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노오오오력"만으로 행복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노오오오오오력 무용론에 관하여

by Dilettante
Don’t go around telling the World that it owes you a living.
The World owes you nothing; it was here first.
(세상은 당신의 인생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없다.
당신이 태어나기 오래전부터 여기 있었던 세상이 당신에게 진 빚은 없다.)


-Mark Twain (마크 트웨인, 미국 소설가)


1) 가치(Value)는 절대적 가치가 아닌 상대적 가치: 노동시장과 희소성에 의한 값어치 상정과정


이코노미스트 (The Economist)는 2016년 기사 “Uphill Generation (오르막길 세대)”에서 “밀레니얼 세대” (Millennial Generation: 1980년도에서 2000년도 사이에 태어난 젊은 세대. 현대 청년층)가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세대라고 극찬하였다. 기사에 의하면, 그들은 그 어느 세대보다도 건강하며 기대수명이 길고, 똑똑하고 빼어나며 뛰어나다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였다. 공교육과 대학교육의 보편화 덕에 이들의 평균적 지능지수는 인류가 여태껏 보지 못한 가장 높은 경지로 올라와있으며, 인터넷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세대이기 때문에 정보 습득 능력도 빼어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밀레니얼 세대는 그들의 바로 전 세대에 비해 굉장히 불안정한 삶을 살고 있으며, 불만도 매우 많다고 기사가 말한다. 소위 선진국이라 불리는 국가들에서 살고 있는 젊은 세대는 평균 15% 정도가 니트족 (NEET: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의 줄임말로 학생이 아닌 상태에서 취업 상태도, 취업 준비 상태도 아닌 상태를 말함. 쉽게 말하면 취업을 포기한 백수)이라고 말한다. 취업이 힘드니 수입이 적어지고, 독립하는 시기도 늦어지며 자원 습득 능력도 떨어진다. 그들이 말하길, 이전 세대처럼 “노력”만 해서는 자신들이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의 삶을 살 수 없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밀레니얼 세대는 “Uphill Generation”, 즉 “오르막길 세대”라고 이코노미스트 기사가 부른다. 내리막은 고사하고 평지도 아닌, 오르막길을 기어올라가야 겨우겨우 살아나갈 수 있는 것 같은 절망감을 느끼는 세대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기사의 마지막 문단은, 현대 사회가 어떻게 해서든 이런 젊은이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으면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세대의 재능을 낭비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며 마무리를 짓는다.


그렇다면 왜,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세대”가 이렇게도 대우가 안 좋은 것일까.


인간 노동의 가치는 “절대적 가치”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 노동도 결국 시장에서는 일종의 상품일 뿐이며, 상품의 가치는 “희소가치”로 정해지는 것이다. 즉, “상대적 가치”에 의해 결정되는 개념이다. 이건 중학교 경제학 수업에서 우리 모두가 이미 배운 굉장히 기본적인 상식적 개념이다. 노동시장은 결국 “노동”과 “임금”의 물물교환의 장이다.

단순하게 생각해보자. “공기”라는 “상품”은 절대적 가치로 따져봤을 때 매우 중요한 존재이다. 없으면 인간이 죽으며, 항시 필요하다. 하지만 아무도 공기를 (아직까지는) 돈을 주고 구입하지 않는다. 희소가치가 적다 못해 없기 때문이다. 공기의 “시장 공급”은 무한대에 가깝다. 물속에 잘못 들어가지 않는 다음엔 공기는 어딜 가든, 어디에든 있다. 그렇기에 공기의 “시장가치”는 없다고 봐도 무관하다. 공기는 공짜이다. 희소가치가 0에 가깝기 때문이다.


역으로, “보석”이라는 상품은 절대적 가치로 따져봤을 때 상징적 가치 외에는 거의 아무런 가치도 없다. 물론 공업용 다이아몬드 같은 경우 실용적인 용도도 충분히 있지만, 일반적으로 루비나 사파이어 같은 광물은 관상용, 혹은 과시용 정도의 사치품일 뿐이다. 없다고 누가 죽거나 하진 않는다. 하지만 보석의 절대적 매장량은 매우 희소하고, 공급량에 비해 수요가 높기 때문에 이유야 어찌 되었든 시장에서 보석류의 값은 매우 높다. 희소한 보석류일수록 그 값어치는 높아진다. 보석은 그렇기에 공짜가 아니다. 희소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2) 노력 “그 자체”는 원래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다.


