옥한 흙이라는 의미다. 흙은 항상 가장 낮은 곳에 있다. 작은 도토리 하나가 비옥한 땅에 떨어지면 큰 갈참나무가 되듯이, 흙은 다른 생물의 성장을 돕는다. 이런 점에서 "겸손은 성장을 낳는다." 리더는 겸손한 자세로 부지런히 조직이 성장할 터전을 일궈서 팀원을 성장시키는 사람이다.
리더(leader)는 '길(path)'를 의미하는 'lea'와 '발견하는 사람(finder)'을 의미하는 'der'의 합성어다. 리더는 구체적인 방법을 가르치는 사람이라기보다 방향을 가리키고 길을 발견하는 사람이다. 방향을 따라가다 보면 없던 길도 새롭게 나타난다. 길을 떠나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만나지 못한 길도 만나게 된다. 그러니 어떤 길이라도 우선 떠나야 만날 수 있다.
리더는 팀원에게 이전과 다른 생각으로, 세상을 다르게 보도록 영감을 주는 사람이다.
리더의 숨에는 새로운 에너지가 들어 있고, 세상을 다르게 보는 혜안과 안목도 있다. 그러니 리더는 언제나 눈앞의 이익보다 먼 미래를 그림을 구상하고 시각화(visualization)한다. 그게 바로 비전(vision)이다.
리더는 자신도 존중하지만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지도자다. 존중하다의 영어 'respect'를 분석해 보면 '보다(pect)'와 '다시(re)'가 합쳐져 있다. 그러니 존중한다는 '다시 본다'는 의미다. 리더는 언제나 팀원의 강점과 재능을 발견하기 위해 보고 또 봐야 한다. 그냥 보는 게 아니라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주도면밀하게 관찰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한참 동안 대화를 마치고 나서 후일담으로 이런 말을 남긴다. "나 그 사람 다시 봤다."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고, 생각보다 진국이라는 평가가 따르면 그 사람을 존경한다는 의미다.
단어를 쪼개야 숨은 의미가 보인다
나이를 먹을수록 너그러워진다고 한다. '너그러워진다'도 내가 만났던 수많은 '네가 그리워진다'는 의미다. 그리움은 기다림 속에서 잉태되고 자란다. 저마다의 삶에서 마주쳤던 소중한 추억들이 시간과 함께 한 장의 추억으로 기록되며 추억은 다시 그리움으로 환생한다.
실수가 있어도 눈 한번 질끈 감아주고 받아주는 배려, 잘못이 있어도 잘잘못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먼저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 갈등과 반목도 품어주는 포용심,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세상을 관조하는 여유로움, 슬픔과 아픔의 이면에서 즐거움과 기쁨을 바라보는 긍정성, 이 모두가 너그러움과 함께 자라는 삶의 미덕이다. 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내가 만났던 수많은 사람과 사물과 현상, 그 모든 것이 간직한 사연을 너그럽게 바라보며 그 속에 담긴 너를 그리워하며 사색하는 시간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16. 핵심가치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가치사전
당신을 연기하라
다른 배역은 이미 다 찼다
오스카 와일드
핵심가치는 삶의 방식을 결정한다. 예를 들어서 나는 열정, 혁신, 신뢰, 도전, 행복이라는 5개의 키워드를 내 삶의 핵심가치로 설정했다.
이 기준에 따라 의사결정하고 행동하는 삶이야말로 내가 남의 인생이 아니라 내 인생을 사는 비결이다. 나만의 핵심가치를 중심으로 살기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하고 묵묵히 내 길을 걸어가는 삶이 바로 '마이웨이(my way)', '나다운 삶'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마지막 단어'가 있는가
유독 여러분의 심장을 뛰게 하는 단어가 있는가? 있다면 그게 바로 여러분의 핵심가치다.
미국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는 '마지막 어휘'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마지막 어휘'는 우리가 자신의 행동과 신념, 그리고 삶을 정당화시키는 데 필요한 단어다. 개인 혹은 집단이 딜레마에 빠졌을 때, 결단을 내릴 때, 의사결정할 때 최후까지 의지하는 단 하나의 '신념어'다.
예를 들면 간디의 마지막 어휘는 '비폭력', 스티브 잡스는 '혁신', 리처드 브랜슨은 '상상'일 것이다. 로티 교수에 따르면, 부처님은 자비, 공자은 인, 플라톤은 이데아, 사르트르는 실존, 스피노자는 코나투스, 니체는 아모르파티, 라캉은 욕망,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마지막 어휘'라고 한다.
