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하게 살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인천의 한 사찰에서 불교청년회를 이끌던 절오빠에게 지난 남자친구들과는 다른 매력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이너피스'죠. 앞으로의 인생이 겁나고 두려웠던 20대 대학생에게 절오빠 특유의 여유로움과 내려놓는 삶의 자세는 매력으로 다가왔고, 흠뻑 빠져 연애하다 보니 그때의 절오빠는 지금의 남편이 되어 있네요.
저는 매 순간순간을 숨가쁘게 사는 것을 좋아합니다. 회사에서도 여유 있는 날들보다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일하고 퇴근하는 것을 선호했고,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강연과 네트워킹을 위한 모임에 참석하면 오히려 에너지를 얻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 숨 막히게 바쁜 일상을 사는 사람,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사람, 제대로 쉬지 못하고 전전긍긍 걱정을 안고 사는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제 삶에 비하면 남편은 스님과 같은 사람입니다. 본인보다 남의 연봉이 많다는 소리를 들어도 절대 부러워하지 않고 진심으로 축하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으며, 자신의 인생을 자신만의 속도와 잣대로 살아갑니다. 지난 8년 동안 남편이 불안해하는 모습을 본 적은 세 명 남짓이 함께하는 스타트업에 다닐 때뿐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저렇게 느리게 살아도 되나 싶지만 늘 제 몫은 해내며 사는 게 (제 기준에서는) 참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오늘은 내가 어제 쌓아온 노력의 결과
지난 인생의 뿌듯했던 성공 경험들을 돌이켜보면, 노력과 인내의 시간이 먼저 떠오릅니다. 서울 끝자락에 있는 대학에 입학해 적성에 맞는 전공을 공부하며 즐거웠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발목을 잡고 있는 학벌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매일 새벽 5시 첫 차를 타고 강남의 편입학원으로 향했고, 일 년이라는 시간을 온전히 투자해서야 어렵사리 편입학 합격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몽골의 초원에서 카메라를 들쳐 매고 손목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영상을 찍고 콘텐츠를 만들던 열정의 시간이 쌓여 대기업 재단의 인턴에 합격했다는 전화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첫 회사에 입사하고, 지금의 회사에 근무할 때까지 '잘했다'라는 인정이 있기까지 수도 없는 실패와 도전, 그리고 치열한 노력의 시간이 존재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낳고 주어지는 지금의 여유가 더욱 불안하게 느껴집니다. 안정적인 내일을 위해 부지런히 달려야 하는 오늘, 저는 사회의 시선으로 보면 '여유로운' 하루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늦은 시간까지 아이와 침대 위에서 까꿍놀이를 하며 웃었고, 아이가 낮잠을 자는 시간에는 아이 장난감을 사고 집안을 정리했습니다. 엄마로서는 성장하였지만 사회에서는 정체되어 있다는 현타가 오는 순간, 이렇게 경력 단절의 수순을 밟아 사회에서 낙오자가 되어 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몽글몽글 피어납니다. 나의 오늘은 사회에서 밥벌이하는 사회인의 속도가 아니라, 6개월짜리 아이의 속도로 흘렀기 때문입니다.
절오빠의 이너 피스를 배워야 하는 순간
육아휴직을 하고 가장 놀라웠던 점은 한낮의 백화점 주차장이 빽빽하다는 사실입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 9시부터 6시까지 월급을 받으며 직장에 다니는 삶이 전부라 생각했던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 밖을 보니 직장에 다니지 않아도 충분한 돈을 벌고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회사, 조직이라는 곳을 벗어나도 또 다른 빛나는 삶이 있음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밖에도 휴직 동안 배운 것들은 생각보다 많습니다. 글쓰기 모임에 참여하며 글을 통해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는 방법과 꼭 완성도 있는 글을 써야만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문학책에서만 보던 '누군가를 위해 나 자신을 포기하는 삶'을 아이를 통해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의 뿌리인 우리 가족을 평화롭게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알아갑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엄마가 되니 마음이 조금 너그러워졌습니다.
지금 저에게 절실히 필요한 건 잘 살고 있다는 자기 확신입니다. 치열하게 살지 않아도, 느린 호흡의 하루를 살아도 충분하다는 절오빠의 여유로운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휴직 동안 IT/마케팅 트렌드는 잘 모를 수 있지만, 일을 대하는 태도는 더욱 진지해졌고 일터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배웠습니다. The journey is the reward. 휴직 동안의 조금은 느리고, 여유로운 여정 또한 인생의 큰 보상임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이제 복직도 5개월밖에 남지 않았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