“미녀는 괴로워”라는 영화에서 한 등장인물이 이런 말을 한다.

열심히는 누구나 할 수 있어. 그러니까 잘해야지.


그냥 들으면 굉장히 재수 없는 소리다. 노력을 폄하하는 듯한 이런 발언은 뭔가 도의적으로도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뭣보다 평상시 내가 수고해서 쥐어짜는 노력을 폄하하는 것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결코 바뀔 수 없는 불변의 진리이기도 하다. 노력 그 자체는 무가치하다. 당신의 부모나 가까운 친구들 정도야 당신이 수고하는 노력 그 자체만으로 당신을 높게 평가하고 품어줄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은 당신의 부모도 친구도 아니다. 세상의 절대다수의 인간은 당신의 노력에는 관심이 없다. 당신에게 악감정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저 당신에게 그다지 애정이나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에게 무얼 받아낼 수 있는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인간관계는 결국 기브 앤드 테이크다.


오래전 스탠리 큐브릭 (Stanley Kubrick)이 한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있다.


이 세상이 정말로 무섭고 잔혹한 이유는 잔혹해서가 아니라 무심하기 때문이다.
(The most terrifying fact about the universe is not that it is hostile but that it is indifferent.)


세상은, 그리고 절대다수의 인류는 당신이 누구인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악의는 없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이 당신에게 관심 있는 것은 솔직히 말하자면 딱 한 가지뿐이다.


“나는 너에게서 무엇을 얻어낼 수 있나?”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할 수 있는가에 따라 당신은 사회에서의 가치가 정해지는 것이다. 당신의 가능성이나 포부나 꿈과 희망은 제 3자 입장에선 솔직히 알바 아니다. 내가 선택 “받는” 상황 (취업상황)에서는 이 이야기가 부당하고 억울하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본인이 선택 “하는” 상황이라면 누구도 이 말을 부정하지 않는다.


생각 실험을 하나 해보자.


당신은 여성이다. 길을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어떤 남자가 나타나선,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한다.


“저는 오래전부터 당신을 사랑해왔습니다. 멀리서만 바라보고 있었지만, 저는 한순간도 당신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어요. 저는 당신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정말 많은 노력을 했어요. 당신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있게 운동도 열심히 했고, 당신이 좋아하는 것들은 모두 꾀차고 있습니다. 저와 사귀어주십시오.”


이 상황이 로맨스 코미디가 될지 호러물이 될지는, 사실 이 남자가 뭐라고 말한 지로 정해진 다기 보단 이 남자가 누구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이민기라면 로맨스가 되고, 조민기라면 호러가 된다.


사람 중에 정말 아무런 연애감정도 생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당신에게 다가와서 “당신에게 마음에 들기 위해서 정말 엄청나게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라는 이유 만으로 그 사람과 연인관계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


연애라는 개인 기호가 강하게 작용하는 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음 예를 한번 보자.


당신은 심장에 병이 생겨서 급하게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심장 수술이 필요한 상황이다. 상태가 많이 좋지 않아, 수술은 복잡하고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성공하면 살아날 수 있지만, 실패한다면 당신은 죽을 것이다. 이때 두 의사가 당신 앞에 서있다.


-한 의사는 천재이다. 좀 재수 없는 인간이다. 자신의 천재성과 재능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기에 거만하다. 이 의사는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흉부외과의사이지만, 의대에서 그다지 많은 노력은 드리지 않았다. 재능이 워낙에 출중했기 때문이다. 그는 심장수술을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


-다른 의사는 착하고 성실하지만 손이 선천적으로 어줍다. 의대에서 누구나 다 인정하는 진정한 “노력파”였지만, 의대 성적은 항상 중간도 가지 못했다. 하지만 노력 하나만큼은 누구보다도 많이 했다. 그는 선하고, 의사가 되기로 결정한 이유도 아픈 사람들을 살려내어 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그는 수술 성공률이 50%가 되지 않는다.


당신에게 의사를 고를 수 있는 권한이 있다면, 누구에게 수술받겠다고 말하겠는가?



