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11.08 01:59
대한민국홍보전문가 서경덕
(성신여자대학교 객원교수)
위의 광고를 기억하는가?
바로 네티즌 11만명이 2억 1천여만원을 모금하여 미국 최고의 신문 중 하나인
'워싱턴포스트'에 전면으로 실린 '독도'광고이다.
도대체 이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진행한 사람은 누구일까?
모금을 진행해준 Daum? 광고회사? 대기업?
아니다.
그는 바로 대한민국 최초의 한국홍보전문가 서경덕이다.
얼마전 인기프로그램 '황금어장 무릎팍도사'에 출연하여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지만
아직 서경덕 교수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고
이에 따라 그가 해왔고 하고있는 많은 위대한 일들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나또한 그 중 한명이었지만
최근 웅진코웨이에서 내가 활동하고 있는 '코웨이 캠퍼스리포터'들에게
서경덕 교수님의 강연회를 열어주어서
그 분의 저서를 읽고 강연을 듣고 술자리도 함께 가지면서
서경덕이라는 사람에 대해 참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알게된 그는 젊은 대학생이 반드시 본받아야할 사람이다.
이 글을 통해서 그 분이 어떠한 분인지, 그 분을 통해 어떤것을 배워야할지 이야기해보겠다.
훗날의 원동력이된 어린시절의 서경덕
서경덕 교수가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있는 곳은 서울 '신림동'이다.
저서에서 '내가 정말 알아야 할 것은 신림동에서 배웠다.'라고 표현될만큼
그곳에서의 어린시절은 지금의 그가 되기까지 많은 영향을 미쳤다.
형제자매관계부터 이야기하자면 위로 무려 4명의 누나가 있다.
서경덕 교수는 바로 귀여운 '막내 남동생'인 것이다.
위에 4명의 누나가 있는만큼 정말 귀여움만 받고 여성스럽게 자라났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누나들이 서경덕 교수에게 사내아이답게 나가서 뛰어놀라고 더 부추겼다고한다.
그리고 막내 남동생에 대한 사랑을 든든한 지원으로 베풀어주었다.
어렸을 때 나가 놀면서 들어가는 돈을 많이 지원해주었고
지금까지도 매형들과 함께 여러 방면으로 많은 도움을 주고있는 최고의 '후원자'이다.
이렇게 든든한 지원속에서 어린 서경덕은 밖에 나가서 노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이 과정에서 지금까지도 친하게 지내게된 '동네 형'들을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동네 형들 덕분에 또래 아이들보다 더 빨리 성장기 문화를 접할 수 있었고
롤모델로 삼기에 충분히 훌륭한 사람들이었기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사회 각 분야에서 성공하여
누나들처럼 여러방면으로 도움을 주는 최고의 후원자 중 하나가 되었고 말이다.
아직 서경덕 교수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는 단계여서 여러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서경덕 교수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가장 큰 원동력은
'주변사람들의 든든한 지원'과 '어떠한 사람들에게도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친화력'이다.
이러한 그의 원동력은 그의 말처럼 어린시절에 갖추게되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가족들은 늦둥이 아들과 동생을 감싸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부딪히게 하면서 뒤에서 지원해주었고
이러한 배경속에서 어린 서경덕은 어렸을때부터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친해지는 방법을 익혀나가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무엇에 도전하는 것에 두려움이 없게되었고 말이다.
지금 시대의 가족과 아이들의 모습과는 아마 정반대가 아닐까 싶다.
직접 진짜 세상에 부딪히게 하기보다는 감싸돌며 막무가내로 공부시키기.
지금의 아이들은 과거의 아이들보다 수학문제를 더 잘풀고 영어를 잘하게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이득이 되는지 안되는지의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친구를 경쟁자로 보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자라가고 있다.
뒤에 내용을 살펴보며 좀 더 자세히 생각해보도록 하자.
일반적인 대학생이 되기를 거부하다.
서경덕은 인생의 첫 쓴맛을 대학입시에서 느끼게 된다.