열정은 나를 지치지 않게 만드는 뜨거운 심장이고 혁신은 내 생각을 어제와 다르게 바꿔나가는 각성제다. 도전은 내 생각과 느낌을 믿고 나의 능력을 확장, 심화하기를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다. 열정은 성취를, 혁신은 변화를, 도전은 성장을 낳는다.
더 나아가 이 3가지를 단 하나로 줄이라면 나는 주저 없이 '도전'을 꼽는다. 도전은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 삶의 원동력이며, 내 삶을 '축제'로 만들어준다. 도전을 멈추는 순간 내 삶도 멈출 것이라고 믿는다. 현실안주의 안락함은 안락사로 가는 지름길이다.
박용후의 퍼스펙티브 - 그에게 중요한 단어가 곧 그의 인생 아닐까요?
보는 것에 따라 생각은 만들어지기도,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이는 대로 봐서는 생각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대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른 기억이 만들어지고, 그 기억에 따라 생각이 탄생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머릿속에 쌓여 통념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생각이 쌓이는 첫 관문인 '보기'는, 생각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낯섦이 열어준 그 순간, 통념으로 기억에 자리 잡았던 한 단어 한 단어에 대해 새로운 관점이 열리고 생각은 성장합니다.
내가 가진 신념이라는 단단한 체계는, 새로 바꿔 끼울 수 있는 단어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유연해집니다.
단단한 것은 부러지지만 유연한 것은 강한 것을 견뎌냅니다. 사유의 체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경험에만 갇혀 있는 꼰대가 아니라, 생각의 높이와 깨달음의 두툼함을 통해 생각의 세계를 유연하게 만든 사람이 강한 저력을 갖고 있다고 믿습니다.
17. 언어는 세상을 편파적으로 바라보는 콩깍지다
뭔가를 설명하거나 표현할 때 어떤 단어를 사용하는가? 생각의 한계가 여기서 결정된다. 어떤 경우는 "단어가 아이디어를 창조한다(Words create ideas)." 언어가 틀에 박히면 생각도 틀에 박힌다. 생각지도 못한 생각은 생각지도 못한 언어를 구사할 때 나온다. 언어는 그래서 단순히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다.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사람도 바뀌고 삶도 바뀐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나이므로, 나를 바꾸고 내 삶을 바꾸려면 언어를 바꿔야 한다.
사이 전문가, 호모 디페랑스
전문성의 깊이도 중요하지만 다양한 전문가가 서로 만나서 소통하고 공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한 사람의 전문성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놓고 여러 사람이 각자의 전문성을 융합해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분야의 전문성은 다른 분야의 전문성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 맺느냐에 따라 의미와 가치가 확연하게 달라진다. 사이 전문가는 여러 분야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끊임없이 탈영토화 하고 재영토화하는 유목적 사고를 실천한다.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 낯선 마주침을 즐긴다.
그랜드 피아노를 집 안에 들여놓고 싶다면
헝가리 출신의 영국 철학자 마이클 폴라니는 <개인적 지식>에서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안다고 주장한다. 말할 수 없지만 체화된 지식을 암묵적 지식(tacit knowledge)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엄마의 김치 담그는 노하우를 매뉴얼로 만들면 명시적 지식(explicit knowledge)이다. 그러나 매뉴얼에 담을 수 없는 엄마만의 독특한 맛, 즉 손맛은 암묵적 지식이다. 분명히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지식이 바로 그것이다.
암묵적 지식은 전문가의 고유한 지식이자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력을 보여주는 독특한 언어다. 폴라니가 그런 지식의 보이지 않는 부분을 적확하게 포착해 하나의 유한개념을 창조한 것이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폴라니와는 다른 관점에서 전문가를 바라보았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보면 전문가가 갖추어야 할 최고의 덕목으로 프로네시스(phronesis), 즉 실천적 지혜(practical wisdom)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실천적 지혜는 단순한 사실관계나 법률, 규칙, 원칙, 직무기술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서로 갈등하는 몇 가지 선의의 목표를 조율하거나 어느 한쪽을 골라야 하는 실천적이고 도전적인 기술이 필요하다.
실천적 지혜를 가진 사람은 사회적 맥락을 읽어내는 통찰력을 지닌다. 흑백논리로 재단하지 않고 어느 쪽에서도 속하지 않는 회색 영역을 바라보는 식견이 있다. 실천적 지혜를 연마하기 위해 노력하는 전문가와 그렇지 않은 전문가의 차이는 천양지차다. 전자는 자신의 전문성을 가지고 자신의 안위가 아닌 공동체의 선을 위해 기꺼이 사용한다. 그러한 헌신적인 노력이야말로 모든 전문가가 갖추어야 할 최고의 미덕이다.