물론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노력의 중요성에 대해서 질리도록 들어왔다. 부모님은 늘 우리에게 “세상에서 가장 귀한” 아들/딸이었고 왕자님/공주님이었으며, 학교에서도 늘 “노력하면 보상받을 것이다”라고 끊임없이 들어왔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오늘날 인간은 “귀(貴)”하기엔 세상에 인간이 너무 많다. 귀하다, 라는 말 자체가 희소가치가 높다는 뜻인데, 사실 오늘날 인간은 흔하다 못해 넘쳐나고 있다. 노력 하면 보상받을 것이다 라는 것도 거짓말이다 (충분조건이 아니란 뜻이다). 모두가 원하는 것 (좋은 대학 자리, 좋은 일자리)의 공급은 적은데 수요는 너무 많다. 노력하는 자들 중에서 보상받는 자들은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노력하는 절대다수는 보상받지 못할 수밖에 없다. 의자의 수는 10개인데 앉겠다고 벼르고 있는 사람이 100명이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90명은 보상받지 못할 것이다.


노력하지 않고도 보상받는 사람 또한 있을 것이다. 선천적으로 천재적 재능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 중에선 범인(凡人)들 사이에서 아주 소량의 노력만을 들이고도 그들을 모두 떨쳐내고 보상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범인(凡人)은 범인(汎人)이지만, 천재는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3) “노오오오오오오오력”하라는 말이냐: 남은 90명의 “앉겠다는 사람들”


그럼 왜 도대체 우리에게 그렇게 노력하라고 강요하고 세뇌하고, 어떤 의미에선 사기까지 쳐왔을까. 이유는 크게 2가지다.


i) 어떠한 경우든, 노력하지 않는 것보단 노력하는 쪽이 개인에게 더 낫기 때문이다.

노력이라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발전시키는 하나의 행위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상태보단 근육을 단련하는 쪽이 어쨌든 근육량이 더 늘고 힘이 더 세질 것이다. 선천적으로 몸이 좋아서 조금만 운동해도 근육이 금방 붙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아무리 운동해도 몸이 근육이 잘 붙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양쪽 모두, 운동하지 않은 생태보단 운동한 상태가 더 건강하고 힘도 셀 것이다.


자신의 처지가 어찌 되었든,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노력을 조금이라도 하는 게 자신을 더 좋은 상태로 만들 수 있는 것이고, 조금 하는 것보단 많이 하는 것이 더욱더 좋은 상태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세상에 내놓기에 최적의 상태로 만들기 위해 노력은 어쨌든 하는 쪽이 좋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노력한다고 모두 어떤 절대적/객관적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천재는 100시간을 연습해서 세상 제일이 될 수 있고, 범인은 1000시간을 연습해도 천재의 반도 못 따라갈 수 있다. (대부분이 실제로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범인이 1000시간 연습하기 전과 후가 똑같다고 할 순 없다. 분명 연습 후에 전보단 더 나은 상태가 되어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의 입장과 처지가 어찌 되었든, 노력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세상에 내놓기에 더 좋은 상태로 만들어주고, 그게 결국 개인에게도 나쁘지 않기 때문에 노력하라는 것뿐이다.


단순히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노력은 스스로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노력 그 자체로 아무 관계없는 제 3자에게 보상을 바라서는 안 된다. 이건 무슨 도덕적, 도의적 문제가 아니다. 어디 가서 “나는 노력했으니 내 노력한 양만큼 당신이 날 보상해라”라고 한번 해봐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신을 그냥 무시하고 조용히 비웃을 것이다.


ii) 사실 어렸을 사람을 키우고 가르치고 담금질해서 얼마나 뛰어난 결과가 나올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어린이가 성인으로 큰 뒤에 평가를 할 때 누가 뛰어나고 누가 형편없는지 말하기는 쉽다. 그건 일정 수준이 넘어서면 인간의 최종 기량에 다 달아서 더 이상 발전이 없는 상태로 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든지, 그게 아니라 할지라도 평가를 하는 기점이 다가오면 어찌 되었든 그 기점을 기준으로는 객관적 평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시험이나 시합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하지만 아이인 경우, 그냥 봤을 땐 아직은 이 어린 인간이 얼마큼의 가능성을 갖고 있는지 사실 알기가 쉽지 않다. 피카소나 모차르트 같은 한 분야의 괴물 같은 천재들이나 어렸을 때부터 압도적인 능력으로 평가할 수 있지, 일반적인 인간은 어느 정도 교육도 시켜보고 발전시켜보고 나야 최종적으로 이 사람이 쓸만한지 아닌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일단 어린이들에겐 모두 노력하라고 얘기해준다. 그리고 작은 거짓말을 하나 보탠다.