그는 첫번째 입시를 실패한 것이다.
이전까지는 계속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던 그이기에 가족들에게 더욱 미안해했다.
그렇게 열심히 1년을 더 열심히 공부했지만 또 결과는 썩 좋지 못했다.
서경덕은 힘들고 지쳐도 한번 더 해보겠다고 다짐했지만
부모님은 재수를 해서 합격한 학교에 벌써 등록을 해놓으시고 입학을 권유하셨다.
삼수를 해서 입학을 하면 최대 1년뒤에 군대에 가야만했던 시절이었기에
일단 들어가서 대학이라는 곳을 경험해보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여러가지로 자유롭게 지내지 못하게되었는데
1년을 더 고생한 재수생 서경덕에겐 그 누구보다도 '대학에 대한 로망'이 컸다.
하지만 실제로 본 대학교의 모습은 커다란 배신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단순히 얼마나 재밌게 놀 수 있냐가 문제가 아니었다.
진리탐구와 문화창조의 선구적 역할을 하는 곳인줄 알았던 대학에서 대학생들은 '취업'만을 바라보며
학점따기에 몰두하고 도서관에만 파묻혀 생활하고 있었다.
서경덕의 생각은 그 '일반적인 대학생'들과는 달랐다.
틀에 박힌 세상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그에겐 책 속에서 얻는 지식보다 세상과 소통함으로써 얻는 지식과 경험이 더 소중했으며
이러한 것들을 바탕으로 역사에 작은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했다.
이러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혼자 힘으로는 부족할것이라는 판단에
그는 여러 대학에 다니는 친구들을 모아서 '생존경쟁'이라는 동아리를 창설했다.
이름만 들으면 그 누구보다 강렬한 투쟁동아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강렬하게 '문화 창조'를 하는 동아리이다.
아직 어린 학생인 만큼 실패를 두려워하지말고 많은 것에 도전하고 세계로 나아가자는 의미라고 한다.
이 생존경쟁이라는 연합동아리는 아직까지도 이어오고 있는 동아리로 성장하게 되었다.
대학생 서경덕의 생각은 나와 완전히 동일하다.
아마 그 이유 중 하나가 나또한 재수를 했기 때문이 아닌가도 싶다.
나는 일방적인 암기식 교육이 정말 싫었다.
그래서 '대학에만 가면' 이러한 교육은 벗어던지고 진정한 '창조'를 할 수 있는 교육을 받을 것이라고 믿었다.
서경덕 교수처럼 1년 더 가장 싫어하는 공부를 해야했고 그만큼 대학에 대한 '로망'이 매우 컸다.
하지만 실제로 입학을 해서 경험해본 대학이란 곳은 정말 실망할 수 밖에 없는 곳이였다.
창조가 아닌 '돈 많이 버는 직장으로 취직'을 꿈으로 삼고 스펙쌓기, 학점쌓기에만 집중하며 살아가는 학생들.
이러한 학생들을 더욱 부추기며 학교 순위 올리기에만 급급한 대학교.
나도 이러한 곳에서 그냥 살아가다보면 결코 '최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두가 잘못하고 있는 생각이 바로 '내가 남들보다 뒤쳐지면 어떡하지?'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에 모든 행동을 '남들보다 뒤쳐지지 않게하자.'로 판단하게되며
이에 따라 모든 사람들이 행하고 있는 것을 따라하게 된다.
높은 학점, 높은 영어점수, 많은 자격증. 이러한 것들이 모두 그러한 것들이다.
반면에 서경덕처럼 '내가 남들과 다르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지?'라고 생각한다면 모든 것이 바뀔 수 있다.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하자.'를 바탕으로 행동하게 되며
그러한 행동들은 자연스레 자신을 남들보다 앞서나가는 사람. 즉, 창조하는 사람으로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우리들이 서경덕 교수에게 얻어야할 가장 큰 교훈 중 하나이다.
서울 600년 기념 타임캡슐을 묻다.
생존경쟁 결성 이후 첫번째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을 때 매우 좋은 행사가 열렸다.
