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의사회 의사신문 2019년 12월 특집호 기고문
최근 대학 입시에 대한 담론이 불거지면서 조셉 피쉬킨의 2013년 저서 <병목사회>에 대한 글을 인상 깊게 읽었다. 획일화된 성공의 기준, 또 이를 달성할 수 있는 한정된 기회가 존재하는 오늘날의 “큰 시험 사회(big test society)”를 한 걸음 물러나 살펴보면 거대한 병목과 같은데, 작가는 이 병목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인들이 병목을 통과할 수 있도록 도울 뿐만 아니라 제약된 한두 개의 ‘성공 공식’에서 벗어나 ‘우회로’를 도입하여야 한다고 적는다.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는 여러 갈래의 경로가 있다면 길 하나 앞에서 교통이 정체되는 상황은 줄어들고, 사람들 또한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방식의 삶을 찾아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의과대학 입시라는 거대한 병목을 통과한 “병목 생존자들”이 포진해 있는 의대와 병원은, 어쩌면 그래서 가장 우회로에 익숙지 않은 집단 중 하나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렇기에 더욱, 우리에게는 더 많은 우회로가 필요하다.
나는 올해 의과대학을 졸업했고, 지금은 1년간의 탐색기를 가지며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있다. 심장학에 대한 강렬한 동경, 만화작가 “디지티”로서의 정체성, 세상에 새로운 지식을 내놓고 싶은 과학도로서의 이상을 모두 간직한 채 산다는 것이 가능한 꿈일까 나조차도 반신반의할 때가 많다. 하지만 나는 조금 더 넉넉한 도화지에 여러 가능성을 그려 보고 싶어서 미국 유학을 계획하게 되었다. 어떤 거창한 도전을 한 것도, 무엇인가를 이뤄놓은 것도 없는 이 시점에 '병원 밖의 의사들'에 대해 어떤 시각을 풀어내야 할까 고민했다. 갓 졸업한 지금 시기, '넓은' 길은 벗어났지만 이단아라고 하기에는 여전히 임상의학의 테두리를 밟고 있는 나의 선택에 대해, 학생 및 병아리 의사로서의 ‘딴짓’의 경험에 대해 적고자 한다.
내가 만화를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것은 본과 1학년 때였다. 어린 시절부터 글 쓰고 정보를 나누는 일을 즐거워해 왔지만, 기폭제는 본과 공부였다.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나는 역설적으로 흥미를 느꼈다. 잘만 이해하면 복작복작 살아 숨쉬는 도시 같은, 이렇게나 따뜻한 우리 몸인데, 대체 왜 의학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이토록 딱딱하고 차가운 것이며, 건강에 대한 부정확하고 위험한 믿음은 이토록 쉽게 세간을 떠도는 것인지……. 의학의 ‘참을 수 없는 귀여움’을 알리고자 수업 중 끄적이던 낙서들을 모아 올리면서 <디지티낙서장>이 탄생했다. 필명 “디지티”로서 나는 다른 의대생들과 함께 의대 생활에 대한 만화를 연재하기도 했고, 기성 과학 잡지에 의학 상식을 만화로 풀어내 보기도 했다. 만화가 익숙해진 다음에는 <청년의사> 만평 코너의 스토리 작업이나, 대중가요 개사, 팟캐스트 방송 등을 시도하며 대중매체를 가지고 끊임없이 실험했다.
이 시기 최대 고민은 ‘딴짓(미디어)’과 ‘본업(공부)’의 균형이었다. 애초에 환자를 볼 자격보다도 몸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얻고자 하는 마음으로 의대에 왔던 터라 그 목적에 충실하고 싶기도 했고, 졸업과 동시에 임상을 그만두려는 것이 아니었던 만큼 환자를 보기 위해 쌓아야 하는 기반을 게을리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학교 안팎에 걸친 내 생활이 저글링(juggling) 곡예 같기도 했지만, 만화를 그리면서 의학 지식이 공고해지고, 의과대학 생활 중에서 만화의 영감을 얻는 이 ‘이중생활’ 속에서 커뮤니케이터로서의 자아와 의학도로서의 자아가 서로를 먹여 살리는 듯한 느낌을 받을 만큼 어느 하나를 빼놓고는 서로를 정의할 수 없었다.