“노력하면 누구나 만족할 수 있을만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저학년에선 한술 더 떠, 잔인하게도 “장래희망”을 말해보라고 한다. 누구든지 대통령도 될 수 있고 사장님도 될 수 있고 (필자가 어렸을 당시엔) 월드컵 국가대표 선수도 될 수 있다고 희망을 강제 주입한다. 성공과 행복이라는, 먼 훗날에서나 맛볼 수 있는 미끼를 아이들 앞에 놓고 일단은 장기적으로 모두 노력해서 개개인의 기량을 최대한 발현시킬 수 있도록 밀어붙이는 것이다.

훈련의 기간, 교육의 시간이 끝나고 난 뒤에야 사회는 쓸만한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들을 솎아낼 수 있지만, 가능성만 갖고 있는 어린이들은 그것을 조기에 알아낼 방법이 없기 때문에 일단 동기부여부터 시키고 지켜보는 것이다.


위의 1에서 말한 것처럼 결과적으로 손해를 보는 사람은 없다. 노력하지 않은 것보단 노력 한쪽이 훨씬 더 나은 결과물이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력”하면 본인 스스로가 주관적으로 만족할 있는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부분은 사회가 만들어낸 거짓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의자는 10개밖에 없고, 앉겠다고 하는 사람은 100명이니까 말이다. 앉겠다는 사람의 수대로 의자를 무작위로 만들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만약에 의자를 그런 식으로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그 후엔 1000개의 의자 중에서 가장 편하고 위치 좋은 의자에 앉겠다고 또 경쟁은 일어날 것이다.


이코노미스트에서 말한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세대는 결국 다 크고 나서, 나름 노력하고 열심히 했는데도 약속받은 “원하는 보상”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인간은 객관적으로 뛰어나던 뛰어나지 않던 자기애가 강한 존재이기 때문에, 선택받지 못한 평범해진 자신의 처지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뭔가 음모가 있는 것 같다.

누군가에게 당한 것 같다.

내가 그다지 사회에 그렇게까지 필요한 인간이 아니라니, 그럴 리 없다.

엄마가 그랬단 말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총명하다고. 왕자님이라고, 공주님이라고 그랬단 말이다.

열심히 하면 내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고 약속받았단 말이다.

누가 나의 마땅히 받아야 할 권리를 박탈해갔다.

그래, 그게 아니고선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런데 말이다. 모두 노력했다. 나는 대학을 나왔는데, 문제는 너도 나도 다 대학을 나왔다. 내 학점은 뛰어나다. 근데 내가 경쟁하는 사람들도 학점은 뛰어나다. 자격증을 어렵게 잔뜩 땄다. 근데 다른 사람들도 다 땄다.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세대인 건 사실이다. 오늘날 밀레니얼 세대 한 명을 50년 전 세계에 던져놓는다면 분명 압도적으로 자신의 경쟁상대들을 짓누르고 위로 고속 상승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내가”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것이 아니다. “이 세대”가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것이다. 너도 나도 다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상황에선, 객관적으로 평가했을 때 과거에 비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지금 당장 이 뛰어난 사람들은 희소가치가 적다. 나 혼자 피카소 여야 피카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픽사의 “인크레더블”에서 악역 신드롬이 이런 말을 한다.

모두가 슈퍼히어로라면, 누구도 슈퍼히어로가 아니야.


4) 애당초 "노오오오오오력"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이들도 있다.


여기서 잠깐. “노오오오오오오오오력”해도 내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없다고 하는 소위 “좋은 스펙”의 젊은이들은 막상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이들이 갖고 있는 고민마저도 할 수 없다는 점에 대해선 사실 크게 관심 갖지 않는다. “명문대”를 나온 학생들은 지방대학을 나온 학생들보다 분명 더 많은 것을 갖고 있다. 지방대학을 “지잡대”, 즉 “지방 잡 대학”이라고 부르는 것부터 이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이들에겐 돌아서서 “나는 너보다 더 많은 노오오오오오오오력을 했으니 당연히 너보단 더 많은 걸 갖았지”하고 말한다. 명문대 내에서도 순위가 갈린다. 상위 명문대, 흔히 말하는 SKY 대학들 (Seoul National University, Korea University, Yonsei University를 뜻하는 서울대 고대 연대)은 자신보다 낮은 순위의 명문대학들보다 더 많은 혜택을 받는 것에 대해선 당연히 생각한다. 그리고 실제로 고학력자는 선택하는 쪽 입장에선 더 선호 대상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차등은 왜 일어날까.