그때가 서울시가 수도가 된지 600년이 된 해였고
이에 따라 서울시는 600년 기념 타임캡슐을 묻어 400년뒤에 천년기념으로 열어본다는 내용이었다.
서울시는 타임캡슐안에 넣을 내용물을 공모하였고 생존경쟁은 바로 이것을 택했다.
서경덕을 포함한 생존경쟁 팀원들은 간단한 기획서를 제작해서 서울시청에 찾아갔다.
그곳에서는 우선 '생존경쟁'이라는 단체명에 데모집단이 아니냐고 의아해했고
1학년 학생들이 몇명와서 이 거대한 프로젝트에 참여하겠다고하니
"너희들이 뭘 할 수 있겠냐'라는 마음으로 가볍게 보았다고한다.
하지만 생존경쟁의 마음가짐은 이름만큼이라 강렬했다.
그때 당시 신문등에서 거론되는 타임캡슐속 내용물들은
올림픽경기장 모형, 신용카드, 버스토큰, 그날의 신문 등 '그 시대를 반영하는 물건'들이였는데
생존경쟁은 이를 완전히 뒤집어서 생각했다.
바로 타임캡슐이 열리는 '400년 뒤의 미래의 서울모습을 예측'해보는 것이었다.
단순히 생존경쟁 팀원들의 생각만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였다.
400년 뒤의 패션은 어떻게 변할것같은가?
400년 뒤의 건축물을 어떻게 변할것같은가?
등등의 많은 항목들을 마련해놓고
무려 전국 60여개 대학의 23,940명에게 설문을 하는 것이 계획이였다.
23,940이라는 숫자는 타임캡슐이 열리는 2394년을 뜻하고
0을 하나 더붙인 것은 그만큼 생존경쟁의 열정이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말로는 23940명에게 설문조사를 한다는게 간단한것 같지만
대학생 몇명이 이를 행한다는 것은 결코쉬운일이 아니였다.
더욱이 어느 단체에서 1원이라도 지원금이 나오는 것도 아니였고 말이다.
각자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충당하고 심지어 그룹아르바이트도 했다고한다.
회의할 장소도 마땅치 않아서 가격대비 효율을 높이기위해
동네 여관 한 방을 빌려서 우루루들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밤낮으로 뛰어 23490장의 설문지가 완성되었고
400년 뒤의 우리나라 수도는 평양이 된다는 것과 같이 여러가지 재밌는 결과들이 만들어졌다.
드디어 완성한 이 결과물을 서울시에 가져가자 엄청나게 깜짝 놀랐다고한다.
그리고 지나가는 말로 "이거 기자들한테 좋은 뉴스감인데?"라는 말을 듣게되었고
이에 서경덕은 좋은 느낌을 받아 시청 기자실 안 보도자료 박스에 한 부씩 넣고 나왔다.
예상외로 반응은 엄청 폭발적이었다.
수많은 언론사에서 기사를 내주고 취재를 하고싶다는 연락이 왔으며
기업들은 돈을 모두 지원할테니 같이 프로젝트를 진행해보자는 제안도 많이 왔다고한다.
당연히 이 설문 결과물은 실제로 타임캡슐에 넣어져 400년 뒤에 공개되게 되었고말이다.
이렇게 생존경쟁의 첫번째 도전은 대성공을 하게된다.
서경덕 교수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저서 제목이 왜 '세계를 향한 무한도전'인지 이해를 할 수 있다.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이 매주 토요일 인기를 끌고 있는데
실제로 몸뚱이 하나로 무한도전을 하고 있는 사람이 서경덕 교수이기 때문이다.
뒤의 내용에서 나오겠지만 그는 어떠한 것을 도전할 때 전혀 망설임이 없으며 도전의 규모는 엄청나다.
위의 첫번째 프로젝트에서도 보았듯이 설문지를 돌릴때 무려 23940장을 돌릴 수 있는 도전정신이 있다.