또 실천적 지혜를 지닌 사람은 감정으로 인한 왜곡 없이 상황을 판단하는 직관력이 발달했다. 상황과 관계없이 무조건 규칙을 따르기보다 예외를 허용해야 할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를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우리가 직면하는 대부분의 문제는 복잡하고 모호하며 시시각각 변화한다. 거기에서 실천적 지혜를 가진 사람은 재즈 뮤지션처럼 즉흥연주를 한다. 기존의 악보를 따르면서도, 상황적 맥락이 요구하는 즉흥성을 발휘하고, 자신의 독창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현장의 요구를 즉석에서 만들어낸다.
실천적 지혜는 고뇌로 숙성시킨 지혜이므로 책상에 앉아서 책으로 배울 수는 없다. 몸으로 넘어지고 자빠지며 습득할 수밖에 없다.
새로운 앎은 언제나 깊은 상처 위에 생긴다. 건물의 구조 변혁 없이 그랜드 피아노가 집으로 들어갈 수 없듯이, 기존 사유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전복시켜야 우리는 색다른 개념을 수용하거나 창조할 수 있다.
18. 틀에 박힌 나를 틀 밖으로 끄집어내는 법
아이러니 찾기와 유머를 활용하라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에 따르면, '아이러니스트(ironist)'는 언어적 필터로 오염된 현실에 갇혀 사는 자신을 두려워한다. 아이러니스트는 낯선 만남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면서 자신을 지배하는 기존의 언어적 코드나 문법체계에 의문을 던지고 끊임없이 재해석하고, 자신의 문제의식으로부터 새로운 언어를 다시 만들어낸다. 언어적 창조야말로 자아를 재창조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물론 아이러니스트가 세계를 자신의 언어로 묘사하는 일은 옳을 수도 있고 그를 수도 있다. 아이러니스트는 진리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누구나 범할 수 있는 오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로티는 이런 아이러니스트의 대표적인 사례로 프루스트, 니체, 하이데거를 꼽았다.
하나의 단어를 붙잡으면 하나의 우주가 열린다
사고는 내가 당한 일이지만, 사건은 내가 의도적으로 일으킨 일이다. 사건 속에는 말 못 할 사연이 있다. 그 사연을 읽어내면 사건의 전후좌우 배경과 전모를 밝힐 수 있다. 마찬가지로 단어 역시 의미와 의도를 읽어내야 정확한 뜻을 알 수 있다.
사랑이나 행복 같은 보편적인 개념도 내가 실제로 무엇을 느끼며 생각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인식되고 구현된다. 내가 사하라 사막에서 느낀 '사랑'은,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폭염 속을 달리는 사람이 옆 사람에게 기꺼이 물 한 병 건네주는 작은 행동이었다. 그리고 내가 경험한 진정한 '행복'은, 2007년 저세상 문턱까지 갔다 온 교통사고 후에 느껴보았다. 얼마간의 회복기간을 거치고 나서 처음으로 마셔본 와인 한 모금이 온몸으로 스며들 때 나는 말도 못 할 전율감을 느꼈다.
이처럼 사랑이나 행복은 국어사전에 나오는 정의로는 정확히 설명하기가 어렵다. 저마다의 상황에서 몸으로 느끼는 감각적 체험이자 주관적 신념이 반영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내 경험으로, 내 몸으로 느낀 의미는 다르다.
가로지르기와 세로 지르기의 공부
내가 공부하면서 만난 가장 큰 언어적 선물은 '관계'라는 개념이다. 인간은 사람과 사람 사이다. 인간은 '인간관계'의 약자라고 한다. 결국 사람이 사람다움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려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갈 수밖에 없다. 관계가 존재를 결정한다. 즉 인간의 존재가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에 따라서 결정된다. 내가 어떤 인간관계를 맺어왔고, 맺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에 따라서 나라는 사람의 인성도 결정된다.
인성은 독자성이나 실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과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에 따라서 관계론적으로 결정된다. 결국 인간은 관계를 떠나서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다. 한편 관계는 '경계' 속에서 끊임없이 재탄생한다. 신영복 교수님도 <강의>에서 "애정 없는 타자와 관계없는 대상에 대하여 알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알아야 안아줄 수 있다. 안다는 것은 상대방의 아픔을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낀다는 말이다. 가슴으로 느낄 때 비로소 당대를 깊은 관심과 사랑으로 안아줄 수 있다.