사실 대학 졸업을 아무리 좋은 곳에서 한다 해도, 직업훈련소에서 4년 동안 실무만 배운 게 아닌 다음엔 “똑똑한 백지상태”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차등을 두는 이유는, 수능이라는 전국적 거름망을 통해서 그중에서 더 뛰어난 사람들이 걸러져 나오기 때문이다. 똑같은 문제를 던져줬을 때 더 잘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추상적으로나마 능력이 더 높다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 뒤, 그 “걸러진” 사람들 중 상위에서부터 모아놔서 다시 한번 경쟁을 시킨 것이 "고학력, 고학점자"이다. 현실적인 실무는 기대할 수 없다 하더라도, 일단 2번에 걸쳐 걸러져 나온 사람들 중 가장 위쪽에 있는 사람은 어찌 되었던 그 밑에 있는 사람보단 뭔가는 낫다는 객관적 지표가 있다는 것이다. 국가대표 선수들과 달리기를 해서 꼴찌를 한 사람이 유치원생들과 달리기를 해서 1등 한 사람보다 나은 것과 똑같은 것이다. 하지만 국가대표 선수들 중에서도 1등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단순히 내가 국가대표들과 함께 뛰었다고 무조건 나도 1등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의자는 10개밖에 없고, 금메달은 1개밖에 없다. 좋은 것들은 늘 원하는 사람들보다 수가 적다.


하지만 자신들끼리의 경쟁에서 뭔가 얻어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 "고학력, 고학점자"들이 갑자기 노력 비하론을 꺼내 든다. “노오오오오오오오오력”하란 소리입니까라고 말하고선 이걸 뭔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일침이라도 한 것처럼 스스로 좋아한다. 자기에게 편할 때만 능력 주의자이다가, 불편할 땐 갑자기 능력주의(Meritocracy)를 내팽개치고 너도 나도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원래 계급장 떼자고 하는 것은 자기보다 위에 있는 사람에게나 하는 말이다. 자기 밑 계급의 사람을 상대할 때 계급장을 떼는 사람은 흔치 않다. 노오오오오오오오오력 해서 결과적으로 위에 군림하게 된 사람들은 노력 비관론자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노오오오오오오오오오력 하라고 훈계하는 지난 세대의 “꼰대”들에게는 그들의 “특권”을 내려놓고 나누라 하지만, 자신이 갖고 있는 “특권”은 여전히 노력을 통해 내가 얻은 합당한 권리이기에 절대로 자신보다 밑에 있는 사람에게 나누겠다고 나서지 않는다.


5) “노오오오오오력”하라는 말이냐: 10개의 “의자들”


한동안 인터넷에서 한 동영상 캡처 영상이 마구 돌던 때가 있다. 내용은 대충 이렇다. 대기업들에서 대학생들이 아무리 좋은 대학을 졸업해도, 막상 취직을 시켜 일을 시켜보니 작업능력이 형편없다는 평을 내렸다. 명문대 나와서 자존심은 강하고, 뭔가 머리에 든 게 많은 것처럼 행동하는데 막상 일을 시켜보니 실무를 너무나도 못한다는 얘기였다. 이것은 비단 한국 대학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페이팔(Pay-Pal)의 공동창업자이자 현재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투자전문가 피터 티엘 (Peter Thiel) 역시 자신의 회사에 명문대학 출신 졸업자들만 고용해서 일을 시켜봤는데, 기본적인 일은 둘째치고 맞춤법도 틀리는 형편없는 인간들이 수두룩했다고 말한다.


대기업들은 이런 이유로 대학들에게 졸업생들의 취업률을 높이고 싶으면, 대학들에서 직업전선에 더 필요로 하는 기술들과 지식들을 가르치는 커리큘럼을 편성해달라는 식의 요구를 했었나 보다.


이를 듣고 분노한 한 연대생이, EBS의 한 방송에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기업체 분들께서 항상 ‘대학생들 실무 경험이 부족하다’, ‘얘네들 못써먹겠다’,
‘제대로 대학에서 교육을 해라’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데,
대학은 회사원 뽑는 곳이 아니에요. 여기는 공부하는 곳이에요.