이러한 그의 '무한도전'정신이 훗날 세계 최고의 신문들에 전면광고를 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무한도전도 실패할 때가 있다.
생존경쟁의 첫번째 프로젝트가 대성공하자 탄탄대로가 열렸다.
기업체에서 연일 러브콜이 올 뿐만아니라
2기를 모집했더니 경쟁률이 50:1이나 되기도 하였다.
그때 지원서를 서경덕의 집에서 받았는데 수백통의 지원서가 날아들어
연예인이 이사왔냐는 소리까지 들었다고한다.
이렇게 사기가 충전된 생존경쟁은 2번째 프로젝트를 구상하게된다.
그 해는 광복 50주년이 되는 해였기에 이에 맞추어 공익적인 프로젝트를 택했다.
내용은 1만 명의 대학생이 참여해 손바닥 도장을 찍어 세계 최대의 국기를 만드는 것이였다.
기네스북에 오른 최대 국기는 가로 120m, 세로 90m였고
이들이 도전한 크기는 가로 150m, 120m였다.
광복 50주년 기념 사업회에서도 매우 반가워하며 도움을 약속받았고
방직회사에서도 이 거대한 국기를 만들 천을 협찬받는등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특히 천은 거대한 국기인 만큼 무게만 1t인 거대한 규모였다.
이렇게 모든 도움과 협찬을 약속받고 행복에 겨워하며 장소찾기만 남겨둔 상태였다.
여의도 광장으로 잠정결정을 내리고
그곳에서 시원한 맥주 한캔씩 마시면서 회의를 하고 있는데
도중에 크기가 안맞을 것 같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실제로 재보니 정말 공간이 모자란 것이였다.
당시에는 지금보다 훨씬 규모가 적은 '광장'형태여서 그랬다고한다.
생존경쟁은 순식간에 위기에 빠졌다.
행사날은 다가오는데 장소를 구할수가 없었다.
크기 욕심을 너무 냈기 때문에 저만한 크기를 펼치고 행사를 진행할 수 있는 곳은
논밭밖에 없었고 그곳마저 벼들때문에 불가능했다.
결국 이 거대한 두번째 프로젝트는 실패로 끝나게 된다.
이는 서경덕과 생존경쟁에게 모두 큰 교훈이 되었다고 한다.
목표를 크게 잡는 것은 좋지만 좀 더 신중하게 일을 진행해야한다는 교훈말이다.
다행스럽게도 이들의 도전정신을 인정해 많은 곳에서의 관심과 지원은 끊이지 않았다.
서경덕과 생존경쟁은 이후에도 실패를 발판삼아 다양한 많은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많은 경험을 하고 여러가지를 배울 수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성공을 막는 무서운 존재는 '자만심'이다.
생존경쟁이 2번째 프로젝트에서 실패를 맛본 것은 매우 적절한 시기에 일어난 행운이라고 볼 수 있다.
훗날 더 멋진 프로젝트로 발전시킬 수 있는 마음가짐을 비교적 빨리 갖추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서경덕과 생존경쟁이 실패로 좌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좌절하지 않고 더 튼튼하게 더 멀리 뛰어나갈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는 것은 매우 본받아야할 점이다.
유럽배낭여행, 그의 인생을 '대한민국'에 집중시키다.
열정이 가득찬 대학생이었던 서경덕이
최고의 한국홍보전문가가 되게끔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이 바로 '유럽배낭여행'이다.
그 이유는 유럽이라는 머나먼 타국의 땅에서 우리 '대한민국'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부족한지
그는 피부로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능력을 통해서 이를 바꾸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을 것이다.
사실 유럽인들에게 한국의 이미지가 아예 없거나 상당히 부족하다는 사실을 접하기 전에
애초의 그의 '유럽행' 자체가 한국홍보를 위해 시작되었다.
그때는 한국월드컵 개최가 확정된 시점이었고 대학생 서경덕은
온몸에 태극기를 휘어감고 다양한 기념품들을 챙겨서 떠난 것이다.