애정과 관심은 이해의 필수요건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과학의 언어에 사고를 점령당한 것 아닐까? 감정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객관적인 입장에 서야만 진정한 앎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면서 말이다. 과학의 언어로만 사고하면, 언어가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이해를 돕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잘못된 방향으로 오해를 이끌 수 있다.
사르트르는 '타자는 지옥'이라고 했지만, 레비나스는 '타자는 미래'라고 했다. 미래라는 타자는 나에게 어떤 선물을 줄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내가 어떤 타자를 만나든 나는 타자를 만나는 순간부터 새로운 정체성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내가 만약 어떤 새로운 사람도 만나지 않고, 새로운 곳에도 가지 않고, 늘 같은 분야의 책만 읽는다면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농담과 진담 사이, 상담이 필요하다
모든 발언은 언제나 맥락을 배경으로 태어난다. 어떤 맥락에서 그런 발언을 했는지 알면 발언자의 진의가 파악된다. 똑같은 콘텐츠(content)도 맥락(context)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면 소통에 치명적인 위기가 온다. 발언자의 진의와 관계없이 구설에 오르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은 서로 다르지 않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질문이 많아진다. 사랑하는 사람이 밥은 먹었는지, 잠은 잘 잤는지, 비 오는 날 우산은 갖고 출근했는지 등 하루 종일 질문한다. 그만큼 온통 관심이 그에게 쏠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이 식으면 질문이 없어진다.
사랑이 무관심으로 바뀌면서 사용하는 언어도 바뀐 것이다. 무관심은 넘을 수 없는 벽이고, 이해해 줄 것이라는 기대도 사정없이 무너진다.
맥락의 맥을 못 잡아 서로 간에 맥을 못 추게 된 안타까운 사건은, 강사가 청중을 이해하지 못해서 생긴 일일 수도 있다. 앞서 말했듯이 똑같은 농담도 어떤 청중에게는 통하지만 다른 청중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농담이 농담으로 전달되려면 배경과 맥락에 대한 정보가 충분해야 하고, 정보의 수준 역시 청중의 수준에 맞아야 한다.
폭풍을 일으키는 것은 가장 조용한 언어이다
비둘기처럼 고요한 사상이 우리의 세계를 뒤흔든다
니체
지금껏 지극히 자연스럽게 느껴온 경험이나 사고가 바로 '쓸모없는 도구'다.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사고방식에 들러붙은 문제나 한계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사람의 생각에 접속해서 그가 구사하는 언어를 배우는 것뿐이다. 똑같은 현상도 다른 언어로 표현하면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어떤 단어는 막혔던 하수구를 뚫듯 복잡하게 꼬였던 생각을 명쾌하게 설명한다. 이처럼 단호하고 날카로운 단어를 가진 사람은 사고도 명쾌하다.
저자소개 - 유영만, 지식생태학자, 한양대학교 교수
앎으로 삶을 재단하기보다 삶으로 앎을 증명하며 어제와 다르게 살아보려고 오늘도 안간힘을 쓰는 지식생태학자다. 책상머리에서 머리로 조립한 지식으로 지시하기보다 격전의 현장에서 몸으로 깨달은 체험적 지혜로 지휘하는 삶을 추구한다. 언어가 부실하면 사고도 미천해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낯선 경험을 색다르게 표현하기 위해 언어의 연금술사로 변신하고 있다.
삶으로 앎을 만드는 과정에서 철학자의 주장보다 문제의식이 주는 긴장감에 전율한다. 그리고 그 경험을 낯선 언어를 사용해 어제와 다르게 표현하는 과정을 즐긴다. 익숙한 일상을 시인의 눈으로 바라보며 똑같은 현상에서도 비상한 언어로 새로운 발상과 개념을 낚아채는 공부에 관심이 많다. 오늘도 뜨거운 체험의 모루 위에서 틀에 박힌 언어를 갈고닦고 벼리면서 잠자는 사고를 흔들어 깨우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방백]
약 4년의 런던생활을 끝으로 한국으로 돌아와 경력기술서를 작성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나의 숱한 경험들로 채워진 잠재성을 A4 1장에 잘 담아야 한다니. 어느 광고 카피처럼 '너무 좋은 건데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네!'. 말재주가 부족해서 나라는 사람을 세일즈를 못 하네!"
답답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총 5년의 해외생활로 인해, 영어도 한국어도 다 잃은 듯한 0개 국어자.
그런 나의 상황에서 시의적절하게 만난 책.
일목요연한 설명을 못한다는 건, 나의 언어, 어휘력의 한계 때문이리라.
한 문장, 한 관점, 한 개념마다 곱씹으며 유의미하게 읽었다. 내게 정말 의미심장한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