멋진 말이다. 젊은이의 패기가 느껴지는 소신발언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 연세대생 분도 (필자의 짐작을 바탕으로 하는 말이지만) 결국 대학 졸업하고선 취업을 하려 할 것이고 연세대를 나왔으니 속으론 그래도 이왕이면 주요 대기업에 취직하고 싶어 할 것이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은 훌륭하다. 하지만 학자의 길을 갈 계획이 아닌 다음엔, 기업들에서도 비슷한 취지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학 졸업하고 취업하려는 학생분들께서 항상 ‘명문대 나와서도 대기업이 나를
안 뽑아준다’, ‘이렇게 훌륭한 지성인을 왜 기업들에서 안 데려다 쓰냐’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데, 기업은 학자를 뽑는 곳이 아니에요. 여기는 돈 버는 곳이에요.


과거에는 대학만 나와도, 자기 학문 공부하고 졸업하고도 취업이 잘 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시대가 달랐고 그 시대의 상황이 달랐기 때문이다. 갑자기 주던걸 악의 갖고 뺏어간 것은 아니다.


사실 의자는 10개로 고정되어있는 상황은 아니다. “비어있는” 의자가 10개인 경우가 많고, 이미 그 전 세대가 앉아있는 자리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일본의 경우처럼 한 세대가 교체되어 앉아있던 사람들이 자리를 내어주면 10개가 20, 30개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먼저 와서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꺼지라고 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자신이 앉아있는 자리를 노인이 와서 어깨를 툭툭 치고 눈치껏 알아서 일어나라고 하면 화내는 세대이니 무슨 뜻인지는 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저 의자수가 더 줄어들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 비해 기술이 발전한 이유로, 전자동화와 전산화가 더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오늘 예전 세대에 비해 모든 직업전선의 노동집약성이 떨어지고 있다. 10명이 해야 했던 일을 한 사람이 컴퓨터 하나로 처리할 수 있는 시대다. 공장도 기계를 통해 자동화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하다못해 패스트푸드 음식점도 점원 대신 주문을 대신 받아주는 자동 키오스크 (Kiosk)로 대치되고 있다.


과거, 대학을 나온 사람의 수 자체가 적어 경쟁상대가 적었고, 무슨 일을 하려든 일정량 이상의 인간 노동력이 필요한 상황에서, 전 세계적으로 경제적 호황을 누린 국제경제 환경 때의 의자수와 오늘날의 의자수를 비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시대가 변했다.


젊은이만 인류 역사상 가장 똑똑해진 것이 아니다. 모두 대학을 나왔고, 기계도 똑똑해져 사람을 대체하고, 국제경제상황은 과거 같지 않다. 강당에 의자를 애당초 내놓은 사람들이 의자수가 예전만큼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의자수를 늘리긴커녕 하나 둘 무용지물인 의자들을 치우는 상황이다.


이게 비단 “헬조선”만의 일도 아니다. 스페인 같은 경우 청년 실업률이 40%를 넘어서고선 줄어들 생각을 하질 않는다. 위 기사에서도 말했듯이 선진국 전체를 통틀어서도 평균 15% 정도의 청년 실업률이 일시적 현상에서 장기적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의자수가 줄어들다 보니 노동의 실질적 희소가치는 더욱더 줄어들고 있다. 공급은 많지만 수요는 상대적으로 줄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사람은 아직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젠 뛰어난 천재 한 명에게 컴퓨터 하나 던져주면 과거 100명이 하던 일 그 이상의 생산성을 낼 수 있다. 기계가 인간이 하던 일을 대신할 수 있는 시대가 오고 있다. 일례로 오늘날 많은 얘기가 나오고 있는 자율주행 자동차가 완성되면 운전을 직업으로 하는 노동자는 필요 없어지는 것이다.



생각 실험을 또 하나 해보도록 하자.


작은 섬에, 정말로 아름다운 여성 한 명과 정말로 잘생긴 남성 한 명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별일이 없다면, 남자는 여성에게 “아메리카노 한잔 하실래요?” 하고 묻는다.


데이트 신청이다. 여성은 별다른 이유가 없다면 승낙할 것이다. 썸을 타다 연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잘생긴 남자를 섬에 한 명 더 추가해보자. 첫 번째 잘생긴 남자 (편의상 A)가 이번에도 여성에게 아메리카노 한잔 하겠냐고 묻는다. 그러자 두 번째 잘생긴 남자 (편의상 B)가 A를 비웃으며 여성에게 다가선다.