그는 여행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한국의 월드컵 개최를 온몸으로 알렸고
한국의 월드컵 열기가 얼마나 뜨거운지 유럽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상치 못한 거대한 이벤트를 실행시키기에 이른다.
광복절 세계 최대 국기 만들기 프로젝트에 실패했던 기억을 떠올려 마침 8월 15일이 다가오자
유럽 각지에서 만나는 한국사람들을 붙잡고
'8월 15일에 에펠탑에서 만나자'라고 홍보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말 말 그대로 '입'만 가지고 '바이럴마케팅'을 펼친 것이다.
유럽이라는 곳이 대륙이어서 국가간 이동이 쉽게 가능하긴 하지만
시간과 비용이 만만치 않고 특히 여행객이라면 스케쥴을 조절해서 맞춰오기가 참 어렵다.
때문에 서경덕 일행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보다 엄청났다.
서너명씩 에펠탑 아래에 모이더니 무려 250여명이 모이게 된 것이다.
그 중에는 이 행사에 꼭 오고 싶어서 귀국 날짜를 일부러 늦춘 사람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모인 한인 수백명은
애국가를 부르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서경덕 교수의 강연에서 들은 바로는 공식적으로 스케줄을 짜고 온것이 아니기에
정해진 행사같은게 없었는데 타국땅에서 한국인이 그렇게 많이 모이니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애국가가 나오고 만세삼창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사람 하나가 아리랑 노래의 첫 구절을 부르자
모두 함께 아리랑을 부르며 2중, 3중 원을 그리며 춤을 추었다고 한다.
그곳에 있던 관광객들은 모두 신기해하며 사진을 찍고 심지어 함께 기념촬영을 하기도 했으며
아리랑 노래를 부를때 다함께 원을 그리며 춤을 추기도 했다고 한다.
외국인들도 한국인의 애국심에 감동하고 함께 즐긴 것이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이 행사가 매년 계속 이어지고 있고
올해가 15주년을 맞이한 해였다고 한다.
서경덕은 이 배낭여행을 통해서 '하면된다.'라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글로벌마인드를 어떻게 기르고 글로벌을 어떻게 공략해야할지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이 때의 깨달음이 서경덕의 무대를 한국에서 세계로 넓혔고
그 세계의 무대에서 한국을 알리는 '한국홍보전문가'의 길로 인도한 것이다.
해외여행을, 특히 배낭여행을 다녀와본 사람이라면 서경덕 교수가 느꼈을만한 느낌을 공감할 것이다.
바로 한국의 인식과 이미지가 상당히 안좋다는 것이다.
나도 이번에 유럽배낭여행을 다녀왔는데
나를 처음본 유럽인 중에서 Korean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20명 중 1명 될까 말까였다.
대부분이 우리를 중국인, 일본인으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다들 비슷하게 생겼으니 어쩔수 없지뭐. 우리도 유럽인들보면 출신국가 못알아맞히잖아?'라고
쉽게 생각하고 넘길 수 있는데 이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이다.
우리나라의 이미지와 인식이 중국과 일본보다 한참 떨어진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유럽인이 동양인을 보고 Chinese, Japanese라고 말하는 것은 그만큼 그사람들 머리에
'아시아의 대표국가=중국, 일본'으로 잡혀있다는 것이라는 것이다.
얼마나 한탄스러운 일인가.
우리가 그들보다 모자란것이 없는데.
서경덕은 이를 가볍게 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자신의 몸하나로.
그가 그의 발걸음과 입만 가지고 프랑스 파리 에펠탑에 한국인을 수 백명 모아서 뜻깊은 시간을 보낸 경험은
자신의 '가능성 희박한 도전'의 성공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낸 경험이다.
이를 통해 지금의 서경덕으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한번 '아는 것을 행하는게 중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저러한 문제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매우 적지만
그것을 진심으로 알게되어도 실제 행동으로 옮길 줄 아는 사람들은 매우 적다.
우리는 그의 대담한 도전과 행동을 보고 반성해야할 점이 많다.