균형의 문제를 고려하고도 학생 신분으로 ‘딴짓’을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수월했다. 뭘 하든 의대생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의과대학이라는 든든한 소속 안에서 손을 조금 더 뻗으면 되는 문제였다. 그것은 내가 어떤 시도를 하든, 혹시라도 그 과정에서 조금 균형을 잃어 과몰입하게 되더라도 내가 감수해야 할 것은 학과 공부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더욱이 우리 학교의 Pass/Nonpass 제도는 불필요한 경쟁이나 압력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었고, 나는 보다 자유롭게 다양한 분야를 탐색할 수 있었다.
이것이 얼마나 큰 기회였는지, 도전의 장벽을 얼마나 낮추어 주었는지 학생의 신분을 벗어나고 나서야 뼈저리게 실감했다. 대부분의 수업을 한 교실에서 함께 들으며, 동기 집단을 이탈하는 숫자가 현저히 적은 의과대학 특성상 학교생활과 이어지는 병원 생활은 마치 기차 여행 같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의예과 2년, 의과대학 본과 4년, 그 이후 모교에서의 인턴, 레지던트, 많은 경우 펠로우 과정까지, 대다수가 탑승한 고속열차는 아무도 이름 붙이거나 정의하지 않았지만 누가 봐도 공고한 “표준”이었다.
올해가 되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온전히 시도해 보기 위해서는 이 기차에서 내려야 했다. 긴 시간 동고동락한 동기들과도, 날 키워 준 모교와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정들어 있었고, 한국에서의 임상에 대한 미련도 컸기에 올해 초에 내린 이 결정은 짧은 인생에서 가장 힘든 선택이었다. 몇 명 먼저 걸어본 선배들은 드문드문 있지만 내 상황과 목표에 맞는 길은 나만이 계획하고 개척해야 한다는 것은, 특히 평생을 기찻길 위에서 살아온 내겐 더더욱, 두근거리면서도 막막하고 무서운 일이었다.
"남을 수 있으면 모교에 남는다"가 기본값인 사회에서 이를 이탈하는 자는 의아한 시선을 받기 마련이다. 모종의 이유로 ‘남을 수 없어서’ 떠난 것은 아닌가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나조차 논리만으로 이해할 수 없고, 잘 풀릴지 확신할 수 없는 내 선택을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학문으로서의 의학을 사랑하여도 철길에서 내려설 수 있다, 환자를 보고 싶다고 해서 반드시 정해진 ‘가장 빠른 길’을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누군가 해주었더라면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
흔히 명확하게 구분 짓는 병원 안팎, 임상과 비임상이 날카롭게 분리된 흑백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형화된 길을 벗어난 어떤 도전이나 탐구를 한다고 해서 그것이 영영 임상 현장을 등질 것임을 의미하지도 않고, 반대로 환자 경험을 조금 더 쌓았기에 상상하고 꿈꿀 수 있는 일들, 실행할 수 있는 가능성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만화가로서의 정체성과 의료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서로를 유지시키고 성장시켰듯이, 다양한 경험은 현 시스템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다채롭고 지속 가능하게 해 준다.
올해 초 카이스트에서 “도전의 가장 큰 적은 경험하지 않은 자의 조언”이라는 현수막을 보았다.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건지, 모르는 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나에게 투영하려는 건지 불분명한 “조언” 좀 들어본 사람이라면 백 번 공감할 말이리라. 하지만 동시에, 도전의 가장 큰 기폭제는 이미 경험한 자들의 조언이기도 했다. 비슷한 시각과 목적으로 “남들 다 가는 길” 바깥에서 본인의 길을 만들어 본 사람들의 이야기는 내게 용기를 주었고, 외롭고 초라할 때 가장 큰 힘이 되었다.
대학생 이후 내가 쌓아온 삶과 관계 대부분을 놓고 간다는 심정으로 내려온 대전에서 뜻밖의 동네 친구를 사귀었다. 걸어온 길도, 졸업 시기도, 성향도 비슷한 우리는 종종 카이스트 주변에서 맥주를 함께한다. 지금 왜 이곳에 있고,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처음 털어놓던 날, 친구는 대학병원을 떠나게 된 이유를 이야기하다 씩 웃으며 말했다.
“십 년 뒤의 내 모습이 너무 명확하게 그려지면 재미없지 않겠어요, 선생님?”
어쩌면 우회할 수 있는 용기는 불확실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에서 오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병목을 답답해하는 미래의 의료인들은 조금은 덜 용기 내도 되도록, 경험한 자들의 조언이 쌓이고 쌓여 머지않은 미래에는 좁아진 말초동맥(peripheral artery) 주위에 잘 발달된 곁가지 혈관(collaterals)과 같이 아주 다양하고 멋진 우회로들이 빛을 발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