아가씨, 저랑은 카페라테를 마시러 갑시다.

아름다운 여자는 이 상황에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말 한마디 내뱉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이 여성의 “애정”은 희소가치가 있는 “상품”이라고 봤을 때,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한 명에서 두 명으로 늘어남) 수요곡선이 오른쪽으로 움직인다. 여성의 사랑이라는 공급곡선은 그대로인데, 수요곡선만 오른쪽으로 움직이면 어떻게 되는가? 당연히 “가치/가격”이 올라가는 것이다.


A와 B가 경쟁하며 더 많은 것을 내놓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제 C가 나타났다. C는 “아가씨, 그러지 말고 저와 근사한 점심식사를 하러 갑시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D가 나타난다. “아가씨, 저랑 저녁을 먹어요. 멋진 파스타를 대접하겠습니다". 그때 E가 나타난다. “아가씨, 저는 당신과 함께 스테이크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싶습니다.”



이 경우, "공급"은 여자의 애정으로 설정되어있지만 얼마든지 "좋은 일자리"가 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하지만, 아름다운 여성은 이런 일련의 일이 일어나는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나타나는 남성들이 늘어나는 짧은 시간 사이에 더 아름답고 훌륭해진 것도 아니다. 단지 그녀의 사랑이라는 재화가 희소가치가 높아짐에 따라 값이 높아진 것뿐이다. 이때 이 여성은 자신에게 가장 많은 것을 주는 남성을 그저 선택하면 될 뿐이다.


이 똑같은 상황이 취업전선에서도 일어난다. 원하는 일자리는 매우 적다 (공급이 적다). 하지만 그 자리를 원하는 사람이 많다 (수요가 크다). 수요가 크면 클수록 경쟁자들은 위 남성들과 비슷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저는 주 5일 8시간 일하면서 300만 원 받겠습니다.”

“흥, 나는 주 6일 8시간 일하면서 280만 원만 받겠습니다.”

“한심하긴. 난 주 6일 10시간 일하면서 250만 원만 받겠습니다.”


들어갈 수 있는 직장 자리가 적을 때, 앉을 수 있는 의자의 숫자가 적을 때, 희소가치가 높은 재화를 얻기 위해 참여자들은 자신이 가져가는 것을 줄이는 방식으로, 자신이 내놔야 하는 것을 늘리는 방식으로 경쟁을 한다. 그러다가 졸지에는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저는 주 6일, 매일 12시간을 3개월간 무급으로 인턴으로 일하겠습니다!
기회만 주시면 3개월 뒤, 마음에 드실 경우 저를 고용해주십시오!"


이런 소위 바닥 치기 경쟁을 하다 보면 결국 기업은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세대”를 헐값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중에 가서는, 공짜로 인턴 노예생활을 할 수 있는 특권을 갖고도 싸워야 하는 상황이 돼서, “무급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 시험까지 치게 되는 상황이 된다.


참고로, 이 현상이 “좋다” 혹은 "바람직하다"라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가만히 있는 상황에서 내 노력을 누가 후려치려고 음모론처럼 판을 조작해서 생겨난 현상도 아니라는 점이다. 모두 노력한 뒤 받아내고 싶은 것은 확실하고 확고한 상황인데, 받아낼 바로 그것이 현실적으로 적기 때문이라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이 바닥 치기 경쟁을 끊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여성관과 연예관이 투철한 사람은 어쩔 수 없지만, 연애가 최종 목적이라면 섬에 있는 다른 여성들에게 다가서면 되는 것이다. 수요가 빠져버리면 되는 것이다. 물론 다른 방법도 있긴 하다. 이 여성에게, 5명 모두에게 골고루 애정을 줄 것을 강요할 수도 있긴 하다. 하지만 아마도 이런 경우, 여성은 불쾌해 단순히 이 섬을 떠나는 방법도 생각할 수 있다. 집단이 몰려들어가 강제성을 내포한 제도로 문제를 접근할 때, 상대가 가만히 있을 거라고 가정하면 안 된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런 상대의 대응을 강압으로 막으면 범죄가 된다.