독도, 대담한 도전가 서경덕을 매료시키다.
한국홍보를 마음에 품고 군대도 다녀오고 활발히 활동하던 서경덕의 마음에 불을 지른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은 바로 일본 시네마현의 '다케시마의 날' 지정.
여느때의 독도는 자기네 땅 우기기와는 차원이 틀린 수준이었다.
그때 우리 한국의 분위기도 당연히 부글부글 끓었다.
하지만 모두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는 일에 '감정적'으로 대응하고만 있었다.
이러한 사건에 대한 뉴스의 댓글만 보아도 공감이 갈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국가에서 제대로 대응하고 있지 못하고 말이다.
이에 해외들은 오히려 이러한 한국의 모습에 신뢰를 낮추었을 것이다.
서경덕은 그 누구보다 화가 났을테지만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개선시킬지' 이성적으로 판단해보았다.
우리끼리 떠드는 것보다 '국제사회의 여론'을 우리편으로 만들어야한다'고 판단했다.
즉, '세계에 독도가 한국땅이 라는 사실을 알리고 일본정부의 부당함을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홍보전문가답게 참신한 기획으로 대응하고자 머리를 싸맸다.
그는 미국의 정말 많은 사람들이 즐겨보고 특히 유명인사들이 즐겨보는 '뉴욕타임즈'에 주목하고
바로 그 세계적인 신문에 '광고'를 내보기로 결심한다.
그것도 자기 자신이 벌어온 '자신의 돈'을 전액 부담하여.
이번에도 역시 마음을 품고 바로 뉴욕타임즈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담당자를 만나 저 위의 광고를 A섹션 2면에 넣고 싶다고 말했다.
그 담당직원은 도대체 독도가 뭐냐고물으면서 이런 광고는 일하면서 처음 본다고 의아해했다.
특히 국가 간의 사안이기 때문에 광고에 넣기 애매한 부분도 있었다.
다행히 잘 합의가 되어 광고 게재가 확정되었다.
이제 남은것은 시안을 만드는 것이였다.
이 시안을 만들면서 참 많은 에피소드가 생겼다.
뉴욕타임즈 측은 광고를 게재하려면 무조건 광고주의 이름이 들어가야한다고 못박았다.
다른 브랜드 광고이면 매우 쉬운 일이지만 이 경우에는 달랐다.
'독도는 한국땅 - 광고주 서경덕' 너무 웃기지 않은가?
특히 국가적 메시지를 보내는데 한 개인의 이름이 들어간다는 것은 더욱 이상했다.
서경덕은 끝까지 저항(?)하였고
서경덕의 이름과 연락처가 담긴 사이트를 만들고 그 사이트를 적어놓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그 사이트가 바로
이다
이제 다 해결된 것 같았는데 또 문제가 있었다.
이메일이 이상하다는 것이다.
서경덕은 당연히 한국에서 당시 가장 유명했던 @hanmail.net을 주소로 사용했는데
미국인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는 이상한 주소이기 때문이다.
동양인. 그것도 그냥 일반 복장에 신분은 학생이라고 주장하는 남자가
이상한 국가적 메시지를 광고하겠다는 것도 이상하고 의심되는데
유일한 연락처인 이메일도 이상해서 그 사이트에 좀 들어가보라고 했더니
다음이 한국어 사이트이기 때문에 그 미국컴퓨터에서는 @#%#$%^!#^ 이런 언어로 화면에 나와 버렸다!
우습게도 순식간에 서경덕은 그 자리에서 테러리스트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Gmail, Yahoo등 세계적인 메일서버를 가지고 있던 미국이기에 그 사람들 보기엔 당연했지만
서경덕은 여기서 기분이 나빴다고한다.
자타공인 IT강국 대한민국에 어찌 세계인이 다 알고 쓰고있는 이메일하나 없는가 안타까웠고
자존심상 미국이메일주소를 쓰기 싫었던 것이다.
서경덕이 그냥 이 이메일을 쓰겠다고 하자 또 광고 거부를 당했다.
그래서 서경덕은 그 사람을 옆에 앉혀놓고 그 주소로 이메일 보내보라고 한다음에
hanmail로 그 사람에게 답장을 보내서 '존재하는 이메일'임을 증명하고나서야 겨우 승인을 받았다고 한다.
모두 주문계약을 완료한 서경덕은 날짜를 7월로 잡았다.
일본 우익단체가 망언을 한 지 조금 시간이 지난 후였다.
일부러 일본 우익단체가 망언을 할때만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준비하고 있다는 이미지를 주고자했다고한다.
드디어 독도광고가 들어간 신문이 전세계에 공개된 2005년 7월 27일!
세상은 뒤집어졌다.
한국에서는 당연히 최고의 화제거리가 되었고 해외 언론사에서도 도대체 이게 무슨일이냐며
인터뷰 신청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서경덕의 노력에 감동받은 해외거주 한인들도 동참하겠다며
돈을 모아 그 나라의 최고신문에 광고를 연이어 게재하는등 세계로 일파만파 퍼지기도 하였다.
이와 동시에 일본측에서도 끊임없는 비난 전화를 받아야만 했다.
심지어 '밤길 조심해라' 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였고
어떤 사람은 한국인 알바를 고용해서 동시통역을 해가며 욕을 했다고 한다.
오히려 이런것은 서경덕에겐 자극제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결과적으로 첫번째 뉴욕타임즈 광고는 서경덕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한 반응이었다.
신문광고를 통한 홍보는 계속된다.
첫번째 뉴욕타임즈 프로젝트가 대성공을 하고 서경덕은 계속 신문광고에 도전하게 된다.
특히 첫번째에 워낙 이슈가 되었기 때문에 다음번 월스트리트저널에 도전할 때에는
담당자가 훨씬 수월하게 협조해주었다.
서경덕은 좀 더 효과가 좋은 광고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문구 하나하나를 실제 외국인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어떠한지
뉴욕 길거리에서 설문조사하였다.
역시 그 답게 거의 1천명 가까이에게 설문조사하였다고 한다.
그의 가족들이 돈을 모아 광고를 내기도하고
함께 일을 하며 친해지게된 가수 '김장훈'이 전면광고를 쿨하게 쏘기도 하였다.
특히 김장훈 같은 경우에는 기부천사라는 이미지에 걸맞게
요즘 무슨 프로젝트를 준비하냐는 물음에
서경덕이 미국신문에 전면광고를 추진하고 있다고 대답하자
그 돈이 얼마인지도 모르면서
단번에 "그래? 그럼 그거 내가 쏜다"라고 즉석에서 약속했다고 한다.
정말 대단한 사람들끼리의 인연이다.
더욱이 이 글의 맨 앞에서 소개했던 광고는 다음 하이픈 모금을 통해서
네티즌들의 작은 보탬이 모여 만들어낸 '워싱턴포스트 전면광고'이다.
그는 어쩌면 1차원적이고 전통적이라고 무시할 수 있는 '신문광고'를 최고의 홍보수단으로 만들어냈다.
또, 그는 모두가 감정적으로 대응할때 차분히 역사적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해서
근거없는 반론이 불가능하게 만들어 놓고
외국인들이 관심을 갖았을 때 바로 증거자료를 보내줄 수 있게 준비하였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독도에 대한 만행을 알게 되었으며
우리 한국 사람들도 더욱 자세히 알고 느끼게 되었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도 못하는 일을, 대한민국 정부가 마땅히 해야할 일을 혼자힘으로 해낸 것이다.
한국의 문화를 알려 국가이미지를 높여라!
그가 요즘 추진하고 있는 새로운 미션은 바로 '한국의 문화를 알려라'이다.
그가 문화에 집중하게 된 이유는 바로 한국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서이다.