결론) 이 글을 쓰게 된 한 동영상을 돌이켜보며


TVN의 토론 대첩이라는 프로를 편집해서 나온 동영상이 한동안 돌아다녔다. 제목이 “기성세대를 향한 띵언(명언)”이다. 누군가는 여기서 나온 말들이 “일침을 날렸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서울에 집 한 채 사는 게 꿈꿀 수도 없는 꿈이다”라는 걸 물론 감정적으로 접근하고 “공감”해서 듣는다면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워크-라이프 밸런스가 없다”라는 말도 나온다. 물론 일하다 암 걸려 죽는 것은 정말로 큰 비극이다. 일과 생활의 비율이 90 대 10이라고 한다. 이건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말이다.


워크 라이프 밸런스를 포기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세대가, 인류 역사상 가장 기계화/자동화가 잘된 시대에서, 자신이 주관적으로 원하는 보상을 받기 위해서 그렇게 살아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뛰어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그 괴물 같은 초인들 사이에서 또 성공하기 위해 “워크-라이프 밸런스”를 포기하며 노력해서 사는 사람들이다. 가치가 상대적 기준인 희소성으로 정해지는 현실이다. 나는 워크 라이프 밸런스를 일 60, 내 개인적인 여과 생활 40으로 살면서 거기다 내가 원하는 서울 집도 사고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고 싶다 하는 사람을 너무 나무라고 싶지는 않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질 수 있는 희망사항이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당신이 60대 40의 삶을 살 때, 90 대 10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꿈꾸는 서울 집은 그럼 이 사람들이 사갈 것이다. 물론 이들을 법과 제도로 후려 패서, 강제로 노동을 할 수 없게 막을 순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사람들을 끌어내려 버릴 수야 있다. 작은 섬에서 여성에게 우리 모두와 연애하라고 협박하듯, 강제는 가능할 순 있다. 그런데 그럼 서울 집은 어떻게 할 것인가. 온 나라의 인구가 다 “서울 집”에서 살고 싶은데, 사람은 어르고 달래고 때리고 협박해서라도 경쟁상대에서 인위적으로 배제할 수 있지만, 그렇다면 서울 땅덩어리를 연금술로 넓힐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좁은 땅덩어리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는 모두 살고 싶으니 희소가치가 높아지는 것이다. 90대 10의 삶을 살아도 얻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것을 60대 40의 삶을 살면서 갖고 싶다고 하는 것은 떼쟁이의 생떼이다.


또, 60대 40의 삶을 강제해놓고도, 그 60을 남보다 월등하게 생산성 높게 일하는 사람은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사람을 격리시킬 것인가, 아님 더 “워크 라이프 밸런스”의 “라이프”를 강제할 것인가?

다시 말하지만, “그럼 네가 갖고 있는 특권을 너보다 못한 사람을 위해 법적으로 구속하고 나눠서 넘길 의사가 있냐”라고 물어보고 싶다. 남의 노오오오오오오오오력의 산물에는 관대하지만 자신의 노력의 권리에는 철저한 것이 사람 아닌가. 경쟁사회에서 쉬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행복하고 싶지 않은 인간은 없다. 근데 슬프게도 이 행복이라는 것도 결국 희소가치에 의해 결정된다.


하지만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밑으로 줄줄 흘려주면 경쟁자는 늘어나니 나는 쉬기가 더 어려워지고, 10개의 의자를 갖고 싸워야 할 사람들이 천명에서 만 명으로 늘어나버리면 나는 행복에서 더 멀어진다. 서울 집을 못 사서 서울 월세집 살고 있는 사람이, 지방에서 서울에 살고 싶다 하면 그 월세집을 넘겨줄 수 있는가. “왜 나보다 더 넓은 집을 갖고 있는 사람 놔두고 나한테 그러냐”라고 하면 안 된다. 서울권 밖에서 살고 있는 사람 모두에게 서울 집을 줘야 한다면, 언젠가 자신 위에 있던 사람들의 집이 바닥나서 당신의 월세집 차례까지 올 것이다.

세상이 무정하다고 하여 뭔가 맡겨놓은 것 다시 찾아가는 기분으로 내 행복과 내 서울 집을 내놓으라는 것을 명언이라고 생각하고 일침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달리기 경주에서 메달을 못 땄다고 나의 행복을 위해 나도 메달을 내놓으라 하는 것은, 결국 그 경주에서 메달을 딴 사람은 둘째치고 예선도 통과하지 못해 뛸 기회도 없었던 사람에게도 실례다. 본선에 선 자신은 예선 때 합당한 노력과 경쟁을 통해 마땅히 이 자리에 서있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더욱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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