지금까지 한글, 비빔밥 등의 어쩌면 사소한 것일 수 있는 것들을 홍보하고 있는데
그는 우리가 사소하게 느끼는 문화의 요소 하나하나가 거대한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외국에서 일본음식인 '스시'레스토랑이 고급화 정착되어 있다는 것이,
외국영화에서 일본의 사무라이가 멋지게, 일본이 부유한 나라로 표현되는 것이
얼마나 국가이미지에 영향을 주는지 그는 파악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중국, 일본과 비교해보았을 때 전혀 밀릴 것이 없고 오히려 우수한 문화 요소가 많은데
이를 잘 관리하지 못할뿐만아니라 해외에 알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비빔밥.
우리에겐 값싼 서민음식이고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사소한 음식이지만
외국인에겐 그렇지 않다.
평생 한번 먹어볼까 말까한 생소한 음식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어떠한 기회로 '비빔밥'을 접하게 되었을 때 받는 느낌이
바로 한국 이미지와 연결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해외에서 어떻게 그들에게 비빔밥을 소개하고 먹게하냐에 따라
수십억짜리 '한국으로 놀러오세요' TV광고를 해외 전파에 타게하는 것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경덕은 우리의 뛰어난 문화를 외국사람들에게 '뛰어나게' 인식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 노력의 일환은 최근 언론에 공개된 MBC 무한도전 한국문화알리기 스페셜이다.
사실 예전에 한식을 주제로한 무한도전 뉴욕스토리도 서경덕 교수와 함께한 프로젝트였다.
그때는 얼굴을 보이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드디어 무한도전에 얼굴을 보이신다고 한다.
서경덕의 도전 자체가 '무한도전'의 성격이 강하고
실제 MBC 무한도전팀도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뛰어난 예능인들이기 때문에
이들이 이루어낼 시너지 효과는 상상하기도 어렵다.
얼마뒤면 방송으로 보게될 그들의 위대한 무한도전이 매우 기대되고
서경덕의 '문화 알리기' 프로젝트가 바꾸어 놓을 한국의 이미지에 다시한번 기대된다.
지금까지 한국 최초의, 최고의 한국홍보전문가 서경덕 교수에 대해 이야기해보았다.
사실 이 글을 쓰는 동안 정말 너무 힘들었다.
왜냐하면 그 분이 해오신 일, 해나가실 일이 너무나도 많고
그 하나하나가 모두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줄만한 일들이기 때문이다.
블로그 포스팅 특성상 많은 분들이 읽다가 지치게 할 수 없어서 줄이고 줄이고 또 줄이기 위해 힘들었다.
서경덕이라는 사람은 특히 20대가 가장 본받아야할 인물이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한국에 대한 마인드.
그 사람이 온몸으로 '아는것을 행으로 실천하는 자세'
그 사람의 엄청난 도전정신 등등
하나 빼놓을게 없는 훌륭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을 이렇게 줄이면서 너무나도 아쉽다.
좀 더 알려주고 좀 더 이야기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사실 강연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서경덕 교수님의 강의를 들었던 웅진코웨이에서의 자리에서도
할얘기는 너무 많으신데 시간은 한정되어 있어서 끝까지 못듣고 가는 아쉬움까지 있었다.
지금까지 스티브잡스, 윤석금, 이제석 세 명의 인물을 ROLE Model 게시판에 포스팅했는데
모두 관련 저서를 참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하게 책 자체를 추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반드시 책을 추천하고 싶다.
나는 교수님의 강의를 듣기 전에 직접 쓰신 '세계를 향한 무한도전'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그 안에는 모든 에피소드와 그의 정신이 담겨있다.
정말 웃긴에피소드도 많기 때문에 심심하지 않고 즐겁게 읽어나가면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서경덕 교수님의 '도전정신', '실천력'을 10분의 1만 배우자고 이야기하고 싶다.
물론 우리가 하루아침에 서경덕 교수님같은 엄청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딱 그 분의 10분의 1만 따라가면 우리도 마음껏 도전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싶다.
앞으로도 계속될 세계를 향한 서경덕의 무한도전.
함께 응원하며 배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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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내용은 서경덕 교수님의 저서 '세계를 향한 무한도전